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나이의 대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싶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법이다(그 꽃다운 나이에 술 좀 마시겠다고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논외로 치자). 우리가 택한 방법은 새벽에 술을 사서 학교로 올라간 다음, 학교 건물 2층과 맞닿아 있는 경사로에서 대략 50cm를 도약, 홈통을 잡고 발코니로 몸을 던지는 거였다.
그 시간에 술병을 껴안고 문 닫힌 학교로 잠입하는 사람들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 신입생에게는 참으로 신비로운 조화였다. “이렇게 취한 사람들이 한번도 안 떨어지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아니, 안 신기해. 왜냐면… 떨어지거든.” 응? “지난해 여름에는 민철이가 홈통을 껴안고 1층까지 미끄러져서 오른팔 껍데기가 몽땅 벗겨졌고, 그전에는 수철이가 난간을 놓치는 바람에 엉덩이부터 추락….” 그만해, 안 들을래, 술 깬단 말이야.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1m라 했던가. 술도 취했겠다, 6~7m에 불과한 건물 2층 높이 정도는 우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끝이 없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몇달 뒤, 기말고사가 끝나 고삐 풀린 학생들이 술을 퍼마시던 학교 잔디밭에 구급차가 출동했다. 오후 6시2분 전 화장실에 갔다가 6시 정각 경비 아저씨가 문을 잠그는 바람에 (발코니 없는) 시청각 교육 건물에 갇힌 선배가 2층 창문을 부수고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 따뜻한 6월에 그냥 거기서 자고 나오면 될 것을, 너무너무 술을 마시고 싶었던 그는 통유리가 얼마나 비싼지 따위는 망각한 채로 바깥세상을 향해 한발 앞으로 내딛었고… 그대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는 못했지만, 그것도 한달 넘게.
사람이 갇히면 그렇게 술을 마시고 싶어지는 걸까, 당연하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팀 로빈스)가 교도소장의 장부를 조작해주고 받은 대가는 인당 맥주 2병이었는데, 나는 지금껏 그처럼 맛있게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홀리데이>의 대철(이얼)도 식빵을 찢어 변기통에서 발효한 액체를 막걸리랍시고 마신다. 똥통에서 갓 건진 막걸리를 마시느니 탈옥을 하지 싶은데, 과연 그는 탈옥한 첫날 밤 인질네 집밥을 안주로 소주를 마신다. 그래, 안주는 역시 밑반찬이 최고지.
하지만 모든 탈옥수가 술이나 마시자고 2층 창문을 뚫고 뛰쳐나오는 건 아니다. 탈옥수는 왜 탈옥하는가, 시절이 수상하면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교도소로 자진해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들은 왜 구태여 숟가락으로 6년간 땅을 파는 노동을 감수하면서까지(<광복절특사>) 별것 없는 바깥세상을 탐하는가. 탈옥수의 도(道)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탈옥수의 롤모델이라면 역시 <몬테크리스토>의 에드몽 단테(제임스 카비젤)다. 7만2500개의 돌로 지어진(할 일이 없어서 본인이 직접 셌다고) 독방에서 허송세월하던 그는 남쪽(이라고 치자)에서 온 귀인 파리아 신부(리처드 해리스)를 만나 글도 배우고 검술도 익히고 뽕도 따서, 아니 땅도 파서 탈출을 도모하던 끝에 급사한 파리아 신부의 보물지도까지 얻어 탈출에 성공한다. 7만2500개의 돌에 이름까지 붙여줄 정도로 오랜 세월 홀로 땅을 파다가 모처럼 조수 하나 얻나 싶더니 남 좋은 일만 시키고 떠난 파리아 신부에게 애도를.
그렇다, 탈옥수 대부분은 땅을 판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는 손바닥만 한 망치로 땅을 파고 <광복절특사>의 무석(차승원)은 숟가락으로 땅을 판다. 멕시코의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은 땅을 파긴 파되, 엄청난 스케일의 땅굴을 파서 거기로 오토바이를 타고 탈옥했다. 기어나오면 좀더 빨리 나왔을 텐데. 실톱으로 쇠창살을 자르고 탈옥한 신창원도 마지막엔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고 담장 밑으로 기어나와야 했다. 그가 탈옥한 것은 1997년 1월, 땅이 녹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던 걸까, 그럴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다이어트를 했기 때문이다.
신창원은 쇠창살 사이로 빠져나오기 위해 몇달 동안 밥을 조금만 먹어서 몸무게를 20kg이나 줄였다. 1kg 빼는 데는 한달이 걸리지만 1kg 찌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하니, 요요 오기 전에 빨리 나가야 했겠지. 그나저나 신창원은 다이어트를 어떻게 한 걸까. 감옥에선 콩밥 먹는다던데 그래서인가, 나는 끼니때마다 맛없다고 울면서 귀리밥 먹어도 이 모양인데. 귀리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이처럼 탈옥에는 때로 초인적인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필립모리스>의 스티븐(짐 캐리)은 10달 동안 “새 모이만큼” 먹어서 말기 에이즈 환자 수준으로 피골이 상접한 외모를 얻고 탈옥에 성공한다. 그래, 나는 귀리밥을 너무 많이 먹었어.
그나저나 탈옥하면 태반이 도로 잡혀들어가는데 그 많은 죄수가 대책도 없이 일단 나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심지어 미국에선 1959년에 탈옥한 프랭크 프레시워터스라는 사람이 56년 만인 2015년에 체포된 적도 있다. 정부 보조금으로 살던 당시 그의 나이 79살, 이제 노후 대책 완비). 그건 그냥 나오고 싶기 때문이다. 장발장처럼 먹여살릴 가족도 없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갚아야 할 원수도 없으며 앤디처럼 빼돌린 재산도 없는 무석이 구태여 나오는 이유도 그거다. “나와야 하니까.”
택시 기본요금도 없어 네명이 돈을 모아 타던 대학 시절, 시위를 하다가 종로경찰서에 들어간 후배가 차비가 없다며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를 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생활비를 털어 종로에 갔더니 형사들이 낄낄거리며 비아냥거리는 거였다. “애인인가 봐? 내일 나가도 되는 걸 굳이 한밤중에 데리러 오네?” 너, 이 녀석! 할증 걸렸잖아! 후배는 빌었다, 한번만 봐주세요, 거기서 자기 싫었단 말이에요, 징징.
가난한 선배의 생활비를 털지언정 돌아올 곳이 유치장보다 좁은 고시원 쪽방일지언정 하룻밤이라도 보내기 싫은 곳이 유치장이고 창살 안이다. 바깥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다가 그렇게 싫다는 유치장에 들어간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홀리데이>의 새마을조합장처럼 사식으로 치킨이라도 뜯고 있지 않을까 싶다.
탈옥에도 돈이 필요해
흠잡을 데 없는 탈옥을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한자성어
진인사 대천명
<거룩한 계보>는 집단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답게 여러 가지 과학적 탈옥 방법을 동원한다. 면회 온 사람이 교도소 배관도를 티셔츠에 그려 입는다든가(카메라 같다는 <탐정학원 Q> 수준의 기억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음) 정보원을 통해 교도소 건축 자재의 비밀을 밝힌다든가(아무리 부실 공사라 해도 사람보다는 돌이 세다는 교훈만 얻게 됨)하는. 하지만 결국엔 금이 간 돌벽이 무너지니, 아무리 비행기가 추락해 교도소 지반이 뒤흔들린다 해도 벽에 금이 가 있지 않았더라면 그 벽은 무너지지 않았을 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유비무환
역시 집단으로 탈출한 <홀리데이>의 죄수들은 전부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초범에 경범에 미수범에… 근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전부 제 손으로 수갑을 따고 탈옥하는 걸까요? 언젠가 지강혁(이성재)이 나타나 탈옥의 기회를 내릴 거라 믿고 평소 열심히 기술을 갈고닦았을 거라 믿을 수밖에. 그래서 교도소를 학교라고 하나 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영화 속의 탈옥수들은 대부분 몸으로 때워 땅을 판다거나 살을 빼지만 현실에서 가장 애용되는 탈옥 장비는 헬기다. 나딘 보주르는 헬기를 타고 파리 감옥에 갇힌 남편을 탈옥시켰고, 벨기에와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헬기를 하루 빌리려면 연료비 포함해 도대체 얼마나 드는 걸까? 참고로 나는 헬기 15분 타면서 8만원 냈다. 남편이 살인 누명 쓰고 수감된 아내를 탈옥시키는 <쓰리 데이즈>에서도 탈옥의 멘토는 말한다, 돈은 많을수록 좋아. 지강혁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며 탈옥했지만, 탈옥하는 데도 돈이 필요하니, 돈 있는 자나 죄를 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