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톱에 가까운 주연으로 영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십대 초반의 배우는 드물다. <널 기다리며> <수상한 그녀> <광해, 왕이 된 남자> <써니> <불신지옥>…. 13년 동안 심은경은 쉼 없이 달려왔다. 그런 그녀가 쉼표 하나를 찍었다. 그녀가 출연한 첫 독립영화 <걷기왕>은 만사태평에 잘하는 것 하나 없지만 ‘걷기’ 하나는 잘하는 소녀 만복의 이야기다. 청년들에게 꿈과 열정, ‘노오력’과 극복의 서사를 강조하는 현 세태 속에서도 만복은 뛰지 않고 걷는다. 대중의 기대에 따른 부담감과 책임감을 등에 업고, 보다 나은 연기를 추구하면서 스스로를 부단히 채찍질하며 달려온 심은경도 만복을 만나 잠시 멈춰 섰다.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만복의 속도로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그녀다. 13년차, 그럼에도 아직 23살인 그녀는 자기만의 페이스를 지키며 오래도록 걷는 법을 모색 중이다. 천천한 걸음으로 돌아온 배우, 심은경을 만났다.
-<널 기다리며> 이후 첫 주연작으로 독립영화인 <걷기왕>을 선택했다. <서울역>에 목소리 출연을 했지만 본격적인 독립영화 출연은 처음이다.
=평소에 다양성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다. 영화가 다양해져야 관객이 볼 수 있는 장르도 많아지고 배우들이 도전하고 싶어지는 역할도 많아지지 않겠나. 다양성영화 작품을 찾던 중에 마침 <걷기왕>을 제안받고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시나리오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것은 간만이었다. 아이디어도 좋고 캐릭터들이 하나하나 살아 있더라. ‘만복’ 캐릭터도 매력적이었다. 기존에 컨셉이 강한 역할이나 시대극을 많이 해와서 평범한 역할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기에 주저 없이 선택했다.
-<걷기왕>을 선택한 데에는 작품 내적으로도 당신을 움직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외적으로는 다양성영화에 대한 도전이라는 이유가 있다면, 내적으로는 만복이처럼 느리게 걷고자 하는 바람의 반영이 있지 않았을까.
=정확히 그거다. 한동안 내 미래와 커리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치열하게 더 잘해야 한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스스로 여유도 없었다. 그때 <걷기왕> 시나리오를 보면서 많은 위로가 됐다. 내가 너무 빨리만 달리려다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구나 하고 깨달았고, 만복이처럼 천천히 물 흘러가듯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발견해나가야지 싶었다. 사실 열심히 살지 않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포기하면 안 되고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강박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고 산다. 그런 생각들이 사람들을 불행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다. <걷기왕>은 이런 막막한 불안을 유쾌하게 풀어내면서, “뛰지 않고 걸어도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 힐링이 됐다. 오늘 영화를 처음 봤는데, 만복이가 어떤 선택을 내리는 장면을 보면서는 울 뻔했다.(웃음)
-아무래도 요즘의 세태는 청년 세대에게 열정과 노력, 극복만 강조하니까.
=어릴 때 주변 어른들이 힘들어도 포기하면 안 된다, 모든 건 네 마음에 달려 있다는 얘기를 많이 해줬다.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꼭 그래야만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힘든 건 힘든 거고, 억지로 극복하려다보면 마음도 더 무거워지고 해결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게 힘들어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심적으로 부담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힘들 때 ‘이겨내야 해!’라는 생각보단 ‘내가 이런 상태구나’라는 걸 받아들이고 천천히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더라. 그럼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기자간담회에서 만복이와 스스로가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히려 당신은 게으르고 태평한 만복보다는 극중 부단히 노력하는 인재 ‘수지’ 타입의 배우가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아역 활동을 했지만 나 역시 여느 십대와 다를 바 없는 소녀였다. 만복이가 경보를 시작하면서 꿈과 미래에 대해 고민했던 지점들은 십대 시절 내 모습과 꼭 닮았다. 감사하게도 잘나가는 배우라고 얘기들 해주시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늘 연기에 대해 고민이 많고 만복이처럼 주저앉고 싶은 순간도 많다. 관객이 기대하는 만큼 많은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꼈고, 한동안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수지와 닮은 면이 있다면, 내 연기에서만큼은 냉정하고 엄격한 모습일 거다. 나는 내 연기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모니터할 때도 뭐 하나라도 걸리면 계속 신경 쓰는 편이라 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다. 때로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좋지 않은 습관이다. 고치려고 노력한다. (웃음)
-<수상한 그녀>의 흥행 이후로 부담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나 영화 <널 기다리며>의 부진이 압박이 됐을 수도 있고.
=스무살 때 찍은 <수상한 그녀>는 정말 감사한 영화다. 예상치 못한 스코어인 865만이라는 숫자가 내게 크게 다가왔다. 결과가 기대 이상이니 그것에 얽매이게 되더라. 많은 사람들이 주목해주고 기대해주니, 내가 즐겨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나를 맞추게 된 거다. 연기도 대중의 취향에 맞춰야 하나 싶고, 판단을 내리기 어렵고 혼란스러웠다. <널 기다리며>는 흥행 성적이 아쉬웠다기보다는 내가 그 캐릭터를 온전히 잘 이해하고 연기한 게 맞는지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자괴감이 컸다.
-2003년 <대장금>에서 아역으로 데뷔해 어느덧 연기 13년차다. 일종의 고비이자 성장점을 맞이했던 모양이다.
=어릴 때와는 달리 초심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오랫동안 하다보니 연기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사라진 게 아닐까. 권태 아닌 권태가 있었구나, 그동안 초심을 잃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목표를 갖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배우로서 커리어를 잘 쌓아야 하고, 항상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에 얽매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더라. 오히려 연기도 잘 나오지 않고, 한동안 슬럼프였다.
-그런데 그 시점에 <걷기왕>을 선택한 행보에선 오히려 느리게 걸어보자는 담대함이 느껴진다. <걷기왕>에서의 만복을 연기한 당신은 여느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
=마침 그 시점에 <걷기왕> 시나리오가 들어온 거다. 슬럼프에 빠진 내게도 많은 위로가 되는 이야기더라. 영화 속 내용처럼, 치열하게 연기를 고민하면서 찍었다기보다는 천천히 산책하듯 스탭들과 소풍가는 기분으로 찍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런 편안한 모습도 관객에게 한번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촬영하면서 ‘아, 내가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웃음) 오늘 영화를 보기 전에는 내가 너무 ‘헐랭’하게 찍은 게 아닌가라는 고민도 잠깐 했지만, 아무렴 어때. 이 영화는 느긋하고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한 미학을 보여주는 영화이고, 이런 연기를 한번쯤 보여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참 편하게, 만족스럽게 찍은 영화다.
-경보 폼이 제법 선수 같다. 경보 연습은 어떻게 했나.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전문 트레이너에게 교육을 받았다. 규칙과 자세를 익히는 데 있어 경보가 만만한 운동이 아니더라. 마냥 걷는 게 아니라 자세가 중요하다. 그냥 볼 때는 골반을 쭉 빼고 걷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곧게 선 자세로 걸어야 한다. 그외에도 무릎을 굽혀선 안 되고, 두발이 함께 떨어지면 안 되는 등 까다로운 규칙이 많다. 한달 정도 배웠는데 트레이너가 재능이 있다고 조금만 더 하면 전국체전에 나가도 될 것 같다더라. (웃음) 하지만 만복이는 경보를 잘하는 캐릭터는 아닌지라 과장된 느낌으로 영화적 재미를 살리는 데 주력했다.
-백승화 감독과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좋았다. 강화도와 파주에서 촬영을 했는데, 스탭들과 소풍가는 기분이었달까. 감독님은 나랑 성향이 비슷한 것 같다. 조용하고 말씀이 별로 없는 편이다.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눈 건 아닌데 통하는 부분이 있어 척하면 척이었다. (웃음) 워낙 자기 색과 의견이 뚜렷하셔서 이해가 쉽기도 했다. 박주희 언니와의 호흡도 좋았다. 나는 워낙 낯을 많이 가리는데, 언니가 먼저 다가와줘서 금방 친해졌다. 서로 취향도 비슷하고 잘 챙겨줘서 실제 수지와 만복이처럼 지냈다. 아까도 언니랑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수다를 떠는데, 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님이 “<걷기왕2> 보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웃음) 실제 현장 분위기가 영화에 잘 녹아난 것 같다.
-이후엔 <특별시민> <궁합> <조작된 도시>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다시 운동화 끈을 조이고 뛴다.
=<조작된 도시>와 <궁합>은 지난해에 찍었고, <특별시민>은 8월 말에 크랭크업했다. <걷기왕>을 찍고 나서 바로 <특별시민> 프리 프로덕션을 준비했는데, <걷기왕>의 효과인지 몰라도 예전보다 부담이 덜하더라. (웃음) 새로운 영화를 시작한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두 영화는 후반작업 중이다. 여전히 내가 연기를 잘했나 하는 고민은 들지만, 그래도 관객에게 선보일 때 마음이 이전보다 한결 수월할 것 같다. <조작된 도시>는 게임 같은 장르영화로, 대인기피증이 있는 해커라는 특이한 배역을 맡았다. <특별시민>에서는 정치 캠프에서 일하는 청년혁신위원장을 맡았고,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 최대한 현실적으로 연기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처음으로 직책을 지닌 인물을 맡았기에 본격적인 성인 연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궁합>에서는 내가 기존에 로맨틱 코미디에서 보여준 발랄하고 명랑한 모습이 아닌 감성적인 멜로 연기를 선보이게 될 것 같다. 이 역할이 나의 본격적인 첫 멜로 연기가 될 것 같으니 기대해달라. (웃음)
-아역 이미지에서 탈피해 성인 연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나.
=<궁합>과 <특별시민>이 본격적으로 성인 연기를 선보이는 첫 작품이 될 것이고, 이런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찾아올 것이다. 아역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는 부담은 딱히 없다. 내 나이에 맞게 살아가는 게 중요하니까. 단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진솔하게 보여드리고 싶다.
-데뷔 13년차인데 아직도 23살, 한창 어린 나이다. 앞으로의 연기 인생이 더 길 텐데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은 있나.
=어떤 특정 캐릭터를 맡고 싶다기보다는 최대한 많은 작품, 많은 캐릭터들과 만나고 싶다. 연기자라면 누구나 그럴 테지만, 아직도 연기에 대한 갈증이 많다. (웃음) 주인공만 맡고 싶은 건 아니다. 작은 역할이라도 내가 끌리는 캐릭터라면 언제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직 한번도 악역 연기를 해본 적이 없는데 뼛속부터 악역인 캐릭터를 한번 해보고 싶다.
-많이 받아온 질문이겠지만, 이 시점에서는 조금 다른 대답이 나올 것 같다.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옛날엔 성실한 배우, 연기를 잘한다고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대답하곤 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는데, 동네에 있는 아는 언니, 누나, 동생 같은 느낌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 싶다. 배우라는 직업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직업이고, 공감을 사야 하는 직업이다. 대단해 보이기보다는 친밀하고 가까워 보여야 한다. 한편으로는 배우로서의 이미지보다 각 작품의 배역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싶다. “심은경이다!”가 아니라 “어, 만복이네!” 하고 떠올려주셨으면 하는 거다. (웃음) 그만큼 영화 속 인물을 자연스럽게 연기해서 그 모습으로 사랑받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