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제18회를 맞이한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ucheon International Animation Festival, 이하 BIAF)은 이제 명실상부 아시아 넘버원 애니메이션영화제로 도약 중이다. 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국제경쟁으로 전환한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간 다진 탄탄한 기반을 바탕으로 전세계 애니메이션의 경향과 미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초청작을 포함하여 41개국 222편의 작품 중 어느 것 하나 놓칠게 없지만 그중에서도 7편의 장편경쟁 애니메이션들을 미리 소개한다. 안시, 자그레브, 슈투트가르트 등 전세계 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작품들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 주목받은 신작들도 있다. 더불어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진행되는 ‘프랑스 특별전’과 화려한 게스트에 대한 짧은 소식도 전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올해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메가박스 코엑스에서도 상영할 예정이니 작품의 면면을 확인한 후 직접 가서 만나자.
<내 이름은 꾸제트> My Life as a Courgette
감독 클로드 바라스 / 스위스, 프랑스 / 66분 / 2016년
꾸제트는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홀로 남은 어머니는 꾸제트를 돌보기는커녕 술에 기대 매일을 보낸다. 꾸제트는 그런 환경에서 맥주캔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소년이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고로 어머니를 살해하게 된 꾸제트는 경찰 레이몬드의 배려로 아동보호시설로 보내진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소년은 다양한 사연을 품은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점차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간다. 언뜻 단조로운 성장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꾸제트가 아동보호시설에 오게 된 사연은 기구하지만 막상 보호시설에서의 생활은 소소한 일상의 연장이다. 하지만 그 소소한 표현들이 이 작품의 힘이다. 우리는 상처입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키는 길은 무엇인가. 소년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내 이름은 꾸제트>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이 스스로 두발로 설 수 있는 공간과 거리를 마련해줄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를 인내심 있게 지켜본다. 자신의 죄를 자각하지도 못한 아이는 보이지 않는 배려 속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깨달아가고 비로소 한 사람의 세계를 형성한다. 민감하고 어두울 수 있는 소재임에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한 섬세한 전개가 인상적이다. 특히 스톱모션의 부드러운 캐릭터 디자인은 따뜻하고 정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송경원
<4월25일, 갈리폴리> 25 April
감독 리안 풀리 / 뉴질랜드 / 84분 / 2015년
갈리폴리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은 물론 전쟁사에서도 잊지 못할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지중해 지배권을 둘러싼 전략•전술적 측면의 중요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연합군과 터키군 양쪽에서 50만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며 상륙전의 어려움을 새삼 입증한 전투였다. 끔찍하지 않은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많은 피를 흘린 전투였던 셈이다. 다시 말해 갈리폴리는 끔찍한 전장이었다. <4월25일, 갈리폴리>는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와 그날의 기억을 스크린에 되살린다. 실제 전투에 참여했던 공무원, 사무 변호사, 목수, 농부, 학교 교사, 간호사 등 6명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아픔과 상실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바시르와 왈츠를>(2008)과 같은 애니메이션 기법과 다큐멘터리 구성의 결합이 강력한 효과를 자아낸다. 실제 필름 못지않게 당시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재현해 전장의 황폐함에 대해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다. –송경원
<버드보이와 잊혀진 아이들> Psiconautas, the Forgotten Children
감독 알베르토 바스케스, 페드로 리베로 / 스페인 / 75분 / 2015년
무분별한 개발로 황폐해진 미래, 파괴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쥐-인간들이 있다. 버드보이는 그런 망가진 세상을 등지고 홀로 숨어 산다. 어느 날 소녀쥐 딩키는 동경하는 버드보이를 찾기 위해 두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거친 세상 밖으로 나온 세명의 ‘잊혀진 아이들’은 곧 위험에 노출되고 버드보이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괴적인 힘을 드러내며 폭주한다. 단편영화 <버드보이>와 알베르토 바스케스의 동명 그래픽 소설을 바탕으로 한 <버드보이와 잊혀진 아이들>은 일견 디스토피아를 다룬 숱한 영화 중 하나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건 세계관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이 아니라 어둡고 잔혹한 세계를 가감 없이 그려낸 거침없는 표현력이다. 약물중독자인 버드보이는 일종의 다크 히어로인데 자신의 내면과 속성을 드러낼 때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우울하고 파괴적인 일면을 응시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려는 태도가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끌어올린다. 쉽게 눈 돌리기 어려운, 어두워서 더 매혹적인 잔혹 동화다. –송경원
<손 없는 소녀> The Girl without Hands
감독 세바스티앙 로덴바흐 / 프랑스 / 76분 / 2016년
돈에 눈이 먼 아버지가 딸의 손목까지 자른다. 이후 소녀는 물의 신의 도움으로 잘생긴 왕자를 만나지만 행복해지려는 찰나 왕자는 전쟁에 나간다. 사악한 악마의 계략으로 소녀와 소녀가 낳은 아이를 죽이라는 잘못된 전갈이 오고 소녀는 도망치듯 왕궁을 빠져나온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손 없는 소녀>는 올해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장편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제의 권위가 반드시 작품의 완성도를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이 영화를 보면 상업 스튜디오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애니메이션만의 미학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해서 더 아름다운 선과 인상적인 색감의 조합이 이뤄낸 이미지들은 매 장면 한폭의 미술작품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선과 색으로 채워낸 감각적인 화면은 이내 시선을 빼앗고, 단순한 화면 덕분에 역동적인 움직임이 한층 부각되는 신기한 경험을 만끽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본질과 아름다움을 새삼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송경원
<우리집 멍멍이 진진과 아키다> My Dogs, JinJin & Akida
감독 조종덕 / 한국 / 67분 / 2016년
재영의 집에는 외견은 닮았지만 종은 다른 개 진진과 아키다가 있다. 서로 으르렁대는 두 마리 개처럼 매일 싸우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재영은 항상 우울하다. 어느날 재영은 가족보다 개를 아끼는 아빠에 대한 원망으로 진진을 집 밖으로 내쫓아버리고 풀려난 진진은 옆집 순영의 동생을 문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개를 내놓으라고 하자 아빠는 아끼던 진진이 아니라 아키다를 내놓고, 누명을 쓴 채 끌려가는 아키다를 보며 재영은 죄책감에 빠진다. 7편의 경쟁작 중 유일한 한국 작품이자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는 이 작품은 푸근한 그림체로 가족의 의미와 소년의 성장을 담담히 전한다. 추억을 자극하는 동네 풍경도 그렇지만 파스텔톤의 그림체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자연스러운 묘사와 골목길 정경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진다. 성장담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건 이른바 ‘정’(情)이라는 모호한 감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안정적인 작화와 좋은 드라마가 만난 수작이다. –송경원
<너의 이름은> Your Name
감독 신카이 마코토 / 일본 / 107분 / 2016년
일본에서 1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신카이 마코토의 최고 흥행작으로 거듭난 <너의 이름은>은 그간 신카이 마코토가 선보인 미학의 대중적 폭발력을 증명한다. 시골의 나른한 일상에 지친 여고생 마츠하는 좁은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어느 날 마츠하는 도쿄에서 생활하는 남자가 되는 꿈을 꾼다. 같은 시각 도쿄에서 살고 있는 남고생 타키도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시골의 여고생이 되는 꿈을 꾼다. 신기한 꿈과 체험은 계속 이어지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이 시공을 초월해 뒤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상, 애틋한 그리움, 극도의 사실적 묘사로 요약되는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풋풋한 판타지가 장편에서도 그 힘을 잃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놀랍다. 중•단편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연출들이 장편으로 전환되었는데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건 빽빽할 정도로 채워낸 디테일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 덕분이다. 작고 사소한 감정들이 우주적인 스케일로 전환될 때의 감동은 긴 파장의 울림으로 기억된다. 전작들보다 훨씬 단단한 서사의 밀도도 이채롭다. 온전한 신카이 마코토의 우주, 한 사람의 완성된 세계를 접할 수 있다. –송경원
<윈도 호스> Window Horses
감독 앤 마리 플레밍 / 캐나다 / 85분 / 2016년
로지 밍(샌드라 오)은 중국인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로지는 스스로 시집을 내고 이란에서 열리는 시 축제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로지는 어릴 때 자신을 떠난 아버지의 자취를 확인한다. 아시아인인 로지는 프랑스에 관한 시를 쓰고 이란으로 날아가 다양한 문화권의 조력자들을 만난다. 로지가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 자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중에 만나는 그 사람들이 각각 어떤 피를 물려받았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러 문화권의 역사와 철학, 시와 음악이 교차하는 동안 관객은 어느새 보편적인 사랑의 가치를 재확인하게 된다. 시구는 언어에 지배받지만 그 의미는 언어를 초월하고, 시 낭송 중 배경에 깔리는 다채로운 애니메이션들은 시의 감흥을 충실히 반영한다. <윈도 호스>는 감독 앤 마리 플레밍의 자전적인 스토리가 담긴 그래픽노블을 원안으로 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윤혜지
특별전: 더 프렌치 이어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2015∼16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올해 BIAF에서는 다채로운 프랑스 애니메이션을 만날 수 있다. 장편 5편, 단편 51편이 소개되는 이번 특별전에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개의 스튜디오 JSBC(Je Suis Bien Content), 폴리마주, 세크르블루의 작품들이 중점적으로 소개된다. JSBC의 첫 장편이자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페르세폴리스>(2007)를 다시 한번 스크린에서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번에는 마크 주셋 프로듀서가 직접 방한해 작품에 대한 Q&A는 물론 제작 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상세한 해설을 해줄 예정이다. 폴리마주의 자크 레미 제라르 감독, 세크르블루의 론 다인스 프로듀서도 방한하여 한국 관객과의 만남을 준비 중이다. 특히 세크르블루의 첫 장편애니메이션이자 안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사샤의 북극대모험>(2015)은 놓치지 않고 봐야 할 작품. 론 다인스 프로듀서의 마스터클래스에서는 작품에 대한 해설은 물론 프랑스 애니메이션 전반에 대한 흐름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자크 프레베르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시킨 프랑스 시애니메이션 26편이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좀처럼 접하기 힘든 이색적인 작품이 안목을 한층 넓혀줄 것이다. –송경원
실뱅 쇼메 전작전과 마스터클래스
현재 활약 중인 유럽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실뱅 쇼메 감독이 한국을 찾는다. 그의 장편애니메이션 <벨빌의 세 쌍둥이>(2003), <일루셔니스트>(2010), 장편 극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2013)은 물론 단편 <노부인과 비둘기>(1997), <심슨-더 카우치 개그>(2014), <카르멘>(2015)까지 한번에 만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다. 4번의 아카데미 노미네이션, 앙굴렘 만화대상, 2번의 프랑스 아카데미 수상, 영국 아카데미 수상 등 수상 경력만 해도 다 열거하기 힘든 거장이지만 그의 진가는 단지 애니메이션 연출에 있지 않다. 만화작가, 애니메이터, 감독, 작곡가, 연주자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 세계는 특정 장르가 아니라 온전히 ‘실뱅 쇼메’라는 하나의 완성된 우주로 표현된다. 흔히 감독들이 좋아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그는 은둔자라 할 만큼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이번 그의 전작전은 한층 의미를 더한다. 이번 전작전과 마스터클래스에서는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가 어떻게 서로 호응하며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내는지 실뱅 쇼메의 작업 비결을 직접 듣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실뱅 쇼메가 준비 중인 차기작 <1000마일>에 대한 소개도 한다고 하니 실뱅 쇼메의 작품을 사랑하는 팬들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송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