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영화계 내 성폭력 사태 두 번째 대담 - 이미연·홍지영·부지영·박현진 감독
2016-11-16
글 : 이예지
사진 : 오계옥

여성 영화인들의 목소리는 이어진다. 트위터에서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수많은 문제들이 수면 위로 불거지면서 <씨네21>은 지난 1079호에서 최전방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고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젊은 여성 영화인들의 대담을 게재했다. 이번호에서는 여성 영화인 후속 대담으로 여성감독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버스, 정류장>(2001)을 연출했으며 여성영화인모임의 이사이자 한국영화감독조합 감사로 있는 이미연 감독부터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홍지영 감독, <카트>(2014)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8)의 메가폰을 잡은 부지영 감독, <좋아해줘>(2015)와 <6년째 연애중>(2007)을 연출한 박현진 감독까지 꾸준히 여성의 이슈에 관심을 기울여온 4명의 감독들이다. 여성감독으로서 현 사태에 대한 그들의 소회는 각별했다. 여성이자 감독으로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자이자 현장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리더로서 현 사태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경험, 앞으로의 대처 방안까지 심도 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부지영

영화 <카트>(2014)를 비롯해 <나나나: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2011), <니마>(2011), <애정만세>(2011)의 한 에피소드인 <산정호수의 맛> 등을 연출했으며,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8)로 데뷔했다. 사회 주변부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트리트먼트를 쓰고 있다.

박현진

영화 <좋아해줘>(2015)를 연출했으며, <6년째 연애중>(2007)으로 데뷔했다. 웹드라마 <출중한 여자>(2014)와 <출출한 여자>(2013)를 연출했다. 남성과 여성이 성 반전된 장르영화와 성희롱과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사적 복수를 하는 내용의 웹드라마를 기획 중이다.

이미연

현 여성영화인모임의 이사이자 한국영화감독조합 감사. 영화 <버스, 정류장>(2001)과 <세번째 시선>(2006)의 한 에피소드인 <당신과 나 사이>를 연출했으며 <반칙왕>(2000)과 <조용한 가족>(1998)의 프로듀서로도 일했다. 현재 가수 이난영의 전기영화 캐스팅 중이다.

홍지영

12월에 개봉하는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비롯해 <결혼전야>(2013), <가족시네마>의 한 에피소드인 <별 모양의 얼룩>(2012) 등을 연출했다. <키친>(2009)으로 데뷔했으며,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를 각색했다.

-이번에 터져나온 영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사례들과 <씨네21> 1079호 특집 기사 ‘#영화계_내_성폭력’을 봤나. 이런 사태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미연_ <씨네21> 1079호 특집 기사를 다 읽고 왔다. 드러난 일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프로젝트별로 돌아가고, 2~3개월 단위로 짧게 계약하는 영화현장의 특수성 때문에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넘어가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최근에 한국영화감독조합 분쟁사례로 들어온 건이 있다. 남자감독과 여성작가 사이의 계약 문제였는데, 감독은 유명한 감독이고 작가는 아직 데뷔하지 않은 작가였다. 처음엔 계약서도 제대로 쓰지 않고 계약금도 미지급한 사태로 파악했는데 알고 보니 성추행이 개입해 있더라. 분기탱천해 공론화하려 했더니 그 감독이 발 빠르게 사과했고,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투자사가 바로 나서 작가와 빨리 계약을 해 사건을 무마해버렸다. 오랫동안 이와 비슷한 많은 사건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무마되어왔다. 성추행으로 유명하지만 영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기혼 남성 제작자도 있지 않나. 한때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사건이 크게 불거지면서 한국영화제작가협회에서 제명됐고, 본인의 제작사를 폐업 신고하면서 영화계 내에서 퇴출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그는 남성 영화인들과의 친분을 내세워 여전히 영화를 제작하고, 최근엔 중국과 공동 제작도 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손쉽게 덮여버린다는 거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모욕감과 상처를 온전히 극복할 때까지 오랜 시간 진정성 있게 사과해야 하고,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

=박현진_ 문단에서부터 시작해 영화계 내 성폭행이 화제가 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요즘 스탭들 사이에서도 이슈다. 사례들을 보니 너무 끔찍한데, 가해자들의 레퍼토리는 하나같이 비슷하고 창의력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방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속옷만 입고 있었다거나 뒤에서 껴안았다는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많이들 들리는 얘기다. 예전에 연출부를 하다가 감독에게 강간당할 뻔한 친구도 있었는데, 그 감독이 그 일을 무덤까지 가져가라고 협박했다. 다른 연출부를 한 친구는 감독에게 “낙태는 해봤냐. 다양한 경험이 있어야 영화를 잘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밝혔다. 감독뿐 아니다. 한 메인 스탭이 연출부 여성 스탭에게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냐. 거미줄 치겠다”라고 한 적도 있다더라.

=홍지영_ 성추행의 언어는 어디나 다 비슷한 것 같다. 나는 운 좋게 한 작품만 연출부를 하고 데뷔해 직접 보고 겪은 경험은 많지 않은데, 그 한 작품에서도 한 스탭에게 언어폭력을 겪었다. 항의를 했으나 사과는 결국 받지 못했다. 지금은 내가 감독이 됐지만 가해자들은 감독을 대하는 얼굴과 동료 혹은 후배 스탭들을 대하는 얼굴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를 다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부지영_ 사례들을 보면서 15년도 더 된 과거에 연출부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나더라. 현장 경험이 없던 시기에 한 영화의 스탭을 하고 싶어서 면접을 봤다. 전문성을 확인하는 질문들은 없고 일상적인 이야기들만 물어봐서 떨어졌겠거니 했는데, 붙은 거다. 의아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누가 “왜 얘가 됐냐”고 묻자 감독님이 “웃을 때 이가 보여서”라고 하더라. 당시엔 웃으면서 넘겼지만, 여성 연출부를 그저 웃어주는 존재로 보는 태도에 기분이 무척 나빴다. 술자리에서도 여성들이 마치 감독의 시녀처럼 느껴졌다. 섬뜩한 건 자기 영화가 그의 면죄부라는 거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담긴 영화를 보고 함께 웃으며 면죄부를 받고, 심지어 자신을 연민하기까지 한다.

박현진_ 그 감독님은 술자리에서 옷 벗기 게임이며 뽀뽀 게임을 수시로 하는 분 아닌가. 예전에 지인이 그 술자리에서 나이 지긋한 한 제작사 대표와 뽀뽀를 해야 했는데, 혀가 들어왔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었다. 이외에도 예술계의 자유분방함이라는 명목하에 선을 넘는 폭력들이 많다. 예술 운운하면서 성적 농담을 하는 게 쿨한 것이고, 오픈되어 있는걸 당연한 것처럼 보는 분위기다. 그래서 다 같이 즐겁다면 상관없겠지만 그 관계엔 대부분 권력의 낙차가 분명히 존재한다. 정말 좋아서 웃어주는 게 아니다. 영화가 예술인 것과는 별개로 다 함께 노동해 만드는 것인 만큼 일터에선 ‘일터의 윤리’가 있어야만 한다.

부지영_ 초년생 때는 술자리에서 성적 농담이나 스킨십이 있을 때 예민하게 굴거나 경직되면 애송이 취급 받을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 마음을 나쁘게 이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창작하는 사람들이 사회 부조리에 대해 더 민감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이런 분야에서 더 권력을 이용한 폭력들이 벌어진다는 것이 화가 난다.

박현진_ 왜 이런 사태들이 공론화가 안 되고 반복되는지 많이 고민했다. 영화가 한시적인 프로젝트성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예술이라는 명목 하에 권력을 갖고 온갖 분탕질을 쳐도 떠받들어주기 때문 아닐까. 이를테면 한 감독이 여성 스탭의 몸에 손을 댔을 때 그 자리에 있는 여성 스탭들은 다 봤는데 남자 스탭들은 다들 못 본 척하더라. 암묵적인 묵인이있다.

힘 있는 감독과 메인 스탭들이 나서야

-영화계 내의 전반적인 의식 환기가 필요하다. 영화계 내 감독이라는 위치에서 이 문제는 더욱 무겁게 다가올 것 같다. 이미연 감독이 감사로 있는 한국영화감독조합과 이사로 있는 여성영화인모임에서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들었다.

이미연_ 현재 감독조합에서는 성명서(19쪽 ‘포커스’ 기사 참조)를 준비 중이다. 작금의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사실관계 확인 후 사실로 밝혀지면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고 예방과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서다. 남성감독들이 많이 연루된만큼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대응할 생각이다.

부지영_ 창작하는 사람들, 특히 감독들은 자신의 시선으로 현실을 작품에 투사하기 때문에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의식적인 자각이 필수다. 우리의 방관과 무관심이 이런 사례들을 만들 수도 있다. 앞으론 남성감독들이 사소하게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들도 지적하려 한다.

박현진_ 동의한다.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유리되면 안 된다. 서로 공론화해서 자극을 주는 게 중요하다. 남성들은 이게 문제인지조차 잘 모른다.

이미연_ 최근 여성혐오 문제가 불거지고 여성들의 의식이 진일보하는 속도가 빨라지는데 비해 남성들은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게 안타깝다. 인식 수준의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부지영_ 영화 <걷기왕>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자청해서 한 것을 보고 감동받았고, 여성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도 다음 작품부터는 워크숍 때 진행할 거다.

홍지영_ 내 차기작에서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남편인 민규동 감독도 당장 차기작부터 할 것 같다.

박현진_ 프로덕션을 준비할 때 그토록 많은 걸 준비하는데, 왜 일터에서의 사람들의 인권을 지키려는 마지노선을 한번도 공유하지 않았던 걸까 의구심도 든다.

이미연_ 예방교육도 중요하지만 반드시 제도화해 가해자에 대한 경고와 페널티가 있는 처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가해자가 대충 사건을 무마하고 다른 작품에 돌아와 다시 피해자가 생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여성영화인모임에서는 내년도 사업으로 민우회 등 외부 여성단체와 협력해 영화계 내 성희롱 및 성폭력에 대처할 수 있는 상설 기구를 준비 중이다. 여성단체들에서 분야의 특수성 때문에 벌어지는 사례들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니 영화산업 시스템을 아는 전문 상담사가 한명 정도는 상주해야 할 것이다.

박현진_ 제도화엔 힘 있는 감독과 메인 스탭들이 나서줘야 한다. 각성하고 반성하고 공론화하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직위별로, 성정체성별로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 매번 까칠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사전에 다 함께 문제의식과 대처 매뉴얼을 공유해야 한다.

부지영_ 제도와 기구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조합들과의 연계가 있어야 한다. 소속 조합에서 페널티를 줘야 하니까. 감독도 성희롱 피해자일 수 있고, 감독끼리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않나. 감독조합도 나서야 한다.

이미연_ 감독조합 내에도 성폭력방지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사회의 동의는 다 받아놓은 상태다. 남성감독들도 의지를 가지고 나서줘야 한다.

경력 단절, 임금 차별, 왜곡된 이미지…

-성희롱과 성폭력의 기저에는 뿌리 깊은 여성혐오와 편견이 존재하고, 그것이 곧 유리천장으로 이어진다. 당장 영화학과만 봐도 연출을 지망하는 여학생들이 많지만 실제로 입봉해 장편영화를 연출한 여성감독은 손꼽을 정도로 적다. 감독님들은 어떻게 입봉했나.

이미연_ 도제 시스템이 무너지고 그나마 많이 나아졌다. 나는 한국영화가 거품 시기였을 때 무리 없이 데뷔한 편인데 감독님들은 어떤가.

박현진_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 전공을 했는데도 졸업 후 연출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20번 이상 면접을 봤다. 내가 단편으로 상을 타지 못해서 그런 걸까 자책도 많이 했는데, 현장의 인력 구성을 보니 여성 연출부는 스크립터 한 자리밖에 없더라. 여성 조감독은 본적이 없다. 같은 처지의 절박한 여성들과 자리 하나를 놓고 싸우니 얼마나 빠듯했겠나.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의식적으로 여성을 연출부로 뽑으려고 한다. 데뷔는 운이 좋았다. 한국영화계 거품 시절 끄트머리의 막차였다. <6년째 연애중>(2008)을 준비하던 감독이 하차해 급하게 투자와 캐스팅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각본을 쓴 작가인 내가 그 작품의 감독을 맡게 된 거다.

홍지영_ 한국에선 여성 나이와 남성 나이가 다르지 않나. 여성은 감독이 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나이가 더 낮고, 결혼과 육아에 전념한다면 경력 단절도 이겨내야 한다. 나는 결혼과 출산을 먼저 했는데, 한국영화아카데미 동기와 선배들이 ‘넌 이제 영화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기필코 데뷔하리라는 다짐을 했고, 결국 38살에 <키친>(2009)으로 입봉했다. 하지만 내 경우는 남편 역시 감독이기 때문에 이해도가 높았던 것도 있다. 우리는 지금도 로테이션으로 육아를 한다. 둘째가 일곱살인데, 작품을 찍을 땐 육아가 불가능하다. 어제도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프리믹싱을 했는데, 남편이 전화 한번 안 하고 혼자 아이를 돌봤다.

부지영_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 애를 낳으면서 4~5년간 경력이 단절됐다. 동기들은 이런저런 제의도 받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나만 업계에서 투명인간이 된 것 같더라. 내가 결혼했다는 걸 모두가 알기라도 하듯 아무 연락이 없었다. (웃음) 결국 수차례 공모한 끝에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제작지원을 받아서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8)를 찍으면서 데뷔했다. 그나마도 아이를 맡아주신 친정엄마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요즘도 영화제든 술자리든 가면 꼭 누군가는 “애들은 어쩌고?”라는 말을 한다. 이젠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럼 네가 가서 봐줄래?”라고 응수하는데, 남편인 김우형 촬영감독도 과연 술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받을까. (웃음)

박현진_ 결혼 이슈엔 경력 단절 문제와 함께 임금 차별 문제도 있다. 여성들은 영화를 하다가 그만둬도 되고, 절박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미혼인 여성 영화인들이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시집가면 되지”일 거다. 데뷔 준비 중인 한 언니는 유부남 감독보다 당연하다는 듯 돈을 덜 받았다더라. 기혼 남성은 더 책임져야 할 게 많을 거라며 임금을 더 많이 주는 거다.

부지영_ 젠더의 권력 차이도 있지만 한국 사회에선 나이도 권력에 한몫하지 않나. 나이가 드니 상황이 좀 나아지더라. 씁쓸한 현실이다.

-여성 배우들은 ‘여배우는 꽃’이라는 왜곡된 편견이 힘들다더라. 여성감독의 경우 어떤 편견에 부딪히나.

박현진_ 여성감독이라고 해서 ‘큰 현장을 컨트롤할 수 없다’ 내지 ‘체력적으로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건 전부 편견이다. 최근 표준근로계약서가 도입되면서 스탭들에게도 체력적으로 부담이 줄어 전처럼 여성은 남성보다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요즘은 시스템으로만 현장이 굴러가므로 감독이 위압적인 방식으로 현장을 장악하거나 통제할 필요 없이 연출에만 집중하면 된다. 오히려 소통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

이미연_ 여성감독은 현장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운다는 말도 있다. 모든 여성감독이 그러지도 않거니와 상황이 답답하면 눈물이 날 수도 있지 않나. 약자에 대한 조롱과 혐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박현진_ 우는 게 때리는 것보단 낫지. (일동 웃음)

이미연_ 나만 해도 학습된 편견이 있어서 무조건 씩씩하고 강하게만 보이려 했다. 그런데 예전에 한 교포 감독이 현장에서 귀걸이를 하고 치마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의 유명한 여성 촬영감독이 다양한 액세서리를 화려하게 한 것도 본 적 있는데, 둘 다 보기 좋았다. 생각해보면 자기가 일하는 데 방해만 안 되면 문제될 게 없는데, 이상하게 여성성이 드러나는 복장을 입으면 현장에선 민폐라고 받아들인다.

부지영_ 왠지 현장에는 등산복을 입고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웃음)

홍지영_ 확실히 편견이 있다. 지금의 짧은 머리는 취향대로 한 것이지만, 데뷔할 때는 여성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커트 머리를 했다. 배우와 스탭들에게 기죽지 않으려면 이런 머리를 하고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는 편견이 있었지.

이미연_ 매체에서도 편견이 느낄 때가 많다. 많은 매체들이 어떤 여성감독의 영화든 늘 여성감독 타이틀을 달면서 ‘여성감독 특유의 섬세한 감성표현’ 이란 표현을 쓰곤 한다. 여성이라고 다 섬세한 건 아니다.

박현진_ 난 이름이 중성적이라 얼굴을 보기 전까진 남성으로 착각하는 분들도 많다. 현장에서 정보 없이 왔다가 나이 좀 있는 조명 스탭에게 가서 “감독님” 하고 부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웃음) 내가 감독이라고 하면 놀란다. 기본값이 남성인 거다.

부지영_ 나한테는 사람들이 늘 주인공이 왜 여성인지를 묻는다. (웃음) 남성감독의 영화주인공들이 남성인지 물어보는 적은 없지 않나. 내가 여성이기에 내가 잘 알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뿐인데, 답답하다.

홍지영_ 상업영화를 연출한 여성감독은 손에 꼽지만, 그중에서도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작품은 더 적을 거다. 스릴러나 액션 같은 장르영화는 더더욱 없다.

부지영_ 여성감독들이 왜 전형적인 장르를 안 다루려고 할까. 인구의 반이 여성이라는 물리적인 지표와 상관없이 우리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주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며 자라왔다. 남성들이 전형성을 쉽게 받아들이는 데 반해 여성들은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지. 한국의 장르영화는 너무나 남성 중심적이다.

박현진_ 공감하지만 여성이라고 다 전형적인 것이나 장르적인 걸 피하진 않을 거다. 투자•배급사에서 상업영화를 만들 때는 여러 경우의 수가 있는데, 감독의 아이템인 경우도 있지만 있는 시나리오에 감독을 패키징하는 경우도 있잖나. 그럴 때 제안하는 리스트에 여성감독이 있을까. 게다가 그 영화의 스케일이 조금이라도 커지는 순간 여성감독들은 완전히 배제되기 마련이다. 나는 전형적인 영화도 허용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제안이 안 온다. (웃음)

이미연_ 그게 현실이다. 임순례 감독님을 빼면 한국에서 그런 의뢰를 받는 여성감독이 있겠나.

박현진_ 여기엔 남성들의 ‘형님 네트워크’도 한몫한다. 영화계에서 남성들의 패거리 문화를 많이 겪었다. 따로 모여 흡연을 하거나 술자리를 가지면서 형성되는 인맥을 통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거지. 꼭 현장에서뿐 아니라 투자•배급사들이 정기적으로 술자리에 호출해 사적 친분을 공고히 쌓고, 특별히 흥행 성적이 좋거나 능력 있어 보이지 않는 데도 꾸준히 계약하는 몇몇 남성감독들이 있다. 그 리스트에도 당연히 여성감독은 없다. 우리에겐 이런 메이저의 네트워크에서 배제되는 이중고도 있는 거다.

‘여성은 이래야 한다’와의 끊임없는 싸움

-촬영장에서의 일들이 고정된 성 역할에 따라 나뉘어 있는 것도 일종의 편견일 것이다. 남성은 촬영, 조명, 그립, 여성은 의상과 분장이라는 도식이 있지 않나. 같은 연출팀에서도, 여성은 연출팀에 들어가면 스크립터를 맡는 경우가 많다. 네분 중 홍지영 감독님을 제외하면 모두 스크립터 경험이 있는데.

이미연_ 할리우드에서부터 비롯된 건데, 예전엔 ‘스크립터 걸’이라고 해서 감독 옆에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비서처럼 돕는 역할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걸’이 빠지고, 비서로서의 역할이 없어진 거지. 하지만 아직도 여성이 해야 한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홍지영_ 제작팀의 제작회계와 비슷한 거다. 여성이니까 꼼꼼할 거라는 편견이다.

이미연_ 예전에 경리 출신의 여성 영화인이 제작회계를 한 뒤 프로듀서가 되겠다고 하니 경리 출신이 무슨 PD냐라고 말하는 남성 영화인들도 있었다. 남성 PD 중엔 범죄자도 있잖나. (웃음) 남녀의 스타트 라인 자체가 다른 거다.

박현진_ <좋아해줘>의 스탭들을 살펴봤는데, 여성이 30명, 남성이 60명 정도더라. 그래도 이 현장은 여성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세어보니 그나마도 여성이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홍지영_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후반업체까지 총 99명 중 34명이 여성이었다. 그래도 30% 정도는 되지만 촬영과 조명, 그립에는 여성이 단 한명도 없었다.

부지영_ 반대로 분장, 의상에는 남성이 없지 않나. 남성도 할 수 있는 분야인데.

홍지영_ 그래도 헤어에는 남성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데이터매니저, 현장편집, 후반작업의 DI 경우엔 점차 여성이 늘어나고 있어 다행이다.

-남성 위주의 현장에서 만들어진 영화엔 여성혐오적이거나 여성에 대한 편견이 담긴 시선이 담기게 마련이다. 개봉을 앞둔 <미씽: 사라진 여성>의 이언희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애를 잃은 엄마는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거나 ‘애 엄마가 옷을 화려하게 입거나 염색을 하거나 꾸미는 것은 이상하다’는 남성 스탭들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더라.

박현진_ 여성 영화인들은 시나리오와 영화 개발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은 이래야 하는데’와 싸워야 한다. 이언희 감독에게 남성 스탭들이 한 말은 마치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손예진)이 딸의 장례식에서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 일부 관객이 ‘애 엄마가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했던 것과 비슷한 반응이다. 영화 속 캐릭터의 표현방식인데 말이다. 이런 환경은 영화 내적으로도 영향을 미친다. 나도 들은 것도 겪은 것도 있는데, 남성 메인 스탭이 많은 경우 의견을 교류할 때 ‘여성 캐릭터는 이래야 한다’는 편견을 극복하고 의견을 개진하기가 어렵더라.

부지영_ 나는 <케빈에 대하여>(2011)라는 영화가 불편했다. 왜 아이의 악행이 엄마의 실수로 설명되어야 하나. 왜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는 생략되어 있는 걸까. 시종일관 그런 생각들 때문에 감상이 어렵더라.

홍지영_ 엄마로서 엄마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아파 병원에 데려가면 엄마가 관리를 못해서 애가 감기가 걸렸다고 혼을 낸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책임에 관한 한 그렇지 않다. 아이 역시 독립적인 인격체이고 많은 요소들이 작용하는데, 아이가 잘못된 걸 엄마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 찾는 영화들이 너무 많다.

부지영_ 그외에도 영화 속 여성이 투사되는 방식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름이 없거나 스토리가 없고, 그마저도 남성의 부속품이니까. 며칠 전에 후배 남성감독이 캐스팅 의견을 물어왔는데, 투톱 여성 액션영화더라. 고마웠다. (웃음)

이미연_ 여성 캐릭터 중에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처럼 멋진 캐릭터가 있을 수 있지만 지질하거나 나쁜 여성 캐릭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이들이 영화 속 남성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생명력을 갖고 스크린에서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선택할 수 있는 여성영화가 많지 않다

-감독으로서 이런 의식들을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터다. 네분의 차기작에서는 어떤 여성 캐릭터들을 볼 수 있을까.

이미연_ 가수 이난영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를 연출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1930년대를 살았던 탈근대적 여성의 삶을 그려보고 싶었다. 제작사 루스이소니도스에서 이준익 감독님의 <동주>에 이어 만드는 근현대 예술인의 초상 시리즈다. 이난영 선생은 당대 남성들에 비해 자료가 많지 않아서 연구하는 분들과 계속 만나고 있다. 주인공은 캐스팅됐는데, 남성 배우가 캐스팅이 돼야지. (웃음)

박현진_ 남성 배우들은 남성이 중심인 영화만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여성 배우는 늘 서포트해주는 역할로 등장하는데 말이다. <서프러제트>의 벤 휘쇼나 <고스트버스터즈>의 크리스 헴스워스처럼 유명한 남성 배우가 조연급으로 등장한 게 참 멋지더라.

이미연_ <서프러제트>는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다. 영화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아닌데, 이 소재를 영화화한 것만으로 놀라웠다. 제작자와 배우들의 의지가 중요했을 것이다.

부지영_ 여성 배우들이 공동제작하지 않았나.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이미연_ 우리도 계속 시도를 해야지.

박현진_ 나도 여성으로서 내가 겪어온 것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좋아해줘>를 찍으면서 고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지점들에 있어선 한계도 많이 느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정말 싫은데 그 말이 한국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지 않나. 여성영화이면서 대중적으로 힘 있게 접근하려면 어떤 방식을 차용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요즘 할리우드는 최근 에이미 슈머의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나 <고스트버스터즈>처럼 기존 성 역할을 바꾸는 기획들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어릴 때 홍콩 누아르영화들을 좋아했는데, 이런 스타일의 장르영화들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반전시키는 기획을 해보면 어떨까 고민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최근 만연한 성희롱 및 성폭력 사례들을 극화해서 보여주는 웹드라마를 기획 중이다. 억울한 사연을 가진 여성 의뢰인들이 찾아오면 여성 컨설턴트가 사적 복수를 대신해주는 내용이다. 영화는 개봉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니 빠르게 현실을 반영해 보여주려면 웹드라마라는 형식이 좋을 것 같더라.

홍지영_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남성이 주인공이지만, 이 안에 내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기욤 뮈소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데, 각색 과정에서 여성 캐릭터를 보다 적극적인 모습으로 바꿨다. 돌이켜보면 나는 <키친>부터 <결혼전야>, 곧 개봉할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자기 욕구에 충실하고 관계를 리드하는 여성들을 선호했다. 멜로에서 보통 여성은 사랑을 받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질 때가 많은데, 그런 고전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여성을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존재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부지영_ 나는 차기작 트리트먼트를 쓰고 있다. 이야기를 구상할 때마다 항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주인공은 영화에서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한 여성 캐릭터들이더라. 캐릭터가 먼저 떠오르면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까가 궁금해진다. 나이가 든 여성 캐릭터들인데 투자가 될까 걱정이다. 그런데 왜 여성이 주인공이면 펀딩이 안 되는 걸까? 투자를 결정하는 사람이 남성이라서?

이미연_ 주 관객층인 20대 여성들이 남자주인공을 원한다고 분석하기도 하더라.

홍지영_ 사실상 멀티플렉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는 많지 않다. 여성들도 남자영화를 원하는 양 포장되지만 애초에 선택지에 남자 영화들만 있어서 그 영화를 보는 것뿐이다. 여기에 통계를 내니 20대 여성 관객이 남자영화를 좋아하네? 이렇게 되는 거다.

부지영_ 남자 한명 나오는 영화, 두명 나오는 영화, 세명 나오는 영화중 뭐가 좋냐고 물어보는 셈이다. (웃음)

박현진_ 문화상품을 소비하고 콘텐츠를 구입하는 데 돈을 쓰는 건 대부분 여성들이다. 여성이라고 왜 자신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겠나. 이전에 여배우 트로이카가 흥행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시절엔 세 여배우를 모든 남성 배우와 영화들이 기다렸다. 1990년대 이후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면서 점점 더 보수화되고, 그저 중년 남성들 고생한 것에 대해 ‘썰’을 풀어주는 영화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홍지영_ 시장이 보수화되면서 단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영화에만 투자하는 경향도 있다. 뮤지컬만 해도 여성이 주인공인 콘텐츠가 많은데, 유독 영화시장이 그렇다.

이미연_ 이런 경향성들은 이제 일정 부분 한계에 왔다. 선회해서 다시 여성영화가 만들어지는 분위기가 되길 바란다.

박현진_ 함께 사는 삶인데 왜 영화에는 여성이 들러리로만 나올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성 참정권이 생긴 지 100년도 채 안 됐다는 거다. 여전히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나는 내가 힘들고 안 되는 게 나 자신 때문이라고 늘 자책했지만 최근엔 내가 여성인 것이 한계로 적용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홍지영_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다. 영화의 내용을 책임지고 있고 현장에서 권력을 가진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인 우리가 여성들에게 불편하지 않은 현장이 되고 불편한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의식을 갖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설득해내야 한다. 현장에서 이런 일들을 용인하지 않고, 영화에는 성차별적 요소를 넣지 않겠다는 생각. 이것들이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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