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뉴욕 스토리
2016-10-12
글 : 김혜리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팀 버튼의 그림 동화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1998)에 등장할 법한 인물들이 즐비한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캐스팅 디렉터의 공이 돋보이는 영화다. 뒤통수에 입이 있는 소녀, 몸 안에 벌떼가 사는 꼬마, 한쪽 눈이 영사기 렌즈로 변하는 소년 등 슈퍼 파워라고 규정하기 애매한 ‘다름’을 지닌 인물들을 절묘하게 어울리는 배우(경력/비전문)들이 연기한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기괴한 외모가 아니지만 잠시 눈길을 주면 색다른 기운을 피워낸다. 헬레나 본햄 카터를 닮은 엠마 역의 엘라 퍼넬은, 팀 버튼 헤로인의 전통인 과장된 눈과 인위적 블론드를 계승한다. 주인공의 할아버지로 분한 테렌스 스탬프도 <라이미> 이후 모처럼 보람 있는 역을 즐긴다. 미스 페레그린 역의 에바 그린은? 말하나마나다. 특수효과 없이도 곧장 조류로 변신할 것처럼 보이는 배우가 달리 또 있겠는가?

09/16

<카페 소사이어티>의 뉴욕 청년 바비 도프만(제시 아이젠버그)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여자를 인생의 이상향으로 설정한 다음, 많은 시간을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관한 사색으로 보내는 유대인 남자다. 즉 우디 앨런 세계의 붙박이 캐릭터다. 이 밖에도 바비 주변에는 유대인의 국외자 의식을 유형별로 나눠 가진 남자들이 성운처럼 포진해 있다. 이들은 모두 한 가지 행동에 극단적이고 강박적으로 몰입함으로써 불안을 다스린다. 갱스터인 바비의 형은 조금만 성가신 타인이 나타나면 살해해서 콘크리트를 부어버린다. 도덕적으로 결백한 바비의 자형은 반대로 구구절절이 옳은 말만 늘어놓지만 집 안 책상을 벗어나 행동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다. 할리우드에서 미래를 꿈꾸는 바비가 찾아가 의탁하는 성공한 외삼촌 필(스티브 카렐)은 안정된 지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미팅 약속이 잡힌 내로라하는 무비 스타의 이름을 줄줄이 읊으며 본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끊임없이 어필한다. 이 남자들의 속성은 세상이 알고 있는- 그리고 우디 앨런이 초기작에서 묘사한- 유대인의 상투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유럽을 돌며 영화를 만들고 다시 미국으로 귀환했지만, 인간의 욕망 및 민족성에 대한 우디 앨런의 경험과 견해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어 보인다. 여기서 앨런의 강고한 관점 하나가 다시 등장한다. 할리우드를 오래 머무를 수 없는 허영의 시장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바비는 그토록 평생의 사랑으로 확신했던 보니 (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거절당하자 별다른 설득의 노력 없이- 삐딱하게 보자면 기다렸다는 듯이- 뉴욕으로 돌아온다. 할리우드 묘사와 관련해 <카페 소사이어티>가 특이한 점은, 외삼촌 필이 줄줄이 거명하는 진저 로저스, 바버라 스탠윅 등등의 스타들이 극중에 코빼기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 파리에 모여든 미국과 유럽의 문인, 화가를 대거 스크린에 불러내 주인공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게 했던 <미드나잇 인 파리>와 대조적이다. 넘겨짚기이기 십상이겠지만, 아무래도 우디 앨런은 후자에게서 예술적 동족의식과 귀속집단을 발견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결같은 인물과 세계관이 곧장 영화의 약점은 아니다. <카페 소사이어티>를 보면서 내가 가라앉은 이유는 우디 앨런의 새 영화에서 시간의 박동이 사라졌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바비는 본인을 포함해 전형적인 인물들의 ‘소사이어티’에서 정해진 대로 사랑에 빠지고 익숙하게 민망스러운 몇몇 일화를 겪은 다음 뉴욕으로 돌아와 클럽을 개장하고 수순처럼 성공시켜 실연을 무마한다. 드라마가 척척 수월하게 넘어가는 특징은 전작에도 있었지만, 우디 앨런 본인의 내레이션이 전적으로 주인공의 동기를 해설한 형식은 <카페 소사이어티>를 유난히 할아버지가 매일 밤 거듭 들려주는 베드 타임 스토리로 느끼게 만들었다. 비행으로 치면 오토파일럿(autopilot, 자동 운항) 모드의 여정이랄까.

09/29

2009년 1월15일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서 샬럿으로 향하던 여객기가 이륙 직후 기러기떼와의 충돌로 양쪽 엔진의 동력을 잃고 허드슨강에 불시착했다. 회항과 인근 활주로 착륙을 권한 관제탑의 유도는 실행 불가하다고 판단한 42년 경력의 체슬리 설렌버거 기장의 선택이었다. 이어진 승무원들의 침착한 행동과 뉴욕 해양구조대 및 통근 선박의 즉각적인 구조로 155명의 탑승자는 전원 무사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설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통상 그려온 영웅들에 비하면 매우 일상적이고 산문적인 히어로다. 자신이 믿는 정의를 지키는 과정에서 폭력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불러오고, 그 폭력의 속성에 대해 사색하는 부류의 남성 인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설리는 경험으로 체득한 존경할 만한 스킬을 가지고 직업적 규율을 실천하는 시민일 뿐이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하 <설리>)이 항공기 사고를 그리는 방식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관객이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불시착 상황을 영화는 시점과 리듬을 조금씩 달리해 거듭 복기한다. 이 과정에서 사소한 디테일들이 추가로 드러나지만, 사고 개요는 반전되지 않는다. 급박하게 오가는 대화도 감정이 제거된 프로토콜들에 가깝다. 이스트우드는 심지어 강에 내린 승객들을 괴롭혔을 1월의 추위조차 강조하지 않는다. <설리>의 관심사는 재난의 스펙터클도 아니고 항공 안전 시스템과 언론에 대한 본격적 문제제기도 아니다. 오직, 가라앉는 기체를 마지막으로 탈출하면서도 제복 재킷과 비행일지를 챙기고 전원이 구조선에 오른 것을 본 다음에야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한 남자에 집중한다. <플라이트>의 경우처럼 영웅적 비행을 해낸 주인공의 숨겨진 사생활의 어둠이 폭로되는 일도 없다. 설리는 단조로우리만큼 일관된 인물이다. 설리를 포함한 승무원과 구조자들의 행위에는 이처럼 ‘영화적’ 영웅성이 전무하지만, 궁극적으로 이스트우드는 유일한 희망으로서 고결한 개인, 즉 영웅을 지목한다. 물론 이스트우드는 설리의 행위를 반문하는 미국 교통안전위원회(National Transportation Safety Board)쪽 인물들을 악역 캐리커처로 그리는 얕은 수는 쓰지 않는다(그들은 다만 관객의 눈에 성가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스트우드가 표현하고자 하는 신념은, 3천 피트 상공에서 155명의 생명을 싣고 차가운 강으로 곤두박질치는 상황의 리더십에 대해 미디어나 위원회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는 것, 절차가 어떻든 실제로 역사를 구하는 힘은 영웅적 개인에게서 나온다는 인식이다.

그리하여 이스트우드에게는 설리를 영화에서 철저히 고립시키는 일이 이야기를 성립시키기 위해 긴요한 과제였던 것 같다. 실제로 18개월에 걸쳐 이뤄진 조사 과정과 달리 영화 속 설리 기장은 사고 당일부터 맨해튼 호텔에 갇히다시피 머물며 매스컴의 숭배와 위원회의 추궁을 받아낸다. 그가 수화기 너머의 아내(로라 리니)와 두딸을 상황이 해결되기까지 만나지 못하는 사유는 구성의 묘 외에 생각하기 어렵다. 대신 설리 곁에는 “매뉴얼대로 따랐다면 우리는 다 죽었다”라는 말로 감독의 견해를 대변하는 남성 동료 부기장(에런 에크하트)이 있다. 이 연출에는 이야기를 압축하는 실용적 목표도 있었겠으나 영웅적 개인의 고독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더 커 보인다. 그동안 관객은 설리가 호텔 방에서 악몽을 꾸고, 멍하니 욕조에 걸터앉아 물소리를 듣고 TV 화면에 빈 시선을 둔 채 골똘히 번민하는 광경을 지켜본다.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 설리는 홀로 이스트 강변과 타임스스퀘어를 조깅하고 급기야 해결책조차 혼자만의 ‘유레카’ 모멘트를 통해 발견한다. 나아가 그의 비행 인생 역사까지 플래시백으로 독점적으로 공유하며 관객은 고립된 주인공의 우군이 되어간다. 실제 발생한 재앙이라는 커다란 스코프를 가진 영화치고 <설리>의 특이한 점은 극중 최대의 갈등조차 주인공 1인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투쟁은 ‘교통안전위원회 vs 설리’가 아니라 “나는 옳았다”라는 설리와 “내 판단과 행위는 정말 최선이었는가?”라고 의심하는 설리 사이에 발생한다.

<물숨>

좋 아 요

숨비소리

<물숨>의 고희영 감독은 제주 출신임에도 해녀들의 생활에 카메라를 들고 진입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과연 영화가 엿본 해녀들은 땅과 바다, 어느 한쪽 없이는 온전히 살 수 없는 이족(異族)처럼 보인다. 스스로 “물힘으로 산다”고 말하는 그녀들은 바다에서는 시간의 중력을 벗어나는 양 지상에서보다 한결 빠르고 유연하다. 입수하기 전 해변에 모여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는 긴장을 감춘 모습은 물새 무리의 그것 같다. 바다 생물들이 그녀들에게 갖는 의미도 사뭇 다르다. 해초는 미더운 수입원이지만 발목을 얽는 덫이기도 하고 머리 위 고깃배는 흉기일 수 있다. 문어는 숨구멍을 막는 영악한 적이고, 전복은 과욕을 부르기에 위험한 유혹이다. 무엇보다 제주 해녀들을, 지상만큼 바다에 속한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녀들이 고래처럼 잠수 사이에 떠올라 내쉬는 숨비소리다. 휘파람 같기도, 비명 같기도 한 이 음향을 가리켜 늙은 해녀는 토로한다. “사방이 고요할 때면 그 ‘호이호이’ 하는 소리가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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