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로컬 프로덕션 (이하 워너) 최재원 대표를 잠깐 만난 적 있다. 운영하던 제작사 위더스필름을 나와 워너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전작 <변호인>(감독 양우석, 2013)이 흥행하면서 비즈니스하기 좋은 환경이 구축되었음에도 워너라는 직배사의 현지 프로덕션에 도전하게 된 속내가 무척 궁금했지만, 당시 그는 말을 무척 아꼈다. 다만, “평소 제작자로서 해보고 싶었지만 여러 이유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워너에서는 시도해볼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말은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무척 인상적이었다. 워너 한국 프로덕션의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다시 투자자가 된 그가 시도하고 싶었던 게 무엇일까. 일주일 동안 토론토국제영화제와 뉴욕 출장을 다녀온 그에게 만남을 청해 그때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마침 창립작 <밀정>이 지난 9월27일 700만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을 돌파한 덕분에 시차 적응도 잊은 채 곧바로 업무에 복귀한 최 대표의 얼굴은 쌩쌩해 보였다.
-뉴욕에 출장 간 건 <밀정>의 북미 개봉 때문인가(<밀정>은 지난 9월23일 LA, 뉴욕, 시카고 등 북미 40여개 도시에서 개봉했다.-편집자).
=그렇다. 뉴욕에서 처음 상영된 곳이 IFC 극장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분위기가 대단히 좋더라. 영화의 완성도를 인정해주는 분들이 많아 좋았다. 밖에서 우리 영화를 보니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정>이 700만명을 돌파했다. 창립작으로서 부담이 컸을 텐데. 기분 좋은 출발이다.
=우리끼리는 김지운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한국영화이고, 송강호와 공유가 출연하는 데다가 100억원 넘는 제작비(순제작비 110억원, P&A비 30억원, 총제작비 140억원, 개봉 전 기준)가 투입된 프로젝트가 성적이 안 좋은 게 이상할 거라는 얘기도 했다. (웃음) 개인적으로 좀더 많이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가을 시장의 관객 관람 패턴이 여름 시장과 다르게 변화하는 걸 지켜보면서 전략을 더 세심하게 세워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부담감도 느꼈다.
-영화를 공동 제작한 영화사 하얼빈으로부터 <밀정>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이야기의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나.
=보통 시나리오를 고를 때 처음에는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본 뒤 냉정하게 가치가 있는지 따진다. 영화사 하얼빈 이진숙 대표가 내가 워너로 간지 모르고 공동 제작을 제안하기 위해 찾아와 책을 주었다. 읽고 나니 완성도를 떠나 무언가가 쓱 하고 치밀어 오르는 거다. 다음 날,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암살>(2015)이 이미 같은 시대를 다뤄 천만 관객을 동원한 까닭에 그 시대를 다시 다루는 게 가치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변호인>이 그랬듯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이 어떤 일을 겪으면서 변화하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 시대의 많은 경계인들을 다루고 싶었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적 색깔과 잘 맞을 것 같아 그에게 연출을 제안했다.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나. 직배사가 제작하는 영화인 까닭에 중소기업 투자를 대상으로 하는 모태펀드의 투자를 받지 못했다. 사모펀드(비공개로 소수의 투자자의 자금을 모아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는 펀드다. 고수익을 추구하지만 그만큼 위험도도 크다.-편집자)가 투입됐나.
=원칙적으로 모태펀드는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펀드인 까닭에 국내 대기업 투자•배급사는 모태펀드의 투자 대상이 아니다. 모태펀드에 국적이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워너 같은 외국계 대기업 또한 국내 대기업과 마찬가지일 거다. 그건 모태펀드 운용 관련 규정에 명시된 내용이라기보다는 펀드를 운영하는 쪽(사람)의 원칙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모태펀드의 적용을 받지 않는 개별 펀드들도 꽤 많더라. 사모펀드를 포함한 그 펀드들이 적극적으로 투자자로 참여해준 덕분에 제작비를 조달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리틀빅픽쳐스가 부분 투자로 참여해 충무로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을 워너의 투자 파트너로 참여시킨 건 파트너십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인가, 아니면 자금을 좀더 수월하게 확보하기 위한 전략인가.
=전자에 더 가깝다. 워너가 한국의 다른 플레이어들과 연대를 해야 한다면 파트너가 CJ 같은 대기업이면 사업하기 편하겠지. 하지만 비즈니스를 공정하게 해야 한다면 작은 회사들과 함께 가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겠나. 나 역시 프로듀서다. 한국에서 네트워크가 나쁘지 않은 프로듀서 중 한명이 이 자리를 맡고 있다고 생각한다. 리틀빅픽쳐스 같은 공공적 성격으로 설립된 배급사가 워너의 작품에 투자자로 참여하는 형태가 된다면 나중에 다른 회사와 연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결과적으로 워너와 리틀빅픽쳐스 모두에 윈-윈이 됐다.
-워너로 옮기게 된 얘기를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다. <변호인>을 제작하고 난 뒤 제작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었을텐데 별안간 워너로 옮긴 이유는 뭔가.
=<변호인>을 하면서 제작에 눈을 뜬 것 같았다. 자신감이 생긴 만큼 부담감도 커졌지만 말이다. 유형으로 구분하자면 나는 아이디어를 많이 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제작자이기보다는 좋은 아이템을 잘 골라 완성도 높은 작품이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을 잘 세팅하는 제작자에 가깝다. 제작자로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차에 워너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이들이 한국 시장에서 왜 한국영화를 만들려는지 궁금하더라.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지난해 잠깐 만났을 때 당신은 워너로 옮긴 이유로 “투자자가 된다면 시도해보고 싶었던 게 있다”고 말했다. 시도해보고 싶었던 게 뭔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직접 경험해본 워너 시스템의 특성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롱 텀(longterm) 비즈니스. 크리스토퍼 놀란이 워너와 쭉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창작자와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게 롱 텀 비즈니스다. 한국에서는 CJ나 쇼박스 같은 대형 투자•배급사가 아니면 제작자가 특정 감독과 오랫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어렵지 않나. 두 번째는 워너는 신인을 발굴하는 데 굉장히 적극적이다. 유명한 감독을 잡아야 리스크를 줄이고 그나마 먹고살 수 있는 한국의 환경에서 신인 감독의 작품을 제작하는 건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아무래도 미국계 회사다보니 소재나 인력 구성의 경우 충무로에 비해 제약 조건이 적다. 1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밀정>을 하고 난 뒤 그다음 작품으로 <싱글라이더>(감독 이주영•출연 이병헌, 공효진, 안소희) 같은 20억원짜리 신인 프로젝트를 시도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워너에 들어가자마자 업무 프로세서를 구축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고 들었다.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업무 환경이 다르다보니 양쪽의 업무 문화를 절충하느라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업무 프로세서를 구축하고, 인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계약을 해야 하지 않나. 계약은 양쪽이 원하는 것을 묶는 건데,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코리아)이 그것 때문에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우리도 전부 겪어야 했다. 워너 본사와 우리의 이해관계가 무엇인지 찾는 게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본사와 우리 양쪽 업무의 문화적인 차이가 다 드러나는 거지. 본사에 고마웠던 건,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충돌하는 지점이 생길 때마다 그들은 한국의 문화를 따라주었다. 우리 또한 워너가 가진 카피라이트(저작권) 개념(혹은 원칙)을 지켜야 했고.
-본사와 함께 구축한 업무 프로세서 중에서 한국의 대형 투자•배급사와 다른 점이 있나.
=냉정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업무 진행과 관련한) 자율권이 국내 대기업보다 더 많은 것 같다. 가령, 국내 대기업은 컨펌 체계가 수직적이고 복잡하지 않나. 반면 우리는 복잡하지 않다. 다소 힘든 건 본사에 시나리오를 보내야 하는 까닭에 번역하는 데 2주 정도 걸린다는 사실이다. 그외에 아직까지 특별한 불편함은 없다.
-제작자의 지분이 인건비로 책정돼 수익 배분을 따로 하지 않는 할리우드나 중국과 달리 충무로는 극장 수익을 투자자와 제작자가 6:4로 배분하지 않나. 제작사가 배급 수수료를 포함해 모니터링 수수료, 마케팅 수수료, 해외배급 수수료, 부가판권 수수료 등 각종 수수료를 투자•배급사에 추가로 지불하면 수익 배분이 8:2, 심지어 9:1까지 가는 경우도 있는데, 워너의 수익 배분은 어떤 방식 으로 이루어지나.
=수익을 6:4로 배분하지 않으려면 예산 내에서 충분한 마진(원가와 판매가의 차액. 한마디로 이윤)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제작비를 최대한 낮춰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제작사에 충분한 마진이 지급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예산이 올라가지 않게 하면서 제작자의 지분을 6:4에서 7:3, 8:2로 낮추는 건 어불성설이다. 워너는 되게 쉬웠다. 수익을 6:4로 배분하는 게 한국의 관행이라고 얘기하니 쿨하게 관행에 따르겠다고 하더라. 우리가 수익을 정확하게 6:4 로 나누지 않으면 제작사가 우리와 함께할 이유가 없는 거지. 우리가 5:5로 나누겠다고 설득해도 (신생 회 사인) 우리와 할까 말까인데. (웃음)
-매년 적게는 8편, 많게는 11편의 라인업을 운용하고 있는 대형 투자•배급사와 달리 외화 라인업이 있는 까닭에 서너편 정도의 한국영화만 운용하면 되니 몸집이 가벼운 장점이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할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고.
=편수를 크게 의식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배급사와 마찬가지로 워너 역시 1년에 8개에서 10개 정도의 영화를 배급하고 있다. 그중에서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숫자는 최대 대여섯편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대여섯 편만 못박아놓고 고르는 건 굉장히 보수적인 접근이다. 편수를 정해놓기보다 내부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치에 도달하는 게 지금의 전략이다. 작품을 진행하는 내부적 허들(기준치)이 기본적으로 높은 편이다.
-감독이나 제작자가 솔깃해할 내용들이다.
=배급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존 배급사가 더 낫지 않겠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워너가 다른 국내 배급사보다 낫다, 못하다라고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워너의 구성원들이 제작 마인드가 있는 까닭에 현장 백업을 하거나 아이템을 개발할 때 좀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다. 그게 편하면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게 수월할 것이다.
-<밀정>을 시작으로 향후 라인업이 시장에서 성과를 거둔다면 CJ, 롯데, 쇼박스, NEW 등 기존의 투자•배급사 질서에 긴장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 워너로 간다고 했을 때 “제작사나 운영하지 거기로 왜 갔대?”라고 질문하는 영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거다. 기존의 시장 질서에 건전하고 건강한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해 워너로 온 것이다. 그러면 빅4는 빅4대로 리프레시할 수 있고,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선택지가 하나 늘어나 지금보다 산업적으로 여유 있는 환경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밀정> 이후 라인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싱글라이더>는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영화의 규모가 작아서 제작사와 함께 적절한 개봉 시기와 마케팅 전략을 상의하고 있다. 사이즈가 작은 영화는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투자자든, 제작자든, 배우든, 언론이든 상업영화와 같은 잣대로 바라보면 그 영화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더라. 어쨌거나 <싱글라이더>는 배우들이 워낙 연기를 잘해서 관객이 재미있게 봐주지 않을까 싶다. 이정범 감독의 신작 <악질경찰>(제작다이스필름)과 박훈정 감독의 신작 <VIP>(제작 영화사 금월)도 준비하고 있다. 또 신인 감독들의 프로젝트도 있다. 내년에도 서너편 정도 생각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 모두 극장에서 개봉하는 걸 보려면 워너에 오래 있어야겠다. (웃음)
=모르지. 1년 반 정도 일해왔는데…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내 의지에 따라 워너를 떠난다고 해도 워너와 내가 사업 초반에 기대했던 것들을 유지할 수 있도록 셋업을 해놓는 게 관건이다.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한 군데 오래 있는 스타일이 아닌 것 같고. (웃음) 이걸 하고 있으면 또 안 해본 데 도전을 하고 싶고. 요즘에는 미국에 가보고 싶기도 하고. 미국이 굉장히 자유롭더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