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덜 알려진 작품을 각색한 <레이디 수잔>은 도덕적으로 흠결 있는 여성이 벌 받지 않은 채 목표를 이루는 이야기다. 남편과 사별한 궁핍한 귀족 부인 수잔(케이트 베킨세일)은 낭만적 연애와 결혼 따위 일축하고, 오로지 본인과 딸의 여생 보장을 유일한 기준으로 남자들을 대한다. 툭하면 내쫓겠다는 남편의 으름장을 받는 미국 출신 알리시아(클로에 셰비니)는, 수잔과 잘 통하는 벗. 남자들을 저울질하는 작전이 탄로나자 두 여인은 개탄하며 혀를 찬다. “우리야 그래도 되지만 남의 사적인 편지를 훔쳐보다니 무슨 비신사적인 짓이래요?” 어차피 여성의 동등한 생존 경쟁 기회가 차단된 사회에서 그녀들이 믿는 공정한 게임의 법칙은 따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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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에타>에는 독특한 조연 캐릭터가 있다(써놓고 보니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에선 평범한 조역을 찾는 편이 빠르긴 하다). 주인공 줄리에타(에마 수아레스)와 재혼하기 전부터 남편 소안의 살림을 돌봐온 가정부 마리안(로시 드 팔마)이다. 피고용인의 입장이지만 마리안은 집안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이리저리 흘림으로써 식구들의 숙명을 한 계단 높은 자리에서 좌지우지한다. 모양이 다른 그녀의 두눈은 한쪽으로는 일상을, 한쪽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보고 있는 듯하다. 흡사 <레베카>에 등장하는 덴버 부인과 같은 캐릭터다. 그러고보면 느슨한 3장으로 이루어진 <줄리에타>는, 세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되는 히치콕식 미스터리 스릴러이기도 하다. 줄리에타는 각기 다른 시기에 하룻밤 연인, 아버지, 딸로부터 날아든 편지를 받고 예상치 못한 경로로 삶의 핸들을 꺾는다.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과 시작하는 밀애도 히치콕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과 여러모로 닮은 데가 있고, 알모도바르의 오랜 파트너인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의 음악마저 이번에는 버나드 허먼풍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줄리에타>의 이야기에 숨은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과 질투와 배신에 흔들리며 살아남은 줄리에타는 본인의 운명이 누군가가 기획한 범죄 같다고 느낄 뿐이다. 게다가 줄리에타는 신화와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여성이다. 그녀가 본인의 삶을 미스터리 소설처럼 읽는다 해도 놀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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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 롤링이 직접 각본가로 데뷔한 <신비한 동물사전>에는 작가의 최대 장단점이 그대로 살아 있다. 롤링은 상상의 우주를 세부까지 면밀히 구축하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키텍트’다. 그러나 플롯과 내러티브를 효율적으로 결합해 결말까지 달려가는 스토리텔러는 아니다. <신비한 동물사전>에는 크게 두 갈래 이야기가 진행된다. 뉴욕 체류 중 실수로 놓친 마법의 동물을 안전하게 되찾으려는 영국 마법사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의 모험이 하나고, 볼드모트 이전의 강력한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를 중심에 둔 거대 서사가 배경에 흘러간다. 두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에 5부작의 첫편인 <신비한 동물사전>은 챙길 게 너무 많다.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은 뉴트를 비롯한 새로운 4총사 캐릭터를 소개하고 제목에 충실하도록 신비한 동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생태와 특성을 브리핑해야만 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11살 소년의 밝고 신나는 모험으로 시작해 점점 어두워졌다면,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불안한 사회 공기를 숨쉬며 시작하는 <신비한 동물사전>은 첫편부터 꽤 어둡고 치열하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대립하는 진영이 지팡이 전투를 벌이는 톤은 전편 시리즈 가운데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의 그것에 가깝다.
<해리 포터> 연작에서 유년의 발견과 10대의 성장이 차지하던 자리에 대신 강화된 요소는 정치적 알레고리다. 지금까지도 J. K. 롤링의 마법세계는 언제나 우파 이데올로기를 경계하고 관용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해리 포터> 7부작(영화는 8부작)에서 머글 혈통의 뛰어난 마녀 헤르미온느는 작가의 분신으로서 집 요정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반지성주의와 싸우는 캐릭터였다. 이질적 존재들의 평화롭고 호혜적인 공존은 <신비한 동물사전>에서도 여전히 중대한 메시지다. 당장 무용하거나 위험하다고 숲을 밀어버리고 특정 종을 절멸시킬 때 우리가 죽이는 것들 가운데에는 미래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힘이 포함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경주의가 뉴트의 언행으로 강조된다(제거될 뻔했던 뉴트의 마법동물이 결국 미국 마법사 사회와 뉴욕 시민을 파멸로부터 구한다). 이 영화에서 신비동물은 디지털 스펙터클로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법세계 피라미드의 최하층, 공동체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생명권을 무시당하고 쉽게 착취되는 존재로 제시된다. 이것이 앞서 쓴 <신비한 동물사전>의 두 갈래 스토리- 동물구조와 정치적 갈등- 가 만나는 지점이며, 영화에서는 ‘옵스큐러스’라는 예외적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다. 원작에 해당되는 책 <신비한 동물사전>에 수록돼 있지 않은 이 존재는, 생물이지만 형체와 정해진 속성이 없다. “하얀 눈이 달린 검은 바람”이라고 묘사될 뿐이다. 이름 그대로 모호하고 어두침침하다. 뉴트가 도착하기 전부터 돌개바람의 모습으로 뉴욕시를 헤집어놓는 옵스큐러스는, 차별의 공포 때문에 정체성을 스스로 억압한 어린 마법사와 마녀의 내면에서 생성되며 파괴적으로 증폭된다. 요컨대 이 위협의 뿌리는 특정 그룹에 대한 발언권의 박탈과 부당한 처우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종주의와 불관용이다. 한데 J. K. 롤링은 구태여 옵스큐러스를 추상적인 에너지가 아닌 일종의 동물(beast)로 설정했고 영화는 옵스큐러스의 시점숏을 여러 번 넣어 이 노선을 뒷받침한다. 왜? 이 선택의 결과로서, 옵스큐러스의 숙주(옵스큐리얼)인 마법사와 마녀들은 악역이 아니라 1차 희생자로 정의된다. 심지어 옵스큐러스조차 순치되면 마법사회와 공존할 가능성이 열린다. <신비한 동물사전>의 클라이맥스는 옵스큐러스에 대응하는 태도를 통해 뉴트와 그린델왈드, 그리고 노마지들에 대한 공포로 관료주의화한 미국 마법의회(MACUSA)의 입장 차이를 정리한다. 먼저 무력 혁명을 꿈꾸는 그린델왈드는 옵스큐러스의 물리력을 무기로 이용하고자 한다. 뉴트는 마법계의 그린피스답게 옵스큐러스마저 살리려고 한다. 뉴트가 보기에 가장 위험한 동물은 옵스큐러스가 아니라 휴먼이다. 반면 뉴트와 그린델왈드가 옵스큐러스와 옵스큐리얼을 설복하는 현장에 도착한 미국 마법사 정부쪽은 즉각 발포를 명한다. 그린델왈드와 관료주의화한 통제 정부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가? 실상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이미지 중 하나는 미국 마법부의 사형 집행실 풍경이다. 안보 위협 제거를 금과옥조로 삼는 통치자들은 재판 없이 사형을 선고하고, 실무 관리들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평정한 태도로 피의자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적어도 1편의 서사에서 분명한 것은 J. K. 롤링은 특정 진영이 선이나 악을 독점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어둠의 힘 역시 누구에게나 흘러드는 무엇, 없앨 수는 없으나 지성과 연민에 의해 관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묘사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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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레슨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스승과 제자의 피아노 수업이 줄곧 등장한다. 아버지의 수상한 부동산 사업을 거들며 생활하던 토마스(로맹 뒤리)는 어느 날 불현듯 피아니스트 어머니가 물려준 재능을 시험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고, 파리로 온 지 얼마 안 되는 중국계 피아니스트 미아오(린당팜)에게 레슨을 시작한다. “과연 가능할까?”라는 우리의 의구심이 무색하게 수업은 순조롭다. 토마스는 미아오의 표정, 페달과 악상기호를 쓴 짤막한 지시, 어깨를 적당히 교정해주는 손끝 그리고 “네가 이렇게 치고 있다”고 들려주는 시연을 능동적으로 종합해 발전해 간다. 갈등이 폭발한 어느 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미아오의 뜻모를 중국어는 망나니 제자를 단숨에 제압하기도 한다(까막귀에 들리는 중국 여성들의 꾸지람에는 저항하기 힘든 권위가 있다). 음악이 아니래도 이런 교육이 가능할까? 어려울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