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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딜쿠샤> 김태영 감독
2016-12-01
사진 : 오계옥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고백하자면 김태영 감독과의 인터뷰를 결심한 건 1980년대에 만든 그의 첫 영화 때문이었다. 그는 <칸트씨의 발표회>(1987), <황무지>(1988) 등 독립영화의 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을 만들었다. 전작의 무거운 현실과 <딜쿠샤>의 가벼운 몽상 사이에 놓인 무수한 간극이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그는 <세계영화기행> 등 다수의 방송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잔뼈 굵은 연출가이자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등 실험적인 대작의 손 큰 제작자였다. 그러다 미완으로 남은 비운의 뮤지컬영화 <미스터 레이디>의 실패 이후 뇌출혈과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몸의 반쪽이 마비되는 장애를 안게 되었다. <딜쿠샤>는 어쩌면 영화를 둘러싼 그의 모든 삶이 녹아든,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대작이다. 그의 삶 자체가 곧 드라마인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욕심내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함께 엮어 들려준다. 최종적으로는 서울의 몇몇 장소와 사람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몽상-유랑기로 보이는 영화의 탄생에 관해 물었다.

-촬영하던 중 쓰러지기도 했는데 건강은 어떤가.

=택시에서 내리는데 별안간 몸이 펴지질 않았다. 구부정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겨우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우려는데 누워지지 않는 거다. 결국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9시간 동안 온갖 검사를 받았다. 뇌출혈 증상이 재발한 것이 아닌가, 이러다 영화를 완성도 못하고 죽는 건 아닌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히 근육강직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두달간 추운 날 바깥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있다보니 피가 돌지 않은 거다.

-최초의 구상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진행되어왔나.

=가장 쉬운 것이 뭘까 생각하다가 ‘내 이야기를 하자. 형태는 모르겠지만, 이를 딜쿠샤와 엮여보자’고 생각했다. 각본을 대강 써서 2013년 광복절에 맞춰 크랭크인했다. 보통 방송다큐멘터리 제작 기간이 8∼9개월이니 2014년 말에는 개봉하리라 예상했는데 오판이었다. 내심 해외 진출까지 기대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도 떨어졌다. ‘뭔가 영화적인 매력이 있어야 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아예 새로운 장면을 더해 추가 촬영했다. 총각인 나의 얄팍한 상상을 현실화한 촬영분은 여러 가지 중 하나는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제외했다.

-딜쿠샤를 제목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항일운동을 도운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건물인 딜쿠샤는 그가 추방당한 뒤 일본인이 사용했던 적산가옥이다. 이후 권리를 주장한 사람이 세를 놓았고 총 18가구 중 15가구가 살고 있었다. 트로트 가수를 꿈꾸는 ‘억순이’ 김정옥씨의 경우도 그렇고 과거에는 잘살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주로 온다. 나는 2006년에 딜쿠샤를 중심으로 <아버지의 나라>라는 삼일절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워낙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특이한 건물에 가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해 딜쿠샤의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도 앉아 있곤 했다. 딜쿠샤를 최종 제목으로 정한 것은 행복한 마음, 기쁨, 이상향을 뜻하는 이 단어가 마음속 희망의 궁전을 담기에 가장 좋겠다 싶었다. 내가 원래 갖다붙이기를 잘한다. (웃음) 직접 내레이션을 할 수도 있었는데 전문 성우에게 맡겼다. 성우 내레이션을 주변에선 모두 반대했다. 내가 내레이션을 해야 진정성이 있다는 거다. 진정성은 개뿔! 내겐 진정성보다 관객이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내가 내 이야기를 하면 관객이 보는 것도 힘들다. 쉽고 유머러스하고 전달력 있게 표현하기에는 전문 성우가 붙는 게 맞다. 관객과 소통하려고 만든 영화이지 개인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 조명남 감독과 함께 만든 미완의 영화 <미스터 레이디>의 촬영분이 영화에 삽입되면서 공개되지 못한 영화의 한을 일부 풀어준다는 느낌도 받았다.

=진오귀굿이라고 하지 않나. 조명남 감독과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서 처음 만났다. 실향민의 외아들이라는 공통점도 있었고 죽이 잘 맞아 형제처럼 붙어다녔다. <미스터 레이디>가 엎어지고 <대도 송학수>라는 작품으로 함께 재기를 시도하던 무렵 대장암 3~4기 진단을 받았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3일 내내 울었다. 병원에서는 더이상 쓸 약이 없다고 말했고, 당시 암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이었던 나는 조명남 감독에게 투여하는 조건으로 한 병원에서 임상시험을 거친 약을 무상 제공받았다. 투약 6개월 동안은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생계가 힘들었던 그는 벌이를 해야만 했고 <대한민국 1%> 계약 후 목돈을 받아 촬영을 시작했다. 100배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현장이기에 결국 촬영 3개월 만에 암세포가 온몸에 전이됐다. <딜쿠샤>에 삽입된 현장 장면은 그가 곧 죽을 것만 같아 찍어놓았던 것이다. 우리 둘 다 쿠바를 좋아했기에 함께 쿠바에 가자고 말한 이틀 후 세상을 떠났다. 이웃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의미 외에, <미스터 레이디>를 하나의 줄기로 녹이며 조명남 감독에게 바치는 의미를 더했다.

-<칸트씨의 발표회> <황무지> 등 사회 비판, 현실 참여적인 독립영화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검열로 인해 우회적인 표현이 필요했다면, <딜쿠샤>에서는 꿈과 판타지를 적극적으로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삶에 대한 변화,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는 분명히 있을 거다.

=<칸트씨의 발표회>에서 칸트는 의문사하는데 당시 의문사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 잘못된 나라의 잘못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당시 서강대 김의기 학생의 죽음에 영향을 받아 사건을 극대화하기 위해 장소를 망월동 묘지로 바꾸어 영화를 만들었다. 이번 영화에도 사회 비판을 담을 수는 있었겠지만,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중간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지금의 톤이 가장 적절하지 않나 싶다. 고종을 끌어들인 이유는 내가 구한말부터 대한제국까지의 격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지만, 사회 비판의 의미를 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고종의 대사 중 안중근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중근은 대한의 얼굴’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 대한민국의 얼굴은 세월호 아이들의 얼굴이 아닌가 생각했다. ‘백성이 나라의 힘이다’라는 말 속에 그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으려 했다.

-아버지의 무덤에서 기대 울면서 “아버지, 무서워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칸트씨의 발표회>와 <황무지>를 직접 인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듣고 보니 이제야 ‘그랬구나’ 싶다. 삶이 정말 무섭다. 내가 어떻게 살지, 죽을지 알 수 없다. 그 대사는 나올 수 없는 대사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미안해요’, ‘보고 싶어요’는 해도 ‘무서워요’라는 말은 잘 안 하지 않나. 그 장면에서 마치 아버지가 옆에 누운 것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원래 눈물이 많다. 뉴스나 영화를 보다가도 많이 운다. 눈물샘이 사라진 것도 너무 많이 울어서인 것 같다. 평소에는 눈물을 많이 흘리는데 막상 우는 장면을 찍으려니 눈물이 잘 안 나와 애를 먹었다.

-<송 포 유> <아무르> 등 노년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에 감응한 것처럼 보였다.

=좋아하는 작품인데 두 작품의 끝이 다르다. <아무르>는 아파하는 아내를 죽이는 것이고, <송 포 유>는 죽은 아내를 위한 노래를 부르는 행복한 결말이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믿지만, 앞날이 깜깜한 절벽처럼 무서울때도 있다. 내가 여기서 끝나면 어떡하나, 쫄딱 망하면 어떡하나, 특히 가족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이 상태에서 망하면 누가 임종을 맞아줄까 굉장히 궁금하다. 내가 여자에 관한 몽상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에서 실제로 든 생각은 ‘뛰어내려, 말아?’였다. 이후 다리를 뻗을 수 없는 고시원에서 13개월을 살면서, 자리에 누울 때마다 이대로 아침에 안 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내가 건조대에 세탁물을 너는 마지막 장면에서 어두운 세탁물을 전면에 배치해 화면의 반을 채우도록 한 이유도 이렇게 앞날은 깜깜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동시에 담으려 했다.

-<황무지>를 만든 뒤 파산하고, <미스터 레이디>를 제작하다 건강까지 잃었다. 왜 다시 영화인가.

=영화 만드는 것이 가장 재미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로 담긴다면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공한 이야기만 있다면 재미없지 않겠나. 관객이 ‘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딜쿠샤>를 보고 내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좋겠다. 인생은 아름다운 것 같다. 몸 반쪽은 못 쓰지만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돈만 좀 있다면 좋겠다. (웃음) 지인에게 진 빚만 13억원이다. 나중엔 ‘앵벌이’ 안 하고 베풀며 사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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