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제이 바이다 감독이 지난 10월9일, 바르샤바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90살. <제너레이션>(1955)을 내놓은 이래 <바웬사, 희망의 인간>(2013)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폴란드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걸어온 끝에 맞은 죽음이었다. 그의 유작은 89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출품작으로 선정된 <애프터이미지>(2016). 이 전기영화에서 바이다는 폴란드의 전위미술가 브와디스와프 스트셰민스키의 생애 말년을 다룬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직후에서 생을 마감하는 1952년까지의 시간을 다룬 <애프터이미지>는 한 예술가가 전후 폴란드를 지배한 소련의 억압에 맞서서 자신의 예술관과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려 한 투쟁과 수난의 이야기이다.
작업실이 창문 밖에 부착되는 프로파간다물에 의해 붉게 물들어가는 장면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획일화되는 시대상을 은유하지만, 스트셰민스키는 아내의 무덤에 푸른 물감으로 칠해진 꽃을 두고 오는 행위를 통해 자유를 옹호하며 어떠한 고난과 정치권력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드러낸다. 강압적인 시대의 흐름에 맞선 개인의 신념. 시공간적 배경의 선택과 특유의 문제의식, 시각적 상징의 활용과 낭만주의 등 여러 면에서 <애프터이미지>는 안제이 바이다 필모그래피의 여러 특징들을 상기시킨다. 극중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시대의 영화 사조에 맞서 싸우며 폴란드영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던 안제이 바이다는 감독으로서의 일평생을 정리하는 기분으로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폴란드영화의 전환점을 만들다
안제이 바이다는 1926년 3월6일 폴란드 수바우키의 전원지대에서 태어났다. 기병대 장교인 아버지와 학교 선생이었던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바이다의 인생은 그의 나이 14살 되던 해인 1940년에 큰 파란을 맞는다. 독일과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소련군이 스탈린의 승인하에 폴란드군 포로들을 모조리 처형한 카틴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그 희생자 가운데 아버지 야콥 바이다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이때의 경험은 훗날 바이다로 하여금 카틴 학살을 재현한 <카틴>(2007)을 만들게 한 계기가 된다). 2년 뒤 레지스탕스에 참가한 바이다는 전쟁이 종결된 후 크라코프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이후 우츠 고등영화학교로 옮기면서 영화인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폴란드영화의 아버지’로 칭해지는 알렉산데르 포르트의 문하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기본을 다져나가던 바이다는 <제너레이션> 연출로 감독으로 데뷔한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노동자 청년 스테치가 독일군에 동료를 잃고 청년 레지스탕스 단체에 가입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처녀작은 감독의 경험이 반영된 자전적 영화였다(또한 이 작품은 20살이었던 로만 폴란스키의 배우 데뷔작이기도 하다). 시대 분위기상 사회주의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떨쳐낼 수 없었던 불완전한 작품이지만 자신감을 얻은 바이다는 이어서 1944년 바르샤바 봉기를 배경으로 독일군 증원부대를 피해 지하로 밀려난 폴란드 병사들을 그린 <카날>(1957)을 내놓는다. 지상은 독일 점령군이 장악한 가운데, 바르샤바의 지하수로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던 병사들은 곳곳에 설치된 함정과 가스로 희생되고, 처절한 생존투쟁을 거치면서 차츰 광기에 물들어간다.
영화의 주역인 반모스크바 국내군(Armia Krajowa)이 소련에 반대한 친서방파 레지스탕스였기에 논란이 일었지만, <카날>은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1957)과 더불어 칸국제영화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바이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다. 폴란드의 역사와 현실, 낭만적 민족주의와 휴머니즘에 천착한 바이다의 작가주의는 예지 안제예프스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재와 다이아몬드>(1958)에서 정점에 달한다. 종전 후 친소련파 인민군과 대립하는 국내군 대원 안제이와 마치엑이 공산당 간부 슈츠카를 암살하려다 억울한 노동자를 살해하게 된다는 사건의 아이러니를 통해 바이다는 혼란스러웠던 전후의 시대상과 그로 인해 초래된 인간성의 파괴를 고발한다. ‘전쟁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 영화로 그는 베니스국제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상을 거머쥔다.
역사에서 당대로, 비판에서 참여로
1971년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를 포함한 신진 영화인들이 다큐멘터리의 정신을 극영화 형식에 접목한다는 모토로 크라코우 선언을 하면서 폴란드영화는 새로운 물결을 맞는다. 바이다 또한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시민 케인>(1941)처럼 파편화된 진실의 조각을 짜맞춰나가는 구성의 세미 다큐멘터리영화 <기적의 사나이>(1976)는 크라코우 선언을 반영한 필모그래피의 한 전환점이다. 바이다는 초과생산 목표를 달성한 노동자 영웅 비르쿠트를 취재하는 여대생 아그네츠카의 시선을 통해 비르쿠트의 이미지가 당국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선전용으로 소모된 영웅이 쓸모를 잃고 폐기되기에 이르는 등 체제 이면의 은폐된 진실을 비추며 소련식 선전영화의 허구성에 일침을 가한다. <기적의 사나이>는 170만 관객이 관람하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결합을 시도한 이 작품을 기점으로 바이다의 영화는 사실주의의 영역에 진입해 당대 폴란드의 정치상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레흐 바웬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폴란드 연대노조는 1980년에 공장 노동자들을 단체 해고한 정부에 항의해 사회주의국가 최초의 합법적인 파업을 이끌어낸다. 이때 그단스크-레닌 조선소를 방문한 바이다는 자신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노동자들의 요청에 감동받아 역작 <철의 사나이>(1981)를 만든다. <기적의 사나이>의 속편으로 비르쿠트의 아들인 톰 치크와 그의 아내가 된 아그네츠카가 자유화 운동에 나서는 모습을 그린 <철의 사나이>는 연대노조의 탄생과 폴란드 민주주의 운동의 전개과정을 담은 생생한 역사적 자료이다(영화의 다큐멘터리 부분에서 실제 바웬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는 범국민적인 호응을 얻었고 제34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지만 같은 해 12월 계엄령이 선포되고 바웬사를 포함한 민주화 인사 5천여명이 구속당하는 반동이 밀어닥친다. 바이다는 망명길에 올라 유럽 각지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지만 그 와중에도 프랑스 혁명기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 대하서사극 <당통>(1982)을 발표한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계엄령 치하의 폴란드에 빗댄 이 영화에서도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의 날은 예리하게 서 있다.
1989년 마침내 귀국한 바이다는 폴란드의 자유화에 공헌한 바를 인정받고 상원의원을 역임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그는 <코르작>(1990)과 <카틴> <애프터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꾸준히 만들며 영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안제이 바이다의 생애는 영화로 시대를 증언하고, 더 나아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견지했으며, 그 믿음을 기어이 실천해낸 한편의 드라마였다. 20세기를 짊어졌던 철의 사나이. 그의 빈자리가 너무도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