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관심 있는 작품은 언제나 최근에 본 것들이다. 예컨대 <인터스텔라>는 볼 당시에는 가슴 벅참을 느꼈지만 얼마 전 케이블TV에서 재방송을 보니 ‘저런 장면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잊은 상태였다.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가슴속에서 사라지는 영화를 과연 ‘인생의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래서 난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영화 <서울역>을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의 영화’로 꼽으련다. <서울역>은 집에서 VOD로 봤다. 할 게 없어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극장과 달리 집에서 영화를 보는 건 산만해질 위험이 높다. 하지만 좋은 영화는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고, 난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 채 <서울역>을 봤다.
다들 알다시피 <서울역>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이다. 그리고 연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다가 실사영화 <부산행>을 찍었다. <부산행>을 혼자 극장에 가서 봤다. 난 원래 스토리에 구멍이 나면- 이걸 유식한 말로 개연성이라고 하나보다- 영화에 집중이 안 되는데, <부산행>이 딱 그랬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으니 그 감독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서울역>을 본 이유는 감독이 원래 하고 싶었던 얘기가 여기 담겨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서였다. 과연 그랬다. 난 <부산행>보다 <서울역>이 훨씬 더 무서웠다. ‘훨씬’이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게 <부산행>은 사실 무섭지 않았다. 수백명의 좀비보다 팔뚝을 걷어붙인 마동석이 더 무서울 지경이었다. 추측건대 그건 좀비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스크린에만 있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 감독은 ‘좀비보다 무서운 게 바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 같지만 거기 나오는 악역이 너무 일차원적이라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친구가 죽었다고 해서 좀비에게 기차문을 열어주는 할머니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면 <서울역>에서 마주하는 장면들을 보자. 여자친구를 성매매로 내몰고 돈을 챙기는 남자, 노숙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사람들, 그리고 안전을 위해 멀쩡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정부 등은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우리가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그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그 무서운 현실 앞에서 좀비는 그렇게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까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감독의 메시지는 <부산행>보다 <서울역>에서 더 잘 구현됐다.
두 영화에 대한 반응은 내가 내린 평가와 완전히 달랐다. <부산행>은 관객의 찬사 속에서 1100만 관객을 돌파한 반면, <서울역>은 5.24의 낮은 평점에 허덕이고 있다. <서울역>이 <부산행>의 프리퀄이라는 홍보문구에 사기당했다고 울부짖는 네티즌의 글을 읽고 있으면 아무리 영화라지만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싶다. 이들이 바랐던 건 도대체 뭘까? 수백명의 좀비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살육하는 광경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젊은이들은 헬조선을 외친다. 열심히 해도 취직이 안 되고, 돈이 없어 결혼도 할 수 없는 현실을 지칭하는 게 바로 헬조선이다. 하지만 헬조선을 외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코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세상이 헬조선이라면 우리가 나서서 헬조선을 헤븐조선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 첫 단계가 헬조선의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 그러니까 <서울역>을 보는 것, 여친을 팔아 돈을 버는 남자가 어쩌면 내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그 변화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이 영화를 보고 별점 테러를 한다. 곪아터지는 상처를 징그럽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격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자. 그 상처를 외면하면 할수록 병균이 더 깊숙이 침투해 몸을 점점 망가뜨린다는 것을.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 교수. 저서로 <서민의 기생충 콘서트> <서민의 기생충 열전> <서민적 글쓰기> 등이 있으며, <컬투의 베란다쇼>에 패널로 출연했다. <경향신문>에 칼럼 ‘서민의 어쩌면’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