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원의 영화와 건축]
[윤웅원의 영화와 건축] 개별작품보다 필모그래피 전체로 읽히는 홍상수의 세계와 다운스뷰 공원 프로젝트
2016-12-01
글 : 윤웅원 (건축가)
다운스뷰 공원 투시도.

2000년에 캐나다 토론토의 공군 비행장 부지를 이용해서 공원을 만드는 현상설계가 진행되었다. 렘 콜하스는 이 현상설계에 공원설계 계획안을 제안한다. 수많은 원과 선으로 구성된 그의 다운스뷰 공원(Downsview Park) 프로젝트는 ‘나무 도시’(Tree City)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배치도의 원들은 작은 숲을, 선들은 산책과 운동을 할 수 있는 길을 의미한다. 렘 콜하스는 이 길들을 ‘교차하는 1천개의 오솔길’이라고 명명했다. 자연을 인공적으로 재단하여 사용하는 서구식 정원의 전통 안에 있는 이 프로젝트는, 도시에서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길과 교차점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프로젝트이다. 아마도 그것이 프로젝트 이름을 ‘나무 도시’로 붙인 이유일 것이다.

최근에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면 끝없이 교차하는 길들을 보고 있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지금’ 아닌 ‘지금’과 ‘여기’ 아닌 ‘여기’에도 반복될 것 같은 상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운스뷰 공원 배치도.

‘거리’의 의미

개별적인 영화보다는 자신의 영화 전체로 읽히는 감독들이 있다. 오즈 야스지로가 나에게 그러한 감독 중 하나이다. 영화를 보고난 후 시간이 지나서 더욱 그렇겠지만, 그의 영화는 각 영화의 서사가 아니라 전체적인 느낌으로 더 기억된다. 홍상수의 영화도 그 점이 더욱 강화되는데, 그것은 마치 현실은 서사가 아니라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술의 순위를 매긴다면 건축이 제일 아래에 위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최상의 위치는 음악이며, 다음이 미술, 문학이 세 번째이고, 건축이 제일 아래 위치한다. 이 이야기의 논점은 ‘영감’이 결과물로 나오는 시간(거리)에 따라 순위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음악이 마음속에 떠오른 느낌을 즉각적으로 악기나 악보로 표현해낼 수 있는 반면, 건축은 다양한 협력 분야의 검증을 통해서만 그 타당성이 완성되어진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어쩔 수 없이 원래의 ‘영감’은 더 오염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논점이다. ‘영감’ 같은 단어가 오늘날의 예술작품에 어울리는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창작 작업에서 ‘거리’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홍상수의 아침대본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나리오를 영화가 찍히는 장소에서 바로바로 그날 아침에 쓴다는 것은 상황에 더욱 반응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김혜리 기자의 인터뷰로부터 홍상수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것은 ‘지금 앞의 그 작은 것에서 모든 것의 진동과 냄새를 느끼려 하는 것’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포르투갈의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독일 베를린의 공동주택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경험에 대해서 쓴 글에서, 시자는 베를린의 공사 중인 건물에 들어가서 즉흥적으로 설계 변경을 시도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이라면 허용되었을 이러한 관행이 독일에서는 소란을 만들어냈다고 하는데, 현장감독은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 시자의 행동에 대해서 항의를 하게 된다. 설계 도면을 납품하면 공사현장의 감리(감독)는 다른 건축가의 몫이 된다.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사회일수록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홍상수의 ‘지금 앞의 그 작은 것에서 모든 것의 진동과 냄새를 느끼려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인용하고, 전쟁터 같은 극한의 상태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그것에 가장 가까운 감정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는 연애의 감정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주인공 남녀의 연애 감정에 관한 장면 중에서 특히, 2부의 골목길 장면은 인상적이다. 함춘수(정재영)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윤희정(김민희)은 골목길에서 엄마(윤여정)의 전화를 받고 잠시 멈추고, 이어서 함춘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어둠 속의 가로등 불빛은 두 남녀를 주위로부터 분리시키고, 말할 때마다 길게 뻗어나오는 입김을 통해서 추운 밤거리가 드러난다. 두 남녀의 연애 감정이 어떤 장소와 시간을 만났을 때 생겨나는 공기 중의 진동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느닷없이 자전거를 탄 남자가 지나간다. 이 남자는 스쳐 지나가며 윤희정과 짧게 인사를 나눈다. 관습적인 연애 장면을 흐트러트리는 이 낯선 개입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서 존재하는 현실의 순간을 잡아내고 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공간적인 특징은 ‘방’이다. 영화의 장소를 나열해보면, 행궁 복내당, 커피숍, 작업실, 스시집, 스시집 앞, 카페 시인과농부, 주택지 골목길,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순이다. 이 모든 공간이 방은 아니지만, 영화는 조명과 카메라의 사용을 통해서 이 장소들에 방의 성격을 갖게 하고 있다. 서울을 ‘방들의 도시’로 보는 생각은 잘 알려져 있는 개념이다. 노래방, 비디오방 등과 같이 다수가 이용하는 공공적인 영역도 개별적으로 분리된 방의 형태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광장의 문화보다는 친분을 바탕으로 한 관계에 익숙한 문화가 만들어낸 현상일 것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공간들이 더욱 방의 성격으로 보이는 이유는 영화가 함춘수와 윤희정의 연애 감정에 몰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모든 장소는 그들을 둘러싼 작은 방이 된다. 우리는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을 때에만 사랑하려는 순간의 공기의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

파크원 빌리지 단지 계획.

같은 길을 반복한다는 것

홍상수의 영화에서 서사를 대체하는 것은 구조이다. 이 구조의 대부분은 잡히지 않는 세상을 잡으려는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세상에 벌어진 일을 엮어내는 것이 서사라면, 벌어진 일들의 질서를 드러내는 것이 구조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주인공 헌준(김태우)은 아무런 설명 없이 영화의 중반에 사라진다. 문자 그대로 영화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문호(유지태)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서 동일한 하루를 반복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은 마치 같은 길을 반복하는 우리의 삶은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홍상수의 영화는 서사 대신 구조로 더 잘 기억된다.

렘 콜하스의 다운스뷰 공원 프로젝트와 유사하게 원을 사용한 프로젝트가 또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파크윈 빌리지 주거 단지 계획(Parkwyn Village Site Plan)이다. 프로그램이 달라서이겠지만, 형태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단지 계획은 렘 콜하스의 공원 계획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다운스뷰 공원의 원이 숲이고, 원과 원 사이의 공간에서 길들이 교차한다면, 라이트의 계획 안에서 숲이 되는 것은 원의 경계가 만나는 사이공간이다. 그리고 원 내부는 개인들의 배타적인 장소가 된다. 렘 콜하스의 계획이 ‘길의 도시’라면 라이트의 안은 ‘방들의 도시’에 가깝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극장을 나온 윤희정이 눈 쌓인 거리를 걸어서 길모퉁이로 사라지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그녀는 그렇게 극장을 나와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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