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액터/액트리스] 완벽한 건 지루해 -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 티나 페이
2016-11-15
글 : 조민준 (한겨레 esc 기자)

영화에서 티나 페이가 안경을 벗는 순간에는 늘 드라마틱한 변화가 뒤따랐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하이틴 코미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클라이맥스는 교내 여학생들의 퀸이자 공공의 적인 레지나(레이첼 맥애덤스)의 뒷담화 노트가 공개되는 사건이었다. 학교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 그때, 수학 교사 노버리(티나 페이)는 체육관에 소집한 여학생들에게 안경을 벗고 열변을 토하며 사태 수습을 주도한다. “걸레니 창녀니 이게 다 뭐죠? 그건 남자들이나 쓰는 말이에요.” <브로큰 데이트>에서 모처럼 안경 벗고 남편과의 데이트를 즐기려 했던 주부 클레어(티나 페이)는 그날 밤 히치콕식의 오인 플롯에 휘말려 권력형 범죄의 타깃이 된다. <베이비 마마>에서 37살에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한 케이트(티나 페이)는 아기를 갖고 싶어 하지만 불임 판정을 받고 대리모를 구한다. 직장에서 늘 안경을 썼던 그녀는 엄마 되기를 준비하면서 맨 얼굴을 드러낸다.

물론 티나 페이가 시종일관 안경을 쓰지 않고 연기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또한 그녀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이하 <SNL>)에서의 메인 작가 체험을 바탕으로 만든 TV시리즈 <30록> 출연 당시 차림새는 대체로 일관되지 않았다. 극중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이며 동료인 제나(제인 크라코스키)는 “쟤는 안경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쓰고 있어”라며 비꼬기도 했다. 실제로도 방송에 직접 출연하여 큐카드를 읽어야 할 때를 제외하면 안경을 착용하지 않는다는 티나 페이는 “그냥 안경 쓰면 똑똑해 보이니까”라고 고백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방송작가이자 코미디언, 방송 제작자이자 영화 프로듀서, 거기에 성우와 영화배우까지 다채로운 역할을 오가는 그녀가 안경이라는 소품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구별되게 활용해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티나 페이’ 항목에 따르면, 그녀의 코미디 스타일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자신은 웃지 않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는 무표정 유머. 두 번째는 비꼬기와 아이러니로 무장한 독설. 세 번째는 스스로를 웃음의 소재로 쓰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자기비하 코미디다. 여기서 비꼬는 독설과 자기비하의 유머는 상충된다.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태도 덕분에 그녀의 촌철살인 유머가 공감을 얻은 바도 크겠으나, 돌이켜보면 티나 페이의 극중 이미지들은 이처럼 상충되는 양면성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30록>부터 최근작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분야에서 기량과 전문성을 인정받은 캐릭터를 도맡아 연기했다. 하지만 사생활에서는 대체로 정크 푸드를 즐겨 먹거나, 연애가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가족을 꾸리려는 시도에서 번번이 실패를 겪는 인물들이었다. 안경은 주로 공적 영역의 자아와 연관이 있는 소품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직장에서는 보스이나 사생활에서는 낙제점이라는 단골 캐릭터의 양면적 이미지는, 독설과 자기비하가 공존하는 티나 페이의 코미디 스타일과 대구를 이룬다.

양면성의 근원은 그녀의 개인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외모에 있어서 안경과 더불어 티나 페이를 대표하는 트레이드마크는 왼쪽 입가의 흉터다. 그녀의 자서전 <보시팬츠>에 따르면 이 상처는 다섯살 때 낯선 사람의 이유 없는 공격을 받아 생겼다고 한다. 고통과 공포에 잠겨 있는 대신, 그녀는 이무렵 아버지가 보여준 몬티 파이턴과 막스 브러더스, 멜 브룩스의 영화와 <SNL>을 통해 코미디에 눈을 떴고, 머지않아 코미디언은 그녀의 장래희망이 되었다.

티나 페이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 그녀는 자신의 실제 고교 시절 경험을 상당부분 녹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중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은 여학생들의 알력과 거리를 둔 채 그들을 비꼬는 재니스(리지 캐플란)라고 밝힌 한편, 그럼에도 학교에 떠도는 소문과 사건, 사고는 모두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도 했다는 고백. <스타워즈>를 사랑하는 너드 여학생이면서도 극단, 합창단, 테니스부, 학보사 편집자 역할까지 왕성하게 소화해냈다는 그녀의 이력은 오늘날 팔방미인 활약상의 예행연습과도 같았다.

버지니아 대학에서 극작과 연기를 전공한 후 티나 페이는 <SNL> 스타들의 산실인 시카고 코미디 그룹 ‘세컨드 시티’에 입단했다. 이곳에서 일생의 단짝이자 파트너가 될 에이미 폴러를 만나 함께 즉흥연기 수업을 받을 때만 해도 그녀는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일 홀로 방 안에 갇혀 있어야 하니까. 나는 스타가 되고 싶었다.” 말과 달리 티나 페이는 <SNL> 작가로 코미디 커리어를 시작했고, 불과 2년 만에 프로그램 최초의 여성 메인 작가라는 타이틀을 꿰찼다. 이후 출연자와 작가 역할을 넘나들며 펼쳐낸 그녀의 활약은 “90년대 말의 혼수상태로부터 <SNL>을 깨웠다”는 극찬에 걸맞은 전설적인 행보였다. 요컨대 티나 페이의 성장기와 성공과정에는 이력서에 드러나지 않는 상처와 이면, 야심의 양면성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당하고 성공적인 커리어우먼, 반면에 사생활에서는 결핍을 느끼는 티나 페이의 양면적 캐릭터들은 여성주의 평단으로부터 비판을 사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종군기자를 연기한 신작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 관련 인터뷰에서 “주인공이 ‘그래도 나는 아기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대목이 없어서 좋았다”며 과거 출연작 <베이비 마마>를 비꼰 듯한 발언을 한 것을 보면 본인도 그러한 비판에 일정 부분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티나 페이의 캐릭터들이 여성에게 부과된 사회적 관습에 따르지 않아도, 일과 삶 모두에서 완벽한 슈퍼우먼이 되지 않아도 그것으로 좋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그녀도 말한다. “완벽해지는 건 불가능하다. 완벽이란 말은 과대평가되어 있다. 완벽하다는 건 지루하다는 얘기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여성 방송인이자 영화인으로서 티나 페이가 각본 또는 제작에 참여한 작품들이 여성을 다루어온 진일보한 태도다. TV시리즈 사상 최고의 피날레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30록>의 마지막회는 전업주부가 된 주인공 리즈(티나 페이)가 작가로 복귀하는 대신 남편 크리스(제임스 마스든)가 육아와 가사를 전담한다는 행복한 합의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는 여학생 집단의 암투를 빌려 여성들간의 혐오와 타자화에 대한 경고를 담았다. 한국인 여성 캐릭터 혜원(그레타 리)이 작지만 핵심적인 배역으로 등장하는 코미디 <시스터즈>에서는 인종차별적 농담의 손쉬운 유혹에 빠지지 않은 채 동양인 여성을 줄곧 동등한 연대의 대상으로 그렸다. 신작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에도 여성에 대한 제국주의적 편견을 경계하는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나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남자와 관련된 여자 이야기가 아니라 여자들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아무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러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낼 적임자로 존 벨루시, 에디 머피와 함께 <SNL> 역사상 가장 중요한 스타로 꼽힌 티나 페이 이상의 인물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 그녀의 야심은 모처럼 각본가로 돌아와 내년 초 세 번째 시즌 공개를 앞두고 있는 TV시리즈 <언브레이커블 키미 슈미트>를 통해 착실히 진행 중이다.

<시스터즈>

티나 페이식 농담의 향연

<시스터즈>에서 티나 페이(왼쪽)는 내내 안경을 벗고 연기했다. 따라서 그녀의 전매특허 캐릭터인 자신만만한 직장 보스의 이미지는 이 영화에 없다. 10대 딸을 둔 엄마임에도 무책임하게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일쑤, 어떻게든 노부모에게 빌붙어보려는 루저 역할을 흔치 않게 연기했다. 명콤비 파트너인 에이미 폴러와는 세 번째로 함께 연기한 영화이며, 무대에서의 호흡만큼 죽이 척척 맞는 호들갑 자매 역할의 시너지를 과시했다. 중년 사내들이 일탈을 통해 노화를 재인식하는 식의 전개는 낯설지 않은 서사다. 티나 페이의 첫 제작 영화인 <시스터즈>는 중년 여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리하여 페이와 폴러 콤비에게 기대할 수 있는 시니컬한 농담의 향연과 함께, 그간 숨겨왔던 슬랩스틱 본능까지 하룻밤의 파티를 통해 유감없이 분출한다. 20대처럼 마음 놓고 망가질 수 없다는 씁쓸함은 파티 내내 상기되고, 나이는 먹었으나 여전히 미성숙한 자녀들을 둔 베이비부머 세대의 고충까지 영화는 사려 깊게 담아낸다.

영화 2016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 2015 <시스터즈> 2014 <머펫 대소동2> 2014 <당신 없는 일주일> 2013 <어드미션> 2012 <마미 앤 미> 2010 <브로큰 데이트> 2009 <그곳에선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008 <베이비 마마> 2006 <맨 오브 더 이어> 2004 <퀸카로 살아남는 법> TV 2012 <30록 시즌7> 2012 <30록 시즌6> 2010 <30록 시즌5> 2009 <30록 시즌4> 2008 <30록 시즌3> 2007 <30록 시즌2> 2006 <30록 시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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