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한국영화 기술 스탭들에게 바침
2016-09-30
글 : 주성철

“조용한 방과 연필, 그리고 일본쌀만 있으면 돼요.” 어느덧 팔순이 된 에미 와다 의상감독(1937년생)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1985)으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했다. 일본영화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경우는 간혹 있었지만 감독이 아닌 사람으로는 말론 브랜도가 주연한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래 영화 스탭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피터 그리너웨이의 <프로스페로의 서재>(1991)와 <8 1/2 우먼>(1999)을 비롯해 홍콩으로 건너가 <백발마녀전>(1993), <영웅>(2002) 등을 작업하며 세계적인 의상감독으로 활약했다. 그러다 조동오의 <중천>(2006) 의상감독을 맡으며 방한했을 때 인터뷰를 진행한 적 있다. 맵고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해 중국과 한국에서 작업할 때 힘들었다며, 일본쌀로 지은 밥과 한국 김으로만 식사를 해결했다고 했다. 아마도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면 더 많은 해외작업에 나섰을 것이다. 아무튼 아시아 최고의 의상감독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그는, 인생 최고의 순간을 묻는 질문에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했을 때라고 했다. “그때 시상자가 오드리 헵번이었어요. 아니 세상에 오드리 헵번이 내 이름을 부르다니요, 꿈인지 생신지 한참을 멍하게 있었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과 달리 특수분장상은 1982년에 뒤늦게 생겼다. 가장 많이 수상한 사람은 무려 11번 후보에 올라 <너티 프로페서>(1996), <맨 인 블랙>(1997) 등으로 6개의 트로피를 가져간 릭 베이커다. 1940년대부터 활동하며 <대부> 시리즈와 <택시 드라이버>(1976)는 물론 <엑소시스트>(1973)의 악령 들린 소녀의 기괴한 얼굴을 만들었던 딕 스미스는, 오래전부터 그 상이 있었다면 최다 수상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마데우스>(1985)의 나이 든 살리에리 분장으로 딱 한번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2012년에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에이리언>(1986), <쥬라기 공원>(1991),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1993)로 세 차례 수상한 스탠 윈스턴도 빼놓을 수 없다. <쥬라기 공원>의 수많은 공룡들은 물론 애니매트로닉스로 터미네이터의 움직임까지 만들어낸 그의 작업은 특수분장을 넘어 시각효과 전체를 아울렀다. 그럼에도 유난히 기억에 남는 그의 작업은 바로 <배트맨2>(1992)의 펭귄맨 메이크업이다.

현재 거의 모든 한국영화의 시나리오들이 몰리는 조상경의 의상 스튜디오 곰곰과 곽태용, 황효균의 특수분장업체 테크니컬 아트 스튜디오 셀을 만나면서 문득 에미 와다와 스탠 윈스턴 등이 떠올랐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벌컨상을 수상한 류성희 미술감독처럼 그들의 작업도 이제 서서히 바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주에 소개한 서울액션스쿨도 여기 더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때깔’이 달라졌다는 상투적인 표현 아래에는 바로 그들의 존재감이 숨어 있다. 감독이나 작가가 쓴 시나리오는 그 자체로 영화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다. 그것을 1초에 24프레임이 지나가는 한편의 움직이는 영화로 만드는 것은 바로 숙련된 기술 스탭들의 역할이다. 그들은 감독의 창의력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없다면 영화적 상상력이란 결국 무용지물이다. 더구나 어떤 경우에는 순전히 그들의 역량만으로 감독의 연출력과 무관하게 영화의 완성도와 작품성이 결정되기도 한다. 영화가 여타의 예술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거기 있다. 감독의 손과 발과 귀가 되는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번호 특집은 바로 대한민국 모든 기술 스탭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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