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장병원의 영화비평] 홍상수 감독의 신작을 내러티브와 구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
2016-11-22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홍상수의 열여덟 번째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하 <당자당>)은 출구를 향한 욕망을 자극한다. 서울 연남동 일대의 한정된 공간을 오가며 진행되는 이 영화의 플롯은 미정형 상태의 혼돈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당자당>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가로막는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투쟁을 묘사한다. 미성숙하고 우유부단한 주인공 영수(김주혁)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강박증을 가진 홍상수의 남자들이 자기 몰입적인 강박에 빠지는 꼴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당자당>에서 홍상수의 이야기를 형성해온 우연한 만남과 기이한 재조합, 여로형(形) 플롯 그리고 복습되는 장면들은 내러티브의 계열 위에서 진동한다. 스토리는 어떤 과장이나 수사도 없는 정직한 문장처럼 담백하지만 플롯은 다소 복잡하다. 홍상수는 많은 모순과 부조화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서사의 주요 단위들은 신중하게 조직되었고 정연하게 조각나 있다. 홍상수는 행위의 작은 범위에 주목함으로써 더 큰 형상을 만들고자 한다. 연남동이라는 작은 동네, 몇개의 장소, 말과 행위의 협소한 레퍼토리는 그들 사이의 울림과 변주를 관객이 인식하도록 만든다. 무엇이 저들의 사랑을 위협하는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직면하여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문과 거짓말

<당자당>의 내러티브는 심하게 비틀려 있다. <당자당>에서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하는 것이 쓸모없는 짓인 것처럼 안과 바깥, 주관성과 객관성간의 구분은 한 이미지나 시퀀스에선 필요할지언정 전체적으론 유효하지 않다. 서사는 상상과 실제, 꿈과 현실이 구별되지 않는 교묘한 혼란으로 채워진다. 플롯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홍상수의 이전 작들과 겹친다. 음주와 어설픈 구애, 관계를 구성하는 사소한 번뇌, 기다림, 남자들에게 왜 그들이 아둔한지를 설명하는 여자 등. 형식과 구조를 이야기하면서 캐릭터를 가지고 유희하는 홍상수의 퍼즐 게임에는 항상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주관성과 객관성. 무의식과 상상을 오가는 이 둘은 <당자당>에서 뚜렷한 경계 없이 섞이거나 이음매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 영화는 서사의 트릭과 함정에 대한 홍상수의 관심을 다시 한번 반영한다. 그는 항상 실재처럼 보이는 환상, 교차하는 사건을 구불구불한 미로가 있는 정원처럼 이해한다. 심리적 진실 이상의 것을 보여주면서 <당자당>은 백일몽과 판타지가 우리의 실제 경험만큼이나 실재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당자당>에서 의식의 주관성은 지배적이다. 민정(이유영)은 남자친구 영수와 다툰 뒤 그를 떠난다. 그녀는 존재의 정체성에 가해진 위기를 ‘부인’(否認)이라는 행위를 통해 극복하려는 홍상수적인 캐릭터다. 영수는 당시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했고, 민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제력을 잃는다. 영수의 작은 방에서 격렬한 언쟁을 벌인 연인이 잠시 헤어져 시간을 갖기로 한 뒤 서사는 두 갈래로 분기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영수는 다리가 부러지고 민정을 그리워하면서 연남동 일대를 방황한다. 정신적으로 억류된 영수의 상태는 ‘고장난 다리’의 형상으로 표상된다. 민정은 새로워지기로 결심한 듯 다른 사람 행세를 한다. 쌍둥이 자매 또는 도플갱어, 그도 아니라면 민정처럼 보이는 또 다른 젊은 여자(자신을 부인하는 시점부터 민정은 민정이 아니라고 볼 수 있으므로 ‘여자’로 부르기로 한다)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한 인물에 대한 다층적인 상(像)을 구현한 여자는 두 남자와 짧게 만나고 어두운 골목길에 웅크린 채 영수와 재회한다. 영수의 인식영역으로부터 사라진 민정의 변화하는 정체성에 관한 초현실적인 우화로 <당자당>을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영수의 정신적 모험을 따라 변태하는 ‘민정(들)’에 관한 로드무비로 진가를 드러낸다. <당자당>의 시간과 공간, 서사의 논리는 흩어져 있고 두 갈래 길을 걷는 조각난 이야기 단위들은 흔들리고 서로를 당긴다. 플롯에 기초한 서사의 회고적인 재구성은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연결이 불가능한 조각난 단편들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의 질서와 논리가 생성되는 색다른 연속체로 사고하도록 이끈다. 사라진 민정과 함께 시간도 사라진다. 공중에 떠 있는 유령의 발자국처럼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을 통과하는 두 주인공의 여정은 전모를 드러내지 않는다. 서사는 영수와 여자 두 인물별로 하나씩, 두 블록의 스토리로 나뉘고 그들이 종결된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 이야기의 종착점으로 가기 전까지 세번의 검은 무지화면이 등장하는데, 검은 화면은 플롯의 국면 전환을 신호한다. 첫 번째 무지화면은 영수와 싸운 민정이 홀로 거리를 걸어가는 숏 직후에, 두 번째는 중행(김의성)을 동반한 영수의 여정이 끝난 직후, 세 번째는 황태구이 집에서 영수가 민정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직후에 등장한다. 여자가 사라진 뒤부터 서사는 ‘영수의 방황’과 ‘여자의 유랑’이라는 두 가지 갈래로 전개되므로 세번 등장하는 무지화면은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무지화면들 사이에서 영수의 스토리와 여자의 스토리는 미묘하게 교차한다. 영수는 여자가 만나는 두명의 사내인 재영(권해효), 상원(유준상)과 결코 마주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우주에 살고 있다. 또는 한 우주가 다른 우주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카페에서 여자가 읽고 있었던 카프카의 <변신>처럼, 여자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바꾸기 시작할 때부터 <당자당>은 ‘구성된’ 민정과 ‘체험된’ 민정의 투쟁을 따라가면서 둘 사이의 간극을 위해 다중정체성이라는 모티브를 활용한다.

<당자당>은 처음 영수의 방으로 회귀함으로써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단정은 섣부르다. 차라리 두 가지 액션의 평행한 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이 영화의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정확할 것이다. <당자당>에서 다른 시각으로 반복되는 장소와 디테일, 뉘앙스, 이전 장면에 등장한 팩트의 재배열은 진화하는 의식을 반영한다. 기본적인 관계와 행위의 유사성, 희박한 논리적 연관성을 기초로 한 인물들은 아주 먼 거리를 넘어 다양한 장애와 미로를 통과해 서로를 향해 움직인다. 그들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기보다는 목적지를 의식하지 못하는 지점을 향해 각자 이동한다.

그, 그녀의 시간

여자는 그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 여자는 소문의 희생양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자의 시간이 영수의 시간과 다른 축에 놓여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여자는 연이어 두 남자를 만나고 우리는 서로 다른 두 스토리 사이의 유사성을 의식하게 된다. 여자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은 열렬한 소망뿐 아니라 자리를 이전하여 사라져버리고 싶은 바람, 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되고 싶은 의지를 표시한다. 그녀는 카페와 술집 ‘금성’, 공원을 떠돌며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문한다. 이러한 탐문 과정은 민정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분투하는 영수의 여행과 궤를 같이한다. 그렇다면 영수의 의식 바깥을 유랑하는 여자의 여정을 들여다보자. 카페에서 ‘변신’하는 여자는 정체를 부인하고, 성격, 행색, 말투, 행동방식을 바꾼다.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자신이 민정이 아니라면 누구인지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민정의 쌍둥이 여동생 행세를 하는 여자는 “ 좋아하는 타입이 며 주위에는 늑대나 아이들투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첫 번째 유랑을 마친 뒤 카페로 돌아와 영화감독 상원과 만났을 때 여자는 글 쓰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다소 순진한 다른 여인이 된다.

영수의 진화하는 의식은 이런 여자의 행적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민정이 종적을 감춘 후 ‘절름발이’가 된 영수는 두번 같은 장소(연남동 공원, 민정의 집, 민정이 일하는 의상실, 황태구이집)를 방문하는데, 이 대목에서 차이의 양식화가 작동한다. 영수는 글을 쓰고 그것을 다시 한번 퇴고(推敲)하는 작가처럼 이전의 행적을 철회하고 다시 기술한다. 재기술된 두번의 행장기에서 영수가 거쳐가는 장소들의 시각화 방식을 보면 심지어 카메라 세팅까지 유사하다. 두번의 여정 동안 영수는 같은 길을 되밟아 걷는다. 영수가 수행하는 두번의 방문은 여자가 경유하는 두 남자와의 스토리와 교차한다.

첫 번째 방문과 두 번째 방문의 차이는 여실하다. 첫 방문에서 영수는 선배 중행과 동행이다. 두 번째 방문은 영수 ‘혼자’이다. 이 것은 중대한 차이이다. 중행은 민정에 관한 소문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중행은 영수의 영혼에 들러붙어 있는 사악한 이미지를 표상한다. 중행은 영수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었고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영수의 탐문은 번번이 좌절된다. 중행의 곁을 걸을 때 영수는 심하게 절룩인다. 예컨대 첫번째 방문에서 중행과 동행인 영수는 민정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골목 어귀에서 자신을 부르는 민정의 음성을 듣지만 환청에 불과하다. 집 안에 인기척이 있는지를 살피던 영수와 중행은 계량기가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고 돌아선다. 의상실에 갔을 때는 가게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여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서며, 황태구이 집에서는 민정의 행실에 대해 입방아를 찧었던 사람들과 거칠게 논쟁을 벌인다. 영수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며 민정을 “순수한” 여자라고 하지만 그 밤 시간 동안 (민정을 쌍둥이 여동생을 자처하는) 여자는 재영과 술을 마시고 있다. 민정에 대한 영수의 관념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녀를 소외시킨다. 통렬한 회개의 변을 토해내는 영수는 술자리 끝에 “남은 삶은 진짜로 살고 싶어”라는 말을 남긴다.

목발을 짚은 채 ‘혼자’ 움직이는 영수의 두 번째 방문은 완연하게 다른 양상이다. 자신을 둘러싼 미혹과 거짓을 서서히 거두어내기 시작한 이때부터 영수는 실패의 전철을 되밟지 않는다. 민정의 집을 다시 찾아갔을 때 민정은 문을 열고 영수를 맞아준다. 집안으로 들어가 나누는 참회의 대화는 “우리 이제 진짜 사랑을 해요”라는 민정의 다짐으로 끝난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마당이고, 민정은 영수를 방 안으로 데리고 가지는 못한다. 이 어색한 집 안 유랑 시퀀스는 역시 환상이지만 그릇된 인식을 교정한 영수 앞에 펼쳐지는 화해의 무드가 여실하다. 영수의 각성의 여정은 계속된다. 황태구이 집에서 만난 ‘안대를 낀 여자’의 동석 제안에 영수는 생각을 더 해보겠다며 ‘혼자’ 있겠다고 말한다. 영수는 이제 타인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홀로인 상태이기를 바란다. 의상실을 재방문했을 때에도 그는 여주인에게 민정의 행방을 얻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의상실 쇼윈도 전면에 위치한 마네킹의 형상은 달라진 상황을 암시한다. 영수가 자리를 뜬 후 여주인은 마네킹의 팔을 떼어내고 민정이 사라질 때 입었던 것과 비슷한 민소매 옷을 벗긴다. 벌거벗은 상태로 드러난 마네킹은 자신을 옭아맨 박제된 이미지를 떼어낸 것처럼 깨끗해 보인다.

그렇다면 영수의 스토리와 여자의 스토리는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되는가. 민정의 집에서 영수와 민정이 사랑의 다짐을 하는 환상에 이어서 (민정을 닮은)여자가 공원 벤치에서 재영에게 이별을 선언한다는 것은 갈라진 두 스토리 사이의 관계를 추정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별 선언 후 갑자기 두 번째 남자 상원이 재영과 동일한 방식으로 카페에 등장해 민정(혹은 민정처럼 보이는 여자)과 가까워지고, 재영과 상원은 술집 ‘금성’에서 마주친다. 설전을 벌이던 그들이 중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알고 추억팔이에 여념이 없을 때 여자는 소외되어 있다. 여자는 두 남자를 떠나 골목길에 웅크린 채 울고 있고, 마침내 영수와 여자는 재회한다. 이처럼 영수의 진화하는 의식은 여자의 여정과 평행한 궤적을 이룬다. 의식이 진화할수록 영수와 민정은 가까워진다. 여자와 함께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올 때 영수의 고장난 다리는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당신, 변신

소략하게 <당자당>의 서사를 도해해보았지만 여자의 시간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이것은 여자가 남자들로부터 감추고자 하는 무언가이다. 영화의 모티브인 ‘변신’은 민정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영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자고 일어나니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린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처럼 영수는 이 기구한 모험을 통과하면서 ‘벌레’에서 ‘사람’으로 변신한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사회적 관계나 구조, 언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동물이다. <당자당>에서 이런 욕망의 이중성은 타인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두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영수와 민정, 혹은 민정의 외양을 한 여자는 미세하게 연결된 우주에서 상상적인 여행을 한다. 타인의 관점에서 ‘구성’되었던 민정이 ‘진짜’ 민정으로 돌아왔을 때 여행은 끝난다. 여자의 집과 남자의 방. 여자는 집 안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남자는 문을 두드려야만 한다. 종국에 영수와 여자는 그들이 존재하기로 되어 있는 장소에서 재회한다.

이 재회는 이상하다. 민정은 다른 여자가 되었거나 다른 여자가 민정의 몸을 하고 귀환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정체를 부인했던 민정은 영수가 ‘모르는 여자’임을 인정한 후에야 그와 술을 마실 수 있다. 온갖 유혹과 환란에도 불구하고 다시 태어난 여자는 영수의 침실로 돌아온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는 로드무비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길에 남겨지거나 영혼의 안식을 찾아 헤맨다. <당자당>은 많은 기이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공상적이고 집착적인 인간의 성향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당자당>은 인간관계와 존재의 위기라는 주제를 향한 복잡하고 예리한 내러티브 구조를 창조했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단일한 연속체로 파악하는 것은 프레임 안팎에서 인물들의 움직임 또는 꼬아진 두개의 스토리를 교차시키는 방식과 관련된다. <당자당>은 플롯 속으로 또 다른 해결할 수 없는 모호성을 구축하면서 완벽하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남겨둔다. 따라서 이 영화로부터 당신이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것은 이야기의 질료와 형식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미니멀하고 스타일적으로 절제된 <당자당>의 형식적 구성은 관객이 그 안에 미학적인 일관성이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영수의 훼손된 신체와 벌거벗은 마네킹처럼 그것은 형상적으로 암시될 뿐이다. 영수를 절룩거리게 만들었던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처는 영혼의 허약함에 대한 메타포로서 신체 훼손이다. 불구적 의식을 치료하고 편파적인 시야에서 벗어난 영수는 더 잘 걸을 수 있게 된다. 이 치유의 과정은 민정의 귀환과 짝을 이룬다. 두 가지 서사 액션 라인의 상호교차라는 논리는 은근히 암시된다. 홍상수의 영화는 구조적으로 폐쇄적이고 조밀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이 개방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 영화에 매설된 모든 미스터리는 찜찜하다기보다는 새로 태어난 연인이 먹는 시원한 수박처럼 청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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