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지현의 영화비평] 순리의 지혜 <다가오는 것들>
2016-10-04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생말로의 해안가에 위치한 샤토브리앙의 무덤을 바라보며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진지한 자문이다. <다가오는 것들>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의 바탕에는 이 질문이 자리한다. 영화 속 딸의 언급처럼 바닷가의 묘지란 밀물이 밀려오면 잠길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장소지만, 누군가는 그곳을 택했다. 동일한 교육을 받은 사람, 일상을 공유하는 가족, 가까운 사람들조차 상대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세상 누군가가 완전히 남의 입장을 이해할지는 미지수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은 이러한 주제에 크게 두 가지의 입장에서 다가간다. 먼저, 일상적 삶을 공유하는 가족 구성원들이 영화 전반부의 관찰 대상이 된다. 언뜻 평화롭게 보이는 나탈리의 식구들은 어느 순간 한 가지 어긋남으로 인해 완전히 분리된다. 남편조차 자신의 애인이 가져올 파장을 모두 예상하진 못한 듯 보인다. 이어서 두 번째의 관찰 대상은 사제 관계이다. 나탈리와 파비앙은 철학 교사와 제자 사이로, 둘은 진짜 모자관계보다 더한 정신적 유대감으로 연결돼 있다. 그렇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들의 갈라진 틈은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낸다. 이 불협화음이 정말로 우울하기만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는 삶

샤토브리앙의 무덤뿐 아니라 영화에는 시대를 대표하고 철학을 대표하며 캐릭터의 현재를 대변하는 다양한 은유와 상징들이 등장한다. 책의 제목이나 작가 이름이 그렇다. 루소, 아도르노, 솔제니친, 호르크하이머, 부버 등 여러 사상가의 이름이 차례로 언급된다. 엔첸스베르거의 <급진적인 패배자>, 알랭의 <행복론>, 파스칼의 <팡세>,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레비나스의 <어려운 자유> 등 다양한 책의 표지들도 화면에 잡힌다. 게다가 나탈리가 소속된 고등학교의 이름은 폴 발레리이며, 어머니가 입원한 요양원의 이름은 연출가 장 빌라르의 이름과 같다. 어머니의 장례미사는 유리 가가린 거리에서 진행되기도 한다. 이처럼 지표가 난무하는 작명에 대해 감독은 “주인공들이 지나치는 장소의 이름을 들을 때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방식을 참고해서 ‘이름, 장소, 날짜’에 대한 직접적인 집착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녀의 설명처럼 명료한 상징의 조각들은 영화에서 연대기 순으로 쌓인다. 프랑스 역사의 통로가 지닌 길고 의미 있는 시간의 굴곡이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생각해보면 ‘히스테리를 부리는 노년의 어머니’나 ‘애인이 생긴 남편’에게 상처받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는 여성잡지 상담란에나 등장할 정도의 진부한 고민거리인 것 같다. 영화 속 농담처럼, 부츠를 신고 침대에 오른 시라크를 험담하는 대중의 시시껄렁한 조롱 정도로 멈출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미아 한센-러브의 시나리오는 평범한 소재가 지닌 우중충한 삶의 빛깔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관찰한다. 작품의 표피가 지닌 해답의 명백함을 철학적 논쟁을 통해 한 단계 격상시킨 것이다. 비견컨대 미하엘 하네케가 드러내는 사회지도층에 대한 지적 유희와는 다르다. 이 영화에는 중산층에 대한 비범한 통찰이 담겨 있다. 결코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삶을 그녀는 직시한다. 이자벨 위페르가 보이는 균형감 있는 연기 또한 주제에 대한 설득력을 높인다. 남편의 외도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태도에는 일부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위페르이기에 가능한, 간결하고 기품 있는 태도가 눈앞의 사태를 단번에 진정시킨다. 간혹 이 우아한 중년 여성의 입에서 통속적 욕설이 튀어나올 때는 통쾌한 감정마저 든다. 야외 수업 도중 뛰쳐나가며 “우리 엄마가 좀 미쳤거든” 하고 외치거나, “평생 날 사랑해줄 줄 알았는데. 내가 등신이지”라고 말하는 부분은 방점이 되어 영화의 숨겨진 감정을 발산시킨다.

그럼에도 “급진성을 논하기엔 너무 늙었다”라거나 “예전에 이미 다 해봤다”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대사는 좀더 신중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감추기 때문이다. 천동설이나 나치 논쟁과 같이 단호해도 좋은 주제들과 달리, 신앙이나 예술처럼 편들기 어려운 철학의 분야가 있다. 그런 면에서 나탈리가 지닌 소위 ‘쿨한’ 호연함은 믿음직스럽다. 어느 한쪽을 편들지 못하는 논쟁, 몇 마디로 단언할 수 없는 주제를 그녀는 바라보고 나아간다. 알프스의 산간 지방에서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선택은 그녀의 입장에서 이미 낡은 고민거리인지 모른다. 러시아에 머물던 시절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과도기를 거치는 청년들을 그녀는 자신의 사거리에 서서 지켜본다. 그리고 간혹 격해진다. 역사의 형성이란 그런 면에서 꽤 공정하다. “애들은 품을 떠났고, 남편은 갔고, 엄마는 죽었으며, 나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완전한 자유를 되찾았어”라는 멜랑콜리한 대사를, 관객은 ‘한 어머니의 딸이었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행복했지만 자유만큼은 없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시적 상실과 인간적 짜증, 끝이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한 회의는 영화에서 종종 표현되지만 극 전체를 지배하지 않는다. 불과 35살의 젊은 감독이 소화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응축된 삶의 태도가 이 속에 담겨 있다.

같은 맥락에서 나탈리가 파비앙에게 던지는 한마디는 좀더 진중하게 파헤쳐져야 한다. 영화의 결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 유나바머의 책을 언급하며 그녀는 “네가 인간 생명에 좀더 가치를 두면 좋겠다”는 말을 파비앙에게 조심스럽게 건넨다. 그 결과 파비앙은 상처받고 그녀를 공격한다. 하지만 고양이를 받아들이는 결말 또한 이 대사로부터 출발한다. 주제에 대한 영화 전체의 화법은 이처럼 간접적이다. 영화는 결정적 사건들을 생략하는 대신, 나탈리를 통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제스처를 취한다. 사건이 주는 파토스가 아닌 순리의 지혜를 추구한 것이다. 그녀가 철학서를 통해 배운 지식이 무용하지는 않았다. 즉,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결정적으로 잃은 것이 없다는 게 더 중요하다.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는 삶이 진정 아름답다는 것을 이 작품은 강조한다.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된 인생의 소중함

혹자는 매끈한 표면에서 찾을 수 없는 아쉬운 1%의 균열을 갈망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빛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주인공의 빠른 발놀림이 이 모든 나른함을 앗아간다. 나탈리는 항상 움직인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다양한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끊임없이 동적인 삶의 가운데에서 그녀가 마주하는 풍광은 정신적 안식처의 역할을 한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모습마냥, 인간의 운명이란 배에 올라타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주어진다면, 그건 순전히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야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태어난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가지는 기쁨이 그 모든 가능성의 출발선이 된다. 곧 태어날 새끼 당나귀들, 혹은 늙은 고양이가 맞게 될 새로운 환경도 마찬가지다. 이 소소한 변화들이 추구하는 해답은 예부터 현인들이 추구하던 행복의 모습과 다름없다. 완벽하게 성취하고 화려하게 이끄는 삶이 아니라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된 인생의 소중함을 영화는 강조한다. 그러니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완전히 균형잡은 영화의 시간이 몸소 그 긍정적 가능성을 드러내 보인다. 다채로운 풍경의 시가 되는, 그야말로 시네마의 향연을 통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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