[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테크놀로지와 섹스하기
2016-09-20
글 : 박수민 (영화감독)
존 카펜터의 <크리스틴>과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
<크래쉬>

거대한 북미 대륙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이곳의 10대 청소년에게 자기 소유의 첫 차는 곧 이성과 섹스를 할 수 있다는 뜻임을 우리는 많은 할리우드영화를 보아서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차에 누굴 끌어들이기 전에, 개인의 소유물로서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마셜 매클루언은 북미에서 사람들이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자가용 이라고 했다. 그들이 개인주의자인 건 언제든 자기 차에 시동을 걸고 훌쩍 떠나버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끝없이 평평하고 널따란 대륙. 도망치고 싶다면 일단 고속도로 위로 차를 달리면 된다. 도달할 목적지는 나중에 결정할 문제다. 조니 캐시가 즐겨 부르던 곡 <I’ve Been Everywhere>처럼, 안 다녀본 곳 없는 길 위의 삶. 떠나고 정착하고 또 떠나길 반복하기 위해서는 차가 필요하다. 그러니 자가용 한대는 곧 한 개인을 의미한다.

테크놀로지가 무엇보다도 필요해진 현실

사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좀 멀어야 좋다. 매클루언의 사상을 좀더 따라가보면, 인간은 거칠고 고된 상호작용을 하기에 서로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울수록 야만적이게 되고 서로를 참지 못한다. 그렇다면 혹시 한국이 점점 더 야만적인 혐오 사회가 되어가는 이유는 좁다란 땅 위의 닭장 같은 건물마다 너무 많은 인간이 근처에 살면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타인의 알고 싶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너무 자주 접하면서, 혼자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할 줄은 모른다. 그렇다고 북미의 개인주의자들처럼 차를 몰고 나가봤자 ‘블랙박스에서 본 세상’을 만나지나 않으면 다행. 어디로 떠나든 결코 반도 안을 벗어날 순 없다(<세상 밖으로>(1994)의 결말은 얼마나 정확했던가!). 한국에서 자가용의 의미는 북미 대륙에서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선 차가 있으면 빨리 갈(거라 여겨질) 뿐이다.

자동차와 도로는 인간이 만들고 이룩한 가장 대표적인 기술과 문명이다. 북미나 호주 등지에서 고속도로 배경의, 자동차가 주요 소재인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진 것도 그만큼 일상에서 친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친숙한 길 위에서 늘 사고가 일어난다. 자동차와 도로는 또한 지금껏 인간을 가장 자주 죽이고 있는 기술 문명이다. 인간의 삶과 뗄 수 없는 기술의 이중성. 문득 궁극의 자동차 영화를 꼽아보고 싶다. 이름 모를 고독한 드라이버가 등장해 신출귀몰한 운전 실력을 보여주고 떠나는 이야기보다 자동차 자체가 더욱 전면에 나오는 다음의 두 영화.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존 카펜터의 <크리스틴>(1983)에서 정말 재미있는 건 자의식을 가진 살인 자동차보다 이 마귀 들린 차의 소유주가 된 소년 아니(키스 고든)의 변화다. 부모의 영향 아래 집 밖을 벗어나지 못하던 소년이 자기 차를 가지게 되자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한다. 그는 이제 언제든지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차를 몰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이동의 자유를 통해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자기가 자신을 통제하는 어른의 세계에 들어선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거대한 물건인 자동차는 소유자인 내가 통제하는 충실한 기계 부하다. 소년과 자동차, 인간과 기계의 만남이 이 모든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동차는 문명의 이기(利器)로서 하나의 상징이 된다. 고도로 문명화된 지금 이 세계에서 개인에겐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테크놀로지가 필요하다.

<크리스틴>

다소 신비스런 요소가 있지만, <크리스틴>은 결국 마이너리티 소년이 자신을 투영시킬 테크놀로지를 만나는 이야기다. 테크놀로지는 인간에게 다른 인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환상을 준다. 기술은 인간에게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기계는 고장나기 전까진 배신하지 않는다. 만약 기계가 크리스틴처럼 자의식을 가져 소유자 혹은 명령자에게 매번 절대적인 사랑으로 응답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더이상 인간을 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가 뜻대로 안 되는 골치 아픈 여자친구 대신 택한 사랑은 한낱 기계덩어리인 자동차 크리스틴이다. 아니가 크리스틴을 향해 “좋아, 보여줘”(Okay, show me)라고 외치자 엉망진창으로 박살나 있던 차가 스스로 재생하는 장면은 이러한 환상의 정점이다. 그 순간 저 빨간 자동차가 인간보다 더 섹슈얼하게 보인다.

인간이 필요 없는 비인간의 세계

인간이 근사한 기술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기계에게 느끼는 감정이 이미 오래전에 성적인 충동에까지 도달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1996)다. 원작자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는 소설 <크래시>(1973)의 서문에서 “픽션은 이미 현실에 존재하며, 작가의 임무는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크로넨버그는 그의 말대로 원작을 충실하게 포르노그래피로 옮겼다. 영화 속 교통사고와 그로 인해 훼손된 육체에서 성적인 충동과 쾌감을 느끼는 중독자들을 보고 관객은 이해와 공감의 문제를 겪지 않는다. 영화는 소설과 같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미 현상이 있고 그 현상에 매진하는 자들이 있다. 사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철저히 개인적인 성욕은 애초에 타인의 이해와 공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성욕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순간 변태 성욕이다. 영화에서 관객에게 오히려 더 문제는 영화 속 저들의 행동이 러닝타임이 다해갈수록 점점 더 유혹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크래쉬>의 인물들이 철저하게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무자비하게 이용하고 착취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섹스에 내재된 인간의 죄의식-상대의 인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임신과 출산의 우려와 책임 등을 제거하고 나면 오직 행위의 쾌락만이 남는다. 이 행위의 지속적인 쾌락이 포르노그래피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제거된 섹스. <크래쉬>에서 주인공 발라드(제임스 스페이더)가 중독된 섹스엔 사랑이 전혀 없다. 그에게 자신과 아내 캐서린(데보라 웅거)의 외도는 둘의 쾌락을 더하기 위한 것이다. 세차장 장면에서 발라드는 뒷좌석에서 본(엘리어스 코티어스)에게 범해지는 아내를 백미러로 보며 흥분한다. 사랑이 제거된 섹스는 생명이 아닌 죽음을 향한다. 섹스에 내재한 다른 요소인 죽음만을 증폭 시키는 것이 쾌락의 극한이다. 죽음 직전 오르가슴의 순간. 그들이 자동차 충돌과 현장의 사체와 영구적인 신체 손상과 흉터에 흥분하는 이유는 이 죽음 직전의 쾌락을 지속하려는 열망, 죽음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절정을 향한 도달 불가능한 집착이다. 끝내 죽음에 도달하면 쾌락은 영원히 끝난다. <크래쉬>에서 섹스는 나의 차로 상대의 차를 서로의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로 들이받는 일이다. 쾌락의 수단인 테크놀로지가 목적의 주인인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자 남는 것은 비인간(non-human)이다.

<크래쉬>의 인물들은 껍데기만 있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상대의 본질이 아니라 재질(材質)에 집착한다. 그와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는 중요치 않고 어떤 모습이며 어떤 질감인지가 중요하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보여주는 차체의 매끈한 코팅, 가죽 시트와 점퍼, 실크 속옷과 스타킹의 질감은 곧 인간의 사물에 대한 페티시즘으로, 물신(物神)의 숭배로 향한다. 이러한 각각의 페티시즘이 자동차로 상징되는 가공할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끝내 인간이 믿는 자신들의 존엄성을 뭉개는 것을 보고 있으면, 관객은 개인이 각자 결합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이쯤 오니 인간이 자동차와 직접 섹스하는 영화의 제목을 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 실제로 자신의 오토바이나 자동차와 섹스하는 사람들이 있고, ‘메카노필리아’(mechanophilia)라는 학명이 존재한다. 그리고 코맥 매카시의 시나리오를 리들리 스콧이 영화로 옮긴 <카운슬러>(2013)에서도 그야말로 굉장한 일화가 있다. 자본주의와 기술 문명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강박과 도착을 안겨준 덕분에, 우리는 이미 온갖 분야의 ‘성애자’(phile)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니가 여자친구 대신 자동차 크리스틴을 택했듯이, 발라드와 캐서린이 교통사고를 통해 서로를 비인간의 영역으로 몰고 갔듯이, 우리도 각자가 사랑하는 테크놀로지와 섹스하며 타인과 나를, 그래서 인간을 내팽개치게 되는 날이 머지않았을지 모른다. 궁극의 자동차 영화 두편이 예측하고 경고한, 인간이 필요 없는 비인간의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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