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에선 한번을 불러주는 일이 없던데 <씨네21>은 책이 나올 때마다 인터뷰하자고 불러주니 고맙다. 은근히 나를 변두리 영화인으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웃음)” 천명관 작가는 어쩐지 자조적으로 들리는 첫인사를 건네왔다.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고래>(2004)로 단박에 문단의 스타가 되었으나 그는 일찍이 영화판을 떠돌다 온 반영화인, 반소설가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 <북경반점>(1999), <이웃집 남자>(2009) 등의 각본과 <고령화가족>(2013)의 원작 소설을 쓴 바 있다. 얼마 전 출간된 천명관 작가의 4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지난 3월7일부터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한 웹소설을 책으로 묶은 작품이다. 20억원의 다이아몬드와 35억원 가치의 종마를 두고 인천 연안파의 양 사장, 전남 영암 조폭 남 회장, 부산을 주름잡고 있는 손 회장과 사기꾼 뜨끈이, 사채업자 겸 에로영화감독인 박 감독, 초짜 건달 울트라 등이 얽히고설키는 대혼란을 그린다.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듯 생생하고 선명한 묘사가 인상적인 소동극이다.
-며칠 전엔 제6회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여러 작가들과 어울렸다. 데이비드 밴과도 만나 대화를 나눴다고.
=참 재밌게 사는 친구더라. 사흘 내내 이태원 클럽에 같이 가서 춤을 췄다. (웃음) 여기저기 거처를 옮기는데 요즘은 뉴질랜드에 살고 있다며 겨울에 놀러오라고 했다.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매일 오전엔 다른 일정을 모두 뒤로하고 꼭 글을 쓴다더라. 나는 주로 빈둥거리고 방황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글을 쓰는데. (웃음) 나에겐 없는 두 가지, 열정과 성실함을 갖춘 작가다. 조금 질투도 나지만 어쩌겠나. 생긴 대로 사는 거지. (웃음)
-쓰고자 할 때 써서 턱 내놓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닌가.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웃음) 그런 건 절대 아니고, 내가 쓰는 이야기들은 이미 15년, 20년 전부터 생각해둔 아이디어들이다. 30대 때 영화 하면서 왕성하게 만들었던 아이템이다.
-새 책 얘길 해보자. 꾸준히 “돈 때문에 벌어지지 않는 이야기엔 관심이 없다”고 말해왔다. 신작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도 20억원짜리 다이아몬드와 35억원 가치의 종마 소유권을 중심에 둔 이야기이고 등장하는 인물은 인천의 뒷골목 조직폭력배들이다. 소재와 인물을 떠올린 계기는.
=다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라고 작가의 말에 썼지만 내 주변 남자들의, 그들이 뒷골목을 떠돌던 때의 이야기다. 엘모어 레너드풍의, 쿨하고 생생한 캐릭터가 활개치는 한국형 범죄소설을 쓰고 싶었다. 재밌는 범죄소설을 쓰려면 장르적 컨벤션을 잘 따라야 하는데 나는 역시 모범생이 아니더라. 자꾸 비틀고 싶고, 장난질 치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장르물도 아니고 순문학도 아니고 영 이상한 이야기가 됐다. 리뷰에 어찌나 비난이 쇄도하던지. (웃음)
-책으로 묶기 전엔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한 웹소설이었다. 플랫폼 특성상 독자들과 실시간 교류가 가능했겠다.
=그래서 순문학 독자와 장르물 독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것 같다. 대체로 로맨스나 판타지물이 많은 플랫폼인데 내가 정색하고 문학을 쓰면 ‘선생님, 여기 와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소리나 들을 것 같아서 나름대로 여러 시도를 해본 건데. (웃음) 신나고 스피디하게, 짧은 대사도 많이 쓰고 장면 전환도 눈앞에 그림으로 그려지도록. 그런데 반응이 영 좋지 않더라. 장르물 독자에겐 실망을 안기고, 순문학 독자들은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웃음)
-소설 속 인물들 얘기를 좀 해보자. 조직폭력배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양 사장, 형근, 울트라 등은 자신의 삶의 비전에 대해 고민하는 개인이다. <고래>나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의 인물들과 비교하면 시대와 환경으로부터 더 자유롭다. 양 사장은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노년의 삶의 안정을 추구하려 하고, 형근은 뜻하지 않게 동성의 연인을 얻게 된다. 울트라는 종마 울트라를 만나 하던 일을 때려치운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유행한 국내 조폭 코미디영화의 유산 같은 인물들이다. 한창 <달마야 놀자>(2001), <두사부일체>(2001) 같은 영화를 보면 조폭이 절도 가고 학교도 가고 그러잖나. 누군가는 조폭 코미디에서 사회적 담론이나 시대의 징후 같은 걸 포착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건 아니지만 나는 그런 영화들이 주는 활기가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행어도 만들어지고 다들 웃으면서 보고. 내 소설에도 지식인들은 안 나온다. 밑바닥 찌끄러기 삶을 사는 사람들의 활기 자체가 무척 소중했다. 그처럼 조폭 코미디로 시작해 이후 남성 서사가 한국영화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 데는,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2002)과 그 주인공 강철중(설경구)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강우석 감독이 자신이 해낸 일에 비해 굉장히 과소평가받았다고 생각한다. 내 소설의 인물들도 그때 그 영화들의 유산이다. 다만 이들에겐 ‘낙오’가 중요한 테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가난하고 못 배우고 나이 많은 남자들을 낙오시키기 시작했다. 88서울올림픽 때 일거에 판자촌을 철거했듯 그런 남자들은 철저한 격리의 대상이 됐다.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 된, 나와 동류이기도 한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국 최종 승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울트라는 순수한 남자다. 소설 속 인물 중 유일하게 아름다움, 감탄, 동경 등의 감정을 여과 없이 느끼며 “건달 세계에도 여파를 미치는 청년실업”으로 인해 앞으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울트라를 굉장히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랑스럽잖나. 쓰는 나도 그렇게까지 순수한 줄은 몰랐는데 듣고 보니 정말 순수하다. 그런 단순무식하고 순수한 캐릭터를 좋아한다. 사실 내 소설 속 인물들이 다들 완전한 악인도, 선인도 아니긴 하지만.
-‘대리기사’는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 실린 단편 <핑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특정 직업군에 대한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의 ‘삼 대리’ 근식, 용관, 응천은 조폭들 싸움에 얽혔다가 본인들의 일상으로 멀쩡히 돌아간 책 속 유일한 인물들이다. 다른 영역에 슬쩍 발을 들이밀었다 신기한 경험을 하고 다시 본래의 직업으로 돌아온 사람들, 영화에 처음 뜻을 두었으나 소설로 이름을 날리고 다시 영화의 꿈을 꾸고 있는 작가 본인의 삶과도 겹쳐 보이는데.
=그렇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는 나처럼? (웃음) 영화의 꿈을 접고 소설가로 남은 생을 잘 꾸려봐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래도 한번만 더 해볼까’ 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잖나. 삼 대리는 소설의 에필로그를 장식한 중요 인물들이지만 사실 ‘개저씨’다. (웃음) 그들의 대화나 정서 모두가 시대착오적이고 촌스럽다. 하지만 이들 역시 내가 잘 아는, 분명 내게 친숙한 사람들이다. 다시 조폭 코미디로 돌아가면, 그 정서를 떠받치고 있는 건 내 또래 옛 세대 남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남성적 로망이다. 우리 땐 반에서 1등 하는 애보다 주먹 제일 잘 쓰는 애를 더 부러워했다. 건달, 일진을 향한 선망이었다. 그런 선망은 ‘무리’에서 생겨나는 감각이다. 요즘의 아이들은 무리지어 놀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요즘은 건달, 일진은 일종의 루저다. 그러니 ‘형님’에 대한 선망도 없을 수밖에. 이것 참, 말하다보니 여러가지로 나는 시대로부터 멀어져가는 사람인가 싶다.(웃음)
-듣다 보니 후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설처럼 무용담이 전해내려오지만 정작 그들의 실질적 관심에선 멀어져 있는 중년 보스 ‘양 사장’이 떠오른다.
=아이러니하다. 자기 시대가 저물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잠옷 바람으로 외로이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 아파트 단지를 헤매는 슬픈 중년이라니. (웃음)
-앞일을 예측 못한 채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면에서 이 책의 무드와 구성은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와도 비슷하다.
=실시간 연재를 했던 작품이라 쓰면서도 나조차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소설인 만큼 인물별로 각 장을 구분해 옴니버스처럼 써도 됐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계속 얽혀들다 하나로 합쳐지고 폭발하는 구성은 결국 쿠엔틴 타란티노류의, 영화의 플롯 구성을 닮았다. 말하자면 <엑조티카>(1994) 같은 시도를 해본 거다.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뜻인가.
=기회가 되면 시나리오로 고쳐 직접 연출할 생각도 있다. 원래 <코리안 갱스터>라는 작품을 연출할 생각으로 한 3년쯤 손대고 있었는데 결국 엎어졌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동두천 기지촌 건달 얘기다보니 현실적으로 진행이 어렵더라.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김언수 작가가 <뜨거운 피>의 영화화를 맡아달라고 해서 지금 <뜨거운 피>를 먼저 연출할 계획을 갖고 있다.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고 며칠 전 부산에 헌팅도 다녀왔다. 내년쯤 촬영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본인의 소설로 연출하지 않나.
=처음 <뜨거운 피>의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내가 가진 이야기가 많은데 굳이 남의 소설로 영화를 할 이유가 있을까 고민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20년이 넘게 충무로를 떠돌아도 결국 오리지널 시나리오만 영화가 되고, 정작 감독으로서 뭔가 해내지 못하고 있는 데엔 내 글에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지겹게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계속 가위를 내서 지기만 하는 기분이다. 그러니 이젠 주먹을 내밀어볼까 하는 거지.
-<뜨거운 피>도 40대 건달의 끈덕진 이야기잖나.
=내가 그런 영화를 좋아하니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나 브라이언 드 팔마, 마틴 스코시즈는 언제나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세련되고 멋지게 묘사하는 범죄자들, 깡패들 영화를 좋아했고 나도 그런 걸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멋지기만 한 게 아니다. 깡패들이 먹고살기 위해 구체적으로 애쓰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도 좋아한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도 아주 촘촘하고 구체적으로 생계 고민을 하잖나. <뜨거운 피>도 그렇다. 모텔에서 빨랫감을 수거해서 어느 공장으로 보내고 어떻게 돌리고, 거기다 양주를 어떤 경로로 납입하고 그런 일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실존의 생생한 묘사다.
-<뜨거운 피>라는 제목은 그대로 가나.
=나는 원래 내 소설의 영화화 계약을 할 때 꼭 제목을 바꾸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는다. 편의상 제목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원작자로서 슬프거든. 소설가로서의 의리다.
-먼저 영화화 판권이 팔린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의 영화화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곽경택 감독이 손보고 있었지만 다시 방황 중이다. 모 감독이 지금 맡고 있긴 한데 아직 공개할 만한 단계는 아니다.
-<뜨거운 피>의 연출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늦깎이 감독 데뷔작이 되겠다. 계획대로 내년엔 감독으로 만나고 싶다.
=<뜨거운 피>가 잘되면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코리안 갱스터>도 꼭 영화화를 하고 싶다. 인천, 부산, 동두천을 아우르는 건달 3부작이라고 해두자. (웃음) 비탈리 카네프스키가 53살에 데뷔할 때 영화역사상 최고령 신인감독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내가 내년이면 52살인데 어쩌면 그 타이틀을 내가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웃음) 아, 영화는 언제나 나를 슬프게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