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페스티벌 액터’를 선정하자면 단연 구교환의 이름을 거론해야 한다. 지난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김수현 감독의 <우리 손자 베스트>에서는 구교환의 ‘일베’ 캐릭터 연기가 화제를 모았다. 위력은 몇 개월 후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꿈의 제인>의 트랜스젠더 제인 역할을 통해 고스란히 입증됐다. 페스티벌 기간 중 만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구교환 봤어?”를 인사처럼 건네왔다. 전무후무한 트랜스젠더 캐릭터의 구축에 대해 부산국제영화제는 그에게 올해의 배우상으로 화답했다. 그간 배우 구교환이 거친 행보의 조각들을 모아 이제는 ‘거대해진’ 배우 구교환의 매력을 탐구해보았다.
<꿈의 제인>이 촬영, 편집을 거치는 지난 몇 개월간 익히 소문은 들어왔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다. 진한 메이크업, 몸에 딱 붙는 타이트한 스커트 차림을 한 구교환은 영락없는 트랜스젠더였다. 구교환은 가출팸의 아이들을 따뜻한 심성으로 돌보는 가장 제인을 연기한다. 하지만 성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끌어안고 애정하는 남자에게 얻지 못한 사랑 때문에 자기 속은 썩어들어가 자살을 감행하는 트랜스젠더이기도 하다. 제인을 통해 구교환은 배우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공고히 구축해냈다. “한 인물을 이렇게 오래 붙들고 있었던 건 처음이다.” 준비기간까지 포함해 근 6개월, 구교환은 제인을 ‘입고’ 살았다. 섭식장애인 제인의 외형을 만들기 위해 10kg를 빼 53kg까지 감량했다. 식사량이 너무 적어 힘쓰기가 어려웠던 탓에 현장은 구교환의 상태에 따라 긴장을 더 해야 했다. “너무 일찍부터 살을 뺐다. 촬영이 지연돼 원망도 많이 했는데(웃음), 감독님이 영양제도 챙겨주시고, 다른 배우들의 체중감량법을 많이 참고해 나중엔 익숙해지더라.”
구교환이 <꿈의 제인>에 합류한 것은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소비하는 대신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조현훈 감독의 연출의도에 대한 믿음이 컸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진심이 느껴지더라. 이 역할은 반드시 잘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용솟음쳤다.” 촬영 첫날 제인의 메이크업과 복장 그대로 회식 자리에 가 제인처럼 있었다는 구교환은 촬영이 끝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제인이 그립다”고 말한다. 그의 이런 절실함이 관객의 호응과 수상으로 이어졌다. “배우는 누구나 작품이 공개 되었을 때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기대하지만 연기로 상을 받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참에 지금까지의 작품들을 좀 돌아보자고 하자 그는 이내 손사래부터 친다. “저야 뭐, 아직 뭘 한 게 없어서… 학교 다닐 때도 감독들이 모두 졸업작품에 출연시키려고 매달리는, 소위 말하는 ‘에이스’는 아니었다”며 민망한 기분을 드러낸다. 주변인들에게 귀동냥한 결과, 그는 항상 자신의 실력을 평가절하하고 낮추어 말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최근 여러 독립영화 화제작들에는 항상 구교환의 이름이 함께 거론되어왔다는 점이다. 재능과 실력은 남들이 저절로 알아보는 법이다.
불안해 보이지만 단단한 연기
윤성현 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 포트폴리오 작품으로 화제를 모은 단편 <아이들>(2008)에서 그는 왕따 소년 진욱의 섬세한 내면을 표현해 배우 구교환의 존재를 처음 알렸다. 윤성현 감독과는 서울예대 영화과 선후배 사이로, 방학 때 함께 영화스튜디오 안에 세트를 지어 연극 공연을 하는 필름액터스스쿨을 함께하며 감독과 연출자로 작품의 인연을 시작했다. 뒤이어 그는 조성희 감독의 데뷔작 <남매의 집>(2009)에서 어린 남매가 사는 집에 침입해 위협을 가하는 괴한 ‘라오우’로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사뭇 경어체를 쓰며 공포를 조성하는 구교환의 오싹한 연기는 이 영화가 전하려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려주는 요소다. 그리고 독립영화계 화제작으로 떠오른 이옥섭 감독의 단편 <4학년 보경이>(2014)에서 구교환은 자신에게 마음이 떠난 오랜 연인과의 관계에 애를 먹는 남자친구 덕우로 분해 톡톡 튀는 영화만큼 독특한 연기를 선보인다.
<꿈의 제인>에서의 연기 호평을 이어줄 <우리 손자 베스트>(12월 개봉예정)를 통해 배우 구교환의 역량은 한층 더 공고해진다. 집을 나와 고시촌을 전전하는 ‘키보드 워리어’ 교환. 댓글 공격과 야동을 유포하고, 박카스 할머니와 섹스를 하며, ‘애국노인’(명계남)과 우정을 쌓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구교환은 길을 잃지 않고 청년 교환의 내면을 잘 조율해낸다. 사회병리적인 캐릭터인 교환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구교환은 이 영화의 정서를 형성해내는 인물이다. “제인이나 교환이나 둘 다 실체가 없는 인물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생각해보면 내가 그런 인물들에 궁금증이 많은 것 같다. 제인이 준비를 많이 해서 구축한 캐릭터라면, 교환은 오히려 많이 걷어내고 각 장면에 충실하려 했다. 단순하려고 노력하면서 대사를 자유롭게 내뱉었던 것 같다.” 캐릭터의 대사를 구교환만의 언어로 변화시키는 공로를 인정해 김수현 감독은 <우리 손자 베스트>의 각색 타이틀에 구교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공동 각색자로 올렸다.
각 작품에서 구교환의 특징은 매번 명확하게 감지된다. 그는 등장과 퇴장이 전형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배우다. 그 불안정한 등장에도 신기하게도 이 배우는 제대로 궤도를 찾아가 구교환의 스타일을 마침내 완성해낸다. <꿈의 제인>을 연출한 조현훈 감독은 <남매의 집>의 침입자를 통해 구교환이 보여준 연기를 보고, 거기서 전혀 다른 캐릭터지만 제인의 가능성을 유추해냈다고 말한다. “특유의 불안하고 예민한 습성, 하지만 그 안에서 단단한 심지가 보이는 연기야말로 배우 구교환의 특징이다.” <남매의 집>을 거쳐 <늑대소년>(2012)을 함께한 조성희 감독은 이런 그를 두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어떤 말을 뱉든지 구교환이 하면 평범하지 않다. 목소리에서 스타일까지, 연기 전체가 모든 상황을 살려주는 배우”라고 평한다. 구교환이 <꿈의 제인>에서 제인의 캐릭터를 구축한 과정을 따라가보면 얼마간 구교환 연기의 매커니즘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제인을 두고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딱히 레퍼런스가 없었다. 이미 관객에게 익숙한 인물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꾸미면 오히려 가짜 같은 인물이 될 것 같아서, 굳이 이야기하자면 내 모습을 반영했다. (웃음)”
그 ‘모습’에는 본인은 쇳소리 같다고 말하는, (그리고 매 작품에서 익히 들어온)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것 같은 구교환의 얇은 목소리도, 능수능란하거나 매끄럽지 않은 말투도 모두 포함되어 있다. “감독님한테 ‘저 목소리 그냥 안 꾸미려고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오케이하더라.” 구교환의 전작을 본 이들에게는 익숙한, 그 하이톤의 음색에 이번에는 제인의 코믹함과 슬픔과 애환이 제대로 묻어난 결과다. “멋있는 목소리에 대한 갈망, 그것을 포기한 거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구교환은 연기자로서 자신의 톤을 받아들이기까지 스스로를 향한 걸림돌이 있었다고 말한다. “어릴 때 목소리 때문에 놀림도 많이 당했다.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내라는 ‘하드웨어’를 잘 모르니 의아해하기도 했다.” 연기입시학원을 거쳐 서울예대에 입학하고 연기를 시작했는데 대학 때는 그 스트레스에 ‘남들처럼’ 평범한 목소리를 시도해서 연기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한계에 부딪히더라. 내 표현이 축소되고 뭔가 뿜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곧장 포기하고, ‘나는 이 목소리를 받아들이자. 나대로 하자’ 해서 지금 이 지경이 된 것 같은데(웃음). 지금은 만족하는 단계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냥 이렇게 연기하는 게 구교환이라는 배우에게 맞 모습인 것 같다.”
흥미로운 작업을 찾아가는 사람
현재의 구교환은 배우 구교환의 커리어를 어떻게 매니지먼트하고 있을까(그는 소속사 없이 혼자 활동한다). <꿈의 제인>을 공개한 후 캐스팅 제안이 많아지지 않았나, 라는 질문에 구교환은 “아직은”이라고 답변한다. 그보다 그는 지금 <4학년 보경이>의 연출자이자 여자친구 그리고 현재 자신의 작품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옥섭 감독과 함께 공동 연출하는 신작 시나리오 작업에 한창 열 올리는 중이다. “우리끼리는 <앙팡 테리블>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젊은 여성이 돈을 벌어야 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범죄 장르의 성격도 있고, 무겁고 밝고 경쾌하다. 입이 근질근질한데 아직 말하긴 시기상조다. 지금 3고째 쓰고 있는데 완성되면 대중영화가 될 것 같다.” 덕분에 매일 밤 시나리오 작업으로 망원동 집에서 두문불출 중. 그래서 연기는 당분간 보류 상태가 될 위기다.
항상 그에게서 상업적인 스타성을 발견해왔는데, 구교환 자신이 늘 그 영역에서 발뺌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왔다. <남매의 집>에서의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직후 그가 충무로의 캐스팅 콜을 거절한 것이 떠올라 조성희 감독에게 당시의 정황을 물었다. “남들처럼 작전을 잘 세우는 사람이었다면 벌써 스타가 됐을 텐데, 늘 그는 예상을 비껴나 흥미로운 작업을 찾아가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의 행보는 늘 관찰대상이다. 내면에 분명한 자기 세계가 있는, 두 가지 역할을 다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구교환이 말하는 이유는 이렇다. “요청은 더러 있었는데 안 한다고 했다. 타입 캐스팅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제인을 하고 평가를 받는다고 또다시 제인을 할 이유는 없을 거다. 나에게는 그냥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의 문제인데 직업적인 배우로 볼 때는 좀 이상한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얼마간은 진지하게 나는 직업배우가 될 수 없나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물론 구교환은 지금의 자신을 한마디로 규정하지 않는다. "사람 마음은 항상 바뀌는 거고, 어떤 신념들도 바뀔 수 있다. 다만 좋은 방향으로 바뀌면 좋겠다.” 2016년의 구교환은 그래서 배우가 되려면 어떤 매력이 있고 어떤 것을 개발해야 하는지 고민도 함께 해나가려고 한다. “배우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이미 작품으로 오디션을 보는 상태다. 나도 궁금하다. 내가 어떤 형태의 배우가 될지. 관객도, 감독님들도 피드백을 많이 해주면 좋겠다.” 그가 <앙팡 테리블> 프로젝트를 작업하는 사이, 당분간 <꿈의 제인>과 <우리 손자 베스트>만으로도 배우 구교환의 세계를 풍성하게 만나는 기회일 것이다.
구교환, 나는 감독이다!
조성희 감독은 구교환을 “연기, 연출 둘 중 섣불리 뭘 하라고 조언하기 힘든, 두 역할을 다 해야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구교환은 학생기록부에 항상, 앞에 나서서 남을 웃기는 사람이라고 써 있던 학창 시절. 막연히 배우건 탤런트건 개그맨이 되고 싶어, 연기입시학원을 거쳐 배우가 되겠다고 서울예대에 입학했지만 “연기과가 아닌 영화과라 영화의 전 과정에 참여했고, 다행히 연출까지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어릴때부터 <프리미어> <스크린> <씨네21> 같은 영화잡지를 끼고 다녔다는 그는, 연출가로도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다.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2013)는 출연작이 수두룩한데도 자신이 출연한 DVD를 한 번도 받지 못한 배우 고기환(구교환)이 DVD를 받기 위해 감독들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로, 독립영화 배급유통 시스템을 웃프게 비판한다. 이옥섭 감독과 공동연출한 <연애다큐>(2014)는 20대의 독립영화 감독 구교환이 여자친구 이하나와 함께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에 출품할 셀프연애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연애와 일 모두에서 고전을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연출가 구교환이 취하는 소재는 이렇게 그때그때 바로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