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최민석의 <그을린 사랑> 이야기의 원형
2016-10-26
글 : 최민석 (소설가)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세상은 물리학자에게는 입자의 집합체, 철학자에게는 관념의 집합체, 소설가에게는 이야기의 집합체이다. 때문에 소설가에게 세계는 한명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보탠 다음에 사라지는 무대다. 시간이 지층처럼 쌓이며 어떤 이야기는 잊히고, 어떤 이야기는 회자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회자된 이야기들은 신화의 지위를 획득하고, 결국은 이야기의 원형이 된다.

거창하게 시작해서 미안. 하지만 이 영화를 말할 때 거창하지 않으면, 진지하지 않으면, 폼을 잡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 영화는 이야기의 원형을 다룬다. 신화 중에서도 신화 격인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견하며, ‘그리스 비극’과 혈맹 관계에 있다.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지도, 현란한 화면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슬픔을 쥐어짜지도, 애써 감동을 주입하지도 않는다. 감독인 드니 빌뇌브는 ‘자, 여기 이런 이야기가 있어. 그냥 그렇다고’라는 식으로 관객에게 무심하게 내놓는다. 어찌 보면 무책임할 정도로 과묵하다. 평가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라는 듯.

내 인생의 영화를 꼽으라고 할 때 주저 없이 말하는 영화, 내 평생 최초로 개봉할 당시 영화관에서 보고 바로 다음 날 또 달려가 한번 더 본 영화, 보고 난 뒤 마치 몸살을 앓은 것처럼 실제로 신열이 나고 뭔가에 묶인 것처럼 육신이 쑤셔왔던 영화, 육신은 물론 영혼마저 포박당해 이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은 도저히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게 했던 영화, 이후로 이 감독의 작품은 모조리 찾아보았지만 그 어떤 작품도 이 영화가 선사한 감동에 미치지 못해 오히려 다른 영화를 보면 볼수록 스스로 그 가치를 더욱 획득하는 영화, 아직도 할 수만 있다면 강력한 표절 욕구를 끊임없이 느끼게 하는 그 영화, 그래서 창작자로서 사랑하지만 괴로움을 안겨준 영화, 내 인생의 영화는 바로 <그을린 사랑>(감독 드니 빌뇌브, 2010)이다.

사실 더이상 원고를 쓰고 싶지 않다. 내가 얄팍하게 부려대는 그 어떤 수사도 이 영화의 매력을 온전히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부족한 단어 몇 자 더 보태 이 영화를 한명이라도 더 볼 수 있게 한다면, 수치쯤은 감수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겠다. 인생이 길다면, 세계문학전집과 그리스 비극과 현대 문학과 영화를 모두 접해보시길. 하지만 인생이 짧다고 여긴다면, 그래서 인생을 귀하게 써야 한다고 여긴다면, 일단 <그을린 사랑>부터 보시길. 감히 단언컨대, 이 한편으로 충분하다.

자, 서두에서 했던 말을 이어보자. 우리는 여전히 삶이라는 원고지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하여, 때로 우리의 이야기가 길을 잃으면, 고전의 지위를 획득한 즉, 살아남은 이야기들에 견주어, 지금 몸으로 쓰고 있는 우리 이야기와 얼마나 다른지, 혹은 그릇되었는지, 아니면 매력적인지 점검해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 즉 남은 생을 더욱 아름답게 써나가길 원한다. 이것이 소설가가 이해한 우리네 삶의 방식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을린 사랑>은 삶에서 사랑이 흔들릴 때마다 말해준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조심스레, 소중하게 다뤄야 할 대상이라고. 사랑은 용서와 이해로 완성된다고. 결국, 피가 쏟긴 땅에도 장미는 피어난다는 명제를 <그을린 사랑>은 이야기로써 알려준다.

최민석 소설가. 2010년 단편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창비 신인 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12년 장편소설 <능력자>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고, 장편 <풍의 역사> 등에 이어 최근작으로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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