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담>의 초반부는 흔한 88만원 세대 젊은이의 일상을 소묘한다.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윤주(이상희)는 졸업작품 전시를 위해 고물상에서 작품 재료로 쓸 폐품을 고른다. 그는 방 두개짜리 집에서 또래 여자 친구에게 월세를 내며 세들어 산다. 그 여자 친구는 남자와의 섹스를 좋아하는데 윤주에게 왜 연애를 안하느냐고 성화다. 작업실에서 고단하게 일을 하며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남들 일할 때 아버지는 뭘 했나 모른다고 불평하는 대학원 친구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 이 여자주인공 윤주는 딱히 매력을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평범하다.
학교 강의실, 좁은 월셋집, 고물상, 작업실, 편의점 등으로 구획 지어진 윤주의 주된 공간에서 비일상적인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유일하게 극적이랄 수 있는 사건이 있다면 그건 연애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윤주의 연애담을 그리는데 묘사 방식이 종래의 다른 영화들과 많이 다르다. 그건 이 영화가 여자들의 사랑을 다룬 영화라서가 아니다. 짧은 환희와 긴 고통 사이에 끼어드는 젊은이들의 일상을 간단하지만 굴곡 있게 다루는 건 데뷔 감독의 실력으로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인데도 감독 이현주는 가끔 관객을 흥분된 경지로 몰아넣을 만큼 능숙하다. 먹고 마시고 걷고 교통기관을 이용해 이동하는 따위의 일상적인 사건들에서 감독은 반복해 각운을 맞추고 리듬을 만들며 상승과 하강, 점층과 소멸의 과정을 거쳐 다른 세계로 이끌려가는 느낌을 관객에게 준다. 이건 주인공들의 연애의 기쁨과 실연의 끝에 다다른 고통 속의 성장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시간의 흐름을 민감하게 자각하게 하면서 공간의 기시감과 이물감을 통해 어제의 인물과 오늘의 인물이 달라져 있다는 걸 통감하게 만든다.
정직하고 간결한 연애의 절정
영화의 중반까지 윤주의 일상에 끼어든 지수(류선영)의 존재는 경이 그 자체다. 윤주가 고물상에서 작업 재료로 쓸 폐품을 고를때 중고책 등을 팔러 고물상에 온 지수는 활달한 목소리 톤과 쓱쓱 내닫는 걸음걸이로 움츠러들어 있는 듯한 윤주와는 대비되는 존재감을 준다. 이어지는 윤주와의 우연적인 만남에서 지속적으로 얻는 인상도 비슷하다. 윤주가 동료들을 데리고 찾아간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는 화장실에서 윤주와 만났을 때 그 좁은 공간에서도 자기 지배권을 압도적으로 행사한다. 화장실에 달린 거울에 비친 모습과 실제의 지수가 동시에 화면에 잡히는 가운데 화면 왼쪽에 있는 윤주는 그런 지수에게 일방적으로 끌린다는 느낌을 우리는 받게 된다. “화장실 문이 안 잠기니까 참고하시고요”라는 지수의 말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지수는 그가 일하고 있는 물리적 공간과 그 공간의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그가 가진 매력의 일부다. 관객은 지수의 정체를 당장 알 수 없지만 그는 자기 욕구에 솔직하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연애의 시작 단계에서 누군가는 늘 그렇듯이 윤주는 지수에게 압도당하고 끌려간다. 며칠 후 윤주는 잠을 자다가 지수의 전화를 받는다. 거리에서 기다리는 윤주 앞에 지수가 탄 택시가 선다. 두 사람은 지수의 옥탑방으로 가고 거기서 여차저차한 끝에 윤주는 그냥 자기로 한다. 애인과 마시기로 했던 와인을 꺼내 윤주를 대접하는 지수의 유혹자로서의 존재감은, 앞선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에서도 대단한 지배권을 행사하는데, 첫 경험이라 조마조마한 윤주를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춰 리드하는 것이다. 고정 화면으로 길게 찍은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전희를 연출하는 감독의 감각과 이상희, 류선영 두 배우의 연기는 완벽하다. 노출이 없는데도 비겁하지 않으며 관음적인 걸 깨트리는 고정 앵글로 관능적인 상태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당황한 윤주가 망설이자 애무를 멈춘 지수는 그대로 잠이 든다. 윤주는 그 밤 내내 아마도 번민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약간의 재치를 버무린 후속 장면이 나오는데 “하고 싶다”고 말하는 윤주의 서툰 유혹을 지수가 가볍게 거절할 때 관객은 사랑스럽게 웃게 되며 이들 커플에 완전하게 이입하게 된다. 살짝살짝 농도를 조절하면서 탱탱한 긴장을 놓지 않는 이 장면의 호흡에서 감독 이현주의 재능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아주 대담한 크기로 지수의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담기 때문이다. 관객이 약간 놀랄만큼 깊숙이 들어간 이 앵글은 윤주의 시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관객이 놀랐던 만큼 윤주가 설렜을 감정이 짐작 가는 가운데 두 사람은 다시 사랑을 나누고 이번에는 카메라가 그들의 호흡과 마찬가지로 거칠게 흔들린다. 핸드헬드로 잘게 나뉘어 잡힌 이 두 번째 섹스의 전희 장면에서도 첫 번째 장면과 마찬가지로 화면은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그들의 섹스 감정을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다.
나는 두 주인공의 감정과 욕망을 정확하게 포착한 이 동침 장면들이 놀라웠다. 관능적인 것이 일상적인 것과 분리되었을 때 그것들은 관음적인 외설에 쉽게 노출되고 굴복할 위험에 처한다. 관객이 보기 쉬운 앵글이거나 극적인 앵글로 노출을 가리는 위선을 부릴 때 화면은 외설이 된다. 이 두 섹스 장면에서의 앵글과 연출 패턴은 전혀 달랐는데도 정직했고 일상적이었으며 그들의 몸뿐만 아니라 호흡과 감정을 간결하게 담는다. 이어지는 그들 연애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들에서도 이런 느낌이 이어진다. 새로운 타인의 존재를 내 안으로 접수하는 듯한 충만감, 또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타인과의 초밀착거리를 통해 갖는 내밀한 포만감을 주는 장면들로 이를테면 카페에서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때 카메라는 그들의 바로 뒤에서 그들의 숨소리도 들이마실 것처럼 밀착해 그들의 뒷모습을 잡는다. 그들이 달뜬 욕망을 어쩌지 못하고 화장실로 갈 때 카메라는 덩달아 핸드헬드로 그들을 쫓는데, 이런 대담한 연출은 젊은 감독의 영화에서 꼭 경험하고 싶었던 순간에 속할 것이다.
공간의 변화와 관계의 비유
<연애담>의 미덕은 또 다른 데에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공간이 변하면서 이들 관계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걸 극적이지 않은 일상적 톤으로 묘사하는 가운데 감독은 특이한 각을 잡아낸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들의 격정은 오래 지속될 것은 아니다. 신기루처럼 다가왔던 어제의 연인은 오늘의 연인과 다르다. 윤주의 일상에 거대한 감정의 폭포수를 쏟아넣게 해줬던 지수는 아마 지수대로 또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그의 사정을 짐작하게 된다.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심야 택시로 퇴근하는 그의 삶은 윤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방하고 풍요로워 보였으며 규범적 일상과 거리가 먼 듯했지만 지수가 홀로 사는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하고 인천에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난 후 그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그 직전에 이미 그들 두 사람의 관계는 균열 직전이었다. 윤주의 졸업작품 준비는 연애에 몰두하면서 엉망이 되었고 윤주가 생활리듬이 달랐던 지수의 삶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두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지당한 상황에 조금씩 피로를 느꼈다.
지수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윤주의 상실감은 더욱 배가된다. 윤주가 처음 지수의 집을 찾았을 때 관객 입장에서 약간 놀라게 되는 것은 홀로 옥탑방에서 살 때의 지수는 탈규범적이고 풍요로워 보였으며 분방한 사람의 아우라를 풍겼지만 평범한 소시민의 빌라에 있는 지수는 규범적이고 갑갑하고 억눌린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빌라 집의 주인은 지수의 아버지다. 우리가 처음 지수의 아버지를 볼 때 그는 지수의 오버 더 숄더 숏으로 잡힌 채 자신이 끓인 된장찌개의 맛을 자랑하고 있으며 지수에게 이런저런 살가운 잔소리를 한다. 홈드라마의 따뜻한 장면처럼 설정된 이 장면의 이물감은 지수의 억압감의 정체를 가늠하게 해준다. 지수는 입만 열면 시집 가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자애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아버지가 대표하는 인습적 규범에 지수는 일시적이지만 항복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지수는 윤주에 대해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 하지만 그런 상태를 견딜 수 없는 윤주는 더욱 지수를 찾는다. 연애 관계에서 흔히 보게 되는 감정의 비대칭 상태에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윤주는 더욱 비참해지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처음 등장할 때 그저 평범했던 윤주는 이 단계에서부터 관객에게 큰 공명을 일으키는 매력의 존재가 되는데 멜로드라마의 비련의 주인공이 아니라 불안과 혼란에 사로잡힌 젊은이의 표상으로 보인다. 연애의 이 파국 단계를 보여주는 감독의 연출은 일상적인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다른 공간을 자각하게 하고 그걸 매개로 그들 관계의 비유를 만들어낸다. 그들 연애의 초기 단계에서 윤주는 지수에게 줄 먹거리를 외투 안에 품고 걸어오다가 지수를 거리에서 만나 자랑하듯 꺼낸다. 그들 두 사람은 그 장면에서 아주 행복하게 걷는다. 후반부에선 지수의 집을 찾아온 윤주가 예전에 그랬듯 먹거리를 품속에서 꺼내지만 지수의 반응은 공포영화의 괴물처럼 냉랭하다. 그들은 함께 걷지 않는다. 지수는 먼저 휑하니 발걸음을 옮긴다. 걷는 장면은 다른 상황에서도 되풀이된다. 윤주가 인천에 사는 지수를 찾았을 때 그들 두 사람은 공원을 걷고 윤주는 힘들어한다. 지수는 윤주를 대충 성의 없이 부축해준다. 영화의 거의 끝장면에서 이번에는 지수가 윤주를 찾아와 윤주의 옥탑방까지 따라온다. 계단에서 헐떡거리는 지수를 이번에는 윤주가 마지못해 부축해준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상실감은, 연애에서도 특히 그렇지만 부재감과 차이에서 온다. 애인을 찾아갈 때 전철을 타고 가는 윤주의 표정은 평온한 설렘을 드러내지만 애인에게 거의 버림받고 돌아갈 때 전철에 앉아 있는 윤주의 표정은 텅 빈 막막함을 감추지 못한다. 모텔에 자신을 남겨두고 간 애인에 대한 패배감을 지울 수 없어 그냥 친구 사이인 남자와 술을 마신 후 기습적으로 입맞춤을 시도하다가 거절당하는 윤주의 황망한 감정은 그가 속한 공간, 옥탑방, 다세대 주택, 고만고만한 술집들, 윤기 없는 겨울 밤거리 등에 뼈저리게 새겨진다. 또는 이런 장면도 있다. 지수가 윤주를 찾아와 함께 있자고 조르는 영화의 말미에서 함께 앉기를 거부하는 윤주 옆에 지수가 앉을 때 카메라는 그들의 모습을 정면 클로즈업으로 잡는데 이 숏은 앞서 두 사람의 연애를 뒤통수 클로즈업으로 잡았던 숏과 대구를 이루어 메아리친다.
일상에서 쉽게 경험되지 않는 순간
이런 것들을 통해 <연애담>은 상승되는가 했던 충만한 순간들을 점차 소멸시키고 반복을 통해 점층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인생의 불안에 처한 인물들을 튼튼하게 감싸안는다. 대다수 인간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일상에서 위대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먹고 자고 일하는 행위들은 생존의 단위에 속하지만 그 잉여에서 우리가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다른 충만한 감정들은 쉽게 경험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바로 쉽게 경험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희미한 찬가이자 무미건조한 결핍의 시간들에 대한 격려를 공간에 싣는다. 겉으로 침착한 듯 보이는 이런 시선은 규범에 단단히 결박된 젊음의 억압을 신선하게 제시하는 일련의 장면들을 만들어내는데, 특히 지수가 아버지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김종수가 능숙하게 연기한 지수 아버지는 밥을 아주 맛있게 먹으면서 지수에게 잔소리를 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윤주가 지수를 찾아간 날 때마침 지수의 아버지도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아귀찜을 사들고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들어온다. 세 사람이 어색하게 밥을 먹을 때 지수 아버지의 익숙한 잔소리가 이어지는데 그 와중에 관객의 뇌리에 박히는 것은 지수 아버지가 맛있게 음식을 먹는 소리다. 그는 정말 맛있게 밥을 잘 먹는다. 살기 위해 먹는 그 일상적 행위와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규범의 대비가 이렇듯 무심하게 잘 드러나는 묘사도 흔하지 않다. 이 영화의 끝은 어떤 예측도 불가능한 두 인물의 숏을 보여준다. 그들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들이 그 끝 장면에서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늘 그랬듯이 그들이 익숙한 공간에서 함께, 동시에 따로 있다. 한 사람은 실내에, 한 사람은 바깥에. <연애담>은 연애 감정의 생성과 쇠퇴와 소멸과 소생의 가능성을 축으로 젊은이들의 일상적인 삶을 특이한 촉으로 묘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