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씨네 인터뷰] "볼거리의 영화보다 정서가 중심인 이야기가 좋다" - <가려진 시간> 엄태화 감독
2016-11-17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엄태화 감독은 단편 <숲>(2012)으로 2012년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 <잉투기>(2013)로 주목해야 할 젊은 감독의 선봉에 서게 됐다.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 <잉투기>가 갈 데까지 가보자는 청춘의 패기로 가득한 영화였다면 그의 첫 번째 ‘상업’영화 <가려진 시간>(2016)은 판타지 멜로의 아름답고 신비한 결을 잘 살린 영화다. <가려진 시간>은, 시간이 멈춘 세계에 갇혀 홀로 나이를 먹어버린 성민(강동원)과 그러한 성민을 믿고 지켜주는 소녀 수린(신은수)의 이야기다. 만화적 상상력과 내밀한 감정에 밀착한 연출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발칙하고 과감한 그의 작품들과 달리 수줍음이 많고 말수도 적은 엄태화 감독을 언론시사 다음날 만났다. 깊게 고민하다 운을 떼고, 말이 막혔을 땐 볼이 빨개지기도 했던 엄태화 감독의 모습이 왠지 <가려진 시간>의 두 주인공과 겹쳐 보였다.

-개봉을 앞두고 스트레스로 살이 2kg나 빠졌다고 했는데, 언론시사 전날 잠은 잘 잤나.

=잠은 잘 오더라. (웃음) 개인적으론 언론의 반응도 궁금했지만 함께 작업한 사람들, 강동원씨를 비롯한 배우들과 스탭들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더 궁금했다. 시사가 끝나고 저녁 늦게까지 영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단편 <숲>을 흥미롭게 본 영화사 바른손이앤에이의 곽신애 대표가 만남을 청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잉투기>를 만들고 졸업하자마자 <가려진 시간>을 준비했다. 첫 번째 상업영화를 만들기까지 순조롭게 달려온 셈이다.

=투자도 바로 되고, 캐스팅도 바로 됐으니 어쩌면 남들보다 빨리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 같다. 또 영화 외엔 별다른 취미가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친구들 만나는 것도 그닥…. 여행도 귀찮아서 잘 안 다닌다. 그런데 영화 만드는 건 재밌으니까 빨리빨리 하게 된다. 누가 마감 기간을 정해주지 않아도 내가 어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일찍 마감한다. 그래서 아카데미 다닐 때 동기들한테 구박을 많이 들었다. 다 같이 늦으면 티가 안 나는데 나 혼자 마감 맞춘다고. (웃음) 완벽히 마음에 드는 상태가 아니어도 빨리 누구한테 보여줘서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편이다. 모든 욕구불만을 영화에 쏟아붓는 것 같다.

-<잉투기> 때와 달리 ‘상업’영화에 대한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감사하게도 만드는 과정에서 간섭과 개입은 거의 없었다. ‘상업적인 방향으로 가야지’, ‘이런 걸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진심이 전달될까에 더 초점을 맞췄다. <잉투기>는 모티브가 된 실화가 있었고, 그 사람들을 만나서 취재하는 과정에서 영화적으로 풀기보다 최대한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가려진 시간>은 없던 세상을, 온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거라 <숲>과 같은 이전의 단편들에 더 가까운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

-커다란 파도를 마주하고 있는 성인 남자와 소녀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했는데, 그 이미지가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이유가 있나.

=정확히는 그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떠올린 게 아니라 시간이 멈추는 이야기를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그 그림을 보게 됐다. 어떤 이미지에 꽂히면 거기서 이야기를 발전시켜가는 식으로 작업을 해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멈추는 이야기는, 보통 후회되거나 되돌리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시간을 멈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하면 재밌는 상상들을 먼저 하게 되지만 사실 시간이 멈춘 세계에서 계속 살면 과연 재밌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판타지 멜로영화다. 판타지보다는 멜로에 방점이 찍혀있는 느낌이었다.

=판타지영화라고 했을 때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영화들이 있는데, 사실 한국에서 그러한 판타지영화를 만들기는 현실적으로 힘든 점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도 화려한 볼거리의 영화보다 정서가 중심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시간이 멈추기 전까지의 전반부는 <구니스>(1985), <스탠 바이 미>(1986) 같은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몸 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아이들의 모험담이 비중 있게 그려진다.

=실제로 아역배우들한테 <스탠 바이 미>와 <구니스>를 보여줬다. 아이들은 자신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기가 힘든데, 그런 영화들을 보면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론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좋은 추억을 생각해도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어렸을 때 손목시계가 너무 갖고 싶었던 적이 있다. 아빠가 열심히 기도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손목시계를 줄 거라고 얘기하셨다. 그래서 매일 기도를 했고 어느 날 아침 내게 시계가 생겼다. 산타 할아버지가 갖다줬다는 아빠의 얘기를 진짜로 믿었다. 어릴 땐 그렇게 무언가를 쉽게 믿고 또 쉽게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라고 하게 된다. 아이들은 또 누군가를 좋아할 때 이유 없이 좋아하는데, 조건 없이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믿음이고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믿음에도 조건이 생긴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이들의 이야기가 중요했다.

-어른이 된 성민은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서야 등장한다. 다 큰 성민과 수린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성민이 수린의 볼을 만지는데 왠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둘의 멜로에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더라.

=시간이 멈춘 세계에서 오랫동안 정지되어 있는 수린을 보다가 움직이는 수린을 처음 봤을 때 성민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했다. 볼을 만지는 건 살아 있는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물론 잘못하면 둘의 관계가 롤리타 콤플렉스처럼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고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강동원이 연기 한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후줄근한 행색을 한 성인 남자가 자신이 성민이라고 말했을 때 너무 무섭게 보이면 안 될 거라 생각했다. 어른스러운 소녀와 아이 같은 성인 남자가 함께 있을 때, 어떨 땐 둘 다 아이 같고 어떨 땐 둘 다 어른같이 보이길 원했다. 강동원이라면 충분히 그 느낌을 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어른과 아이의 모습을 넘나드는 연기를 훌륭히 소화해주었다.

-강동원이 <검사외전>을 촬영하던 때 부산에서 첫 미팅을 한 것으로 안다. 첫 만남, 첫 느낌은 어땠나.

=그가 가지고 있는 신비한 이미지가 있어서 긴장을 좀 했다. 나는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에도 서툰 사람이라, 영화에 출연해주면 좋겠다는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머리를 굴렸던 것 같다. 그런데 동원씨가 너무도 편하게 대해주고 먼저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 내가 왜 이 시나리오를 자신에게 주려 했는지 잘 알겠고, 자신이 고민하는 지점은 무엇인지 굉장히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데, 그 시점이 놀랍고 재밌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동원씨 얘기를 가만히 잘 듣고 있었다. (웃음)

-신은수의 경우 연기가 처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린의 얼굴과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라 캐스팅에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일단 얼굴이 좋았다. 두 시간을 끌고 갈 수 있는 얼굴의 힘이 있었다. 이야기가 있는 얼굴이었고, 수린의 외로움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기 경험이 전무했지만 연기 선생님을 붙여서 최종 후보에 오른 배우들과 함께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매주 연기가 급성장하더라. 그때부터 타고난 연기력이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아역배우들의 연기 또한 연기 같지 않아서 좋았다. 특히 어린 성민 역의 이효제는 남다른 구석이 있더라.

=애들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촬영 들어가기 전 한달 동안 매일 4시간씩 연기 선생님과 함께 놀이 같은 훈련을 했다. 그사이 서로가 충분히 친해졌고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지 않는 법도 익히게 된 것 같다. 효제는 말이 필요 없는 베테랑이다. 긴장이라곤 하지 않는다. 효제가 먼저 캐스팅된 상황에서 수린 역의 최종 오디션을 봤는데, 그때 효제가 최종 오디션에 오른 배우들의 상대역도 해줬다. 효제한테 (최종 후보들 중에) 누가 제일 호흡이 잘 맞는 것 같냐고 물어도 봤다. 그 의견이 실제로 반영됐다.

-조성희 감독의 판타지 멜로 <늑대소년>(2012)이 연상되는 지점도 있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다. (웃음) 두 영화 모두 순정만화, 더 나아가 치유물의 범주에 속한 작품이라서 클리셰가 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클리셰를 피하려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굳이 피해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만화를 좋아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데, 순정만화도 좋아하나.

=순정만화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니고 판타지 계열의 순정만화를 좋아한다. 순정 판타지로 빠지기 시작한 건 클램프의 <성전>을 보기 시작하면서였고, 다무라 유미의 <바사라> 그리고 동일 작가의 <7Seeds>도 실제로 이 영화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단편 및 <잉투기>와 비교했을 때, <가려진 시간>은 착하고 따뜻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 작품들에선 감추고 싶은 못난 감정들, 그 감정의 민낯을 주로 보여줬기 때문에 <가려진 시간>의 감성이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모든 감성이 내 안에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도 큰 편이고, 나이 드는 것에 대한 공포도 심한 편이다. 어렸을 때 들었던 노래나 만화의 영향도 큰데, 예를 들면 <명견 실버>라는 만화를 정말 좋아해서 지금도 집에서 종종 틀어놓고 있다. 어릴 땐 동생(배우 엄태구)이랑 매일 <명견 실버>를 보면서 나는 곰 역할을 하고 동생은 개 역할을 하면서 싸우고 그랬다. (웃음) 그런데 요즘 그 만화를 다시 보면 슬픈 감정이 밀려온다. 이 감정은 뭘까,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싶다.

-단편 <숲> 때는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을 들으면서 시나리오를 썼고, <잉투기> 때는 <400번의 구타>(1959), <허공에의 질주>(1988), <바보들의 행진>(1975)을 자주 봤다고 했다. <가려진 시간>을 작업할 때 보고 들은 영화나 음악이 있다면.

=이번엔 좀 달랐다. 예전엔 핵심 정서가 비슷하다고 생각한 작품들을 참고했는데 이번엔 <스탠 바이 미>나 <구니스>처럼 내가 잘 모르는 것들을 배우기 위해서 영화들을 찾아봤다. 또 이 영화가 일반적인 드라마 투르기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이 이야기를 잘 구성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때 데이비드 핀처의 <나를 찾아줘>(2014)를 봤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이렇게도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구나, 나도 잘만 쓰면 되겠구나, 하고 그 영화 덕에 용기를 얻었다.

-꿈과 환상, 가상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영화에 반영되고 있다.

=현실도피성 인간이라 그런 것 같다. (웃음) 세상 돌아가는 일에 큰 관심이 없고, 세상은 왜 이렇게 불가해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사실 아직은 명쾌하게 그 질문의 답을 내놓기 어려운 것 같다.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런 세계에 매료되는지. 오히려 영화를 하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아가고 있다.

-차기작 시놉시스도 나왔다고 들었다.

=SF호러인데 이야기는 아직 공개할 단계가 아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넘나드는 영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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