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2016)을 본 뒤로 주인공 혜선(심은경)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정확히는 혜선의 옷이었다. 허벅지가 훤히 다 보이는 짧은 기장에 가슴과 둔부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소재의 원피스. 게다가 통굽의 힐까지. 잠에서 깬 혜선이 남자친구인 기웅(이준)을 찾아 여관방을 나서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나왔을 옷이다. 예기치 않은 좀비의 습격을 피해 달리던 혜선은 신발 두짝을 잃는다. 사태가 악화될수록 혜선의 착장이 수상해 보였다. 경찰서 지구대로 피신한 혜선이 “저희 노숙자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경찰은 혜선의 맨발로 시선을 한번 보낸 뒤 “괴물 새끼들 다 죽여버리겠다”며 윽박지른다. 생존을 위해 혜선이 땅바닥에 눕거나 굴러야 할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던 하얀 속옷. 혹은 속옷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원피스의 무용함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원인 모를 좀비떼의 출현 앞에서 필사의 탈주를 해야 하는 혜선은 어쩌자고 저 쓰잘머리 없는 원피스를 입은 걸까.
<서울역>의 지옥도가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쯤 혜선의 착장의 쓰임을 알 수 있었다. 혜선은 지금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좀비 출현이 부른 파국의 쓰나미와 혜선이 ‘아버지’라고 불러야만 했던 성매매업소 포주 석규(류승룡)의 위협이다. 혜선이 84평형 아파트의 모델하우스에 간신히 은신해보지만 포주 석규는 기어코 혜선을 찾아낸다. 포주에게 혜선의 행방의 지시등이 돼준 건 방바닥에 선연히 찍힌 혜선의 거뭇한 발자국이었다. 맨발로 여기까지 달려온 혜선은 그 맨발 때문에 결국 석규에게 잡히고 만다. 침대에 때려눕혀진 혜선은 훤히 드러난 허벅지 위로 석규가 기어오르는 걸 맥없이 두고 볼 수밖에 없다. 혜선의 이 원피스는 극이 최후로 치닫게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능성’ 원피스라 할 만하다. <서울역>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좀비와 좀비만큼 무서운 인간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세상이 썩었는데 살아서 무엇하냐”는 노숙자의 광기어린 말 한마디조차 허투루 들리지 않을 만큼 영화의 메시지는 명징하다. 살아갈 이유가 없는 세계에서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건 정해진 수순처럼 보인다.
혜선을 위협하는 건 또 있다. 기웅은 혜선에게 “창녀촌에서 도망 나와서 노숙할 때 어미와 같은 마음으로 보듬어줬다”고 말하며 혜선에게 계속 몸을 팔아 돈을 벌 것을 강요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과의 관계도 끝이라고 협박까지 한다. 혼자 남은 혜선은 울면서 말한다. “아빠, 미안해.” 가장 내밀하고 친밀한 상대여야 할 애인이 자신에게 몸을 팔라고 하는 기막힌 순간에 혜선은 왜 아버지를 떠올렸을까. 한참 뒤, 아픈 아버지를 두고 집을 떠나온 혜선의 사정을 알게 되지만 애인의 저질의 말을 듣고 혜선이 곧바로 아버지를 떠올렸다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현재의 비참함이 곧바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으로 이어지는 뉘앙스였으니까. 다음 장면에서 석규가 “혜선의 아비”라고 말하며 등장한다. 석규는 포주이지만 일정 시간 동안 관객은 그가 혜선의 아빠라고 생각하게 된다. 애인을 팔아먹는 데 아무런 거리낌 없는 남자친구는 어머니라 하고, 포주는 아버지를 자처한다. 또래 포주이거나 포주화된 가부장이다. 그들의 악랄함은 혜선을 찾는 과정에서 또 한번 이상하게 변한다. 겁 많고 소심한 기웅은 어느새 또래 포주로서의 면모는 벗어던지고 혜선 찾기에 나선 착한 남자친구로 슬쩍 자리 이동을 한다. 혜선과 재회했을 때 기웅은 “이제 우리 집에 가면 돼”라며 안심시키기까지 한다. 심지어 기웅은 혜선을 잡으려는 포주 석규의 발목을 잡아 혜선에게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주려 한다. 이런 기웅을 보면서 <부산행>(2016)의 남성 캐릭터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낀다. 가정에 소홀했던 석우(공유)에게 아버지와 가장으로서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건 동성인 상화(마동석)다. 치열하게 살아온 아버지들은 끝내 딸들(미래에 태어날 상화의 딸까지를 포함한다)을 구하고 죽는다. 이 결말을 두고 여성이 다음 세대로의 이행의 주체라고 말하는 건 여성의 생존이 ‘가부장’의 보호와 희생으로 가능했다는 영화의 이야기를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악: 우리 시대의 악과 악한 존재들>은 ‘악’에 대한 흥미로운 주석이자 악의 남용에 대한 예리한 분석의 글이다. 그는 처참한 현실을 두고 ‘악’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현실은 더이상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초월적인 것, 신의 영역으로 치부하면 그만일 악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는 순간 비극적 현실의 원인이 해석될 가능성은 차단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좀비의 출현만 봐도 그렇다. ‘기괴함, 섬뜩한 비실재성, 충격적 피상성, 중요한 차원의 결핍, 무한 반복이라는 권태 속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테리 이글턴이 지적하는 악의 특성을 보인다. 좀비화는 완벽한 파괴를 향해 달려간다는 점에서 악마적 환희의 순간을 열어젖힌다. 하지만 좀비 정국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악행들, 예컨대 좀비를 피하려는 시민들에게 물대포와 총구를 겨누는 정부의 악행, 포주의 위협이라는 악행은 이렇다 할 설명 없이 그저 여러 개의 악행들 속에 나열을 거듭한다. 악행 위에 또 다른 악행을 계속해 쌓아올릴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들 악행 사이에는 어떤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인간의 악성과 그 결과로 펼쳐지는 지옥에 대한 감독의 관심은 꽤 오래됐다. 초기 단편인 <지옥: 두개의 삶>(2003)에는 지옥이 두려워 도망가는 이도, 천국행이 예고돼 있지만 죽음이 두려워 도망가는 이도 결론은 지옥행이다. 정해진 답을 향해 달려가는 탈출구 없는 세계는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에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인물들 내면의 딜레마조차 쉽게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인물들은 극악스럽게 죽고 만다. 테리 이글턴은 악을 두고 일상적인 사회적 조건을 넘어서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아니라 했다. ‘악의 남용’에 있어서 중요한 건 우리 자신의 안팎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그 악마성에 대해서 성찰하고 실험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혜선이 처한 현실은 너무도 비극적이다. 좀처럼 허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