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내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직원들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구나. (사람인데) 개미처럼 일하는 직원들을 보고 싶었던 그는 심리검사를 통해 그들의 약점을 찾고 장점을 보완함으로써 동일한 월급으로 최대 노동 효과를 창출하는 창조 사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심리검사센터에 천만원이 넘는 돈을 상납했다…. 그 돈으로 월급을 올려주면 직원들이 열심히 일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이것이 사장의 본능.
(개미처럼 일할 시간에) 설문지를 작성하고 며칠이 지난 다음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성명 김정원, 직급 과장, 사회성 5%, 체계성 4%, 개념성(아이디어가 풍부하고 공상을 즐기며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84%…. 오차 범위가 ±5%라고 치면 나의 사회성은 0%, 체계성은 마이너스구나.
어쨌든 그러니까 사장은 책상이 쓰레기로 파묻혀 전화기를 찾으려면 삽을 들고 발굴해야 하고, 업무 시간의 반을 딴생각으로 보내며, 그가 쉰여섯 평생 들은 것보다 많은 말대답을 고작 2년 사이 퍼부어댄 직원 김정원씨의 체계성과 사회성이 심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자 천만원을 쓴 것이었다.
그래도 사장은 뿌듯했다. “내가 옛날부터 김정원 문제 많다고 그랬잖아, 사장 노릇 10년이면 사람 보는 데는 전문가라니까!” 그럼 네가 하지 그랬어, 심리검사. 천만원도 아끼고. 아님 나한테 100만원만 내면 내가 얼마나 문제 많은 인간인지 구구절절 2박3일 읊어줄 텐데, 덤으로 다른 직원들 욕도.
자기가 이따위 직원을 뽑았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신이 난 사장과 다르게 나는 매우 착잡했다. 이 회사 저 회사 떠돌며 부평초처럼 살아온 십몇년 세월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첫 번째 회사에서 만난 직장 동료와 술을 마시며 충격적인 심리검사 결과를 털어놓았다. “내가 그렇게 사회성이 부족해서 2년 이상 다닌 회사가 두 군데밖에 없나 봐.”(이렇게 쓰고 보니 새삼 충격적이다.)
동료는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 차라리 지능검사를 하지 그랬어,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이어서 그는 한탄했다. “내가 그렇게 얘기했잖아, 너 왕따라고.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미안, 내가 개념성(아이디어가 풍부하고 공상을 즐기며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84%의 인간이라.
그래, 내 운명의 별은 왕따, 내가 사회성 5%를 달성하기로 마음먹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남의 말이 들려도 듣지 않고자 정신을 통일하며, 얄미운 짓만 골라하기 위해 밤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밉상이 될 수 있을까 고민과 학습을 거듭한 건 아니야, 그저 타고났을 뿐. <방과후 옥상>의 남궁달(봉태규)이 그렇듯, 나의 운명이 나의 죄다.
왕따들을 위한 재활원에서도 왕따를 당하는 왕중왕 남궁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운이 굴러들어오는데 그 모든 불운이 왕따를 당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집중과 선택의 인생이다. 전학 간 첫날, 수백명의 학생 중에서 무작위로 하나 골라 시비 붙은 녀석이 학교 짱, 공무원 시험 합격률 못지않게 희박한 확률을 뚫고 왕따 인생 예약. 안 되는 놈은 뭘 해도 안되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옛말을 보란 듯이 무력화한다.
<우리들>의 지아(설혜인) 또한 마찬가지다. 왕따에서 벗어나고자 전학을 왔더니 운명처럼 조우한 첫 번째 아이가 그 반 최고의 왕따, 왕따끼리 단짝이 된 것만 해도 11살 인생이 심란한데 여기에 눈치 없는 할머니 가세, 왕따로 살았던 과거를 폭로하니, 이는 자기가 칼날을 쥐고 적에게 칼자루를 건네는 형국이랄까. 그리하여 왕따끼리 드잡이를 하며 싸우다가 그 반엔 왕따가 한명에서 두명으로 증식하기에 이른다.
그러고 보니 내가 드물게나마 누군가와 놀 때면 언제나 둘이었던 게 그래서였구나, 왕따끼리 노는 거. 어쩌다 셋이 놀 때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왕따 셋이 만났던 거지. 넷은 없어, 왕따 넷은 모으기도 어렵고 찾기도 어렵거든.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는 따돌림당하는 왕따지 괴롭힘당하는 왕따는 아니라는 정도? <구타유발자들>의 현재(김시후)처럼 기절할 때까지 술을 들이붓고 깨어날 때까지 맞는다거나 봉연(이문식)처럼 XX 만짐을 당하던 끝에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지경에까지 몰리지는 않았으니까. (기껏 찾아낸 위안이라는 것이 참으로 구차하다.) 아니, 뭐, 누가 나를 괴롭히는데도 그걸 몰랐을 수는 있겠지만. 남의 말이 잘 안 들리더라고.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는 따돌림당하는 왕따지 괴롭힘당하는 왕따는 아니라는 정도? <구타유발자들>의 현재(김시후)처럼 기절할 때까지 술을 들이붓고 깨어날 때까지 맞는다거나 봉연(이문식)처럼 XX 만짐을 당하던 끝에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지경에까지 몰리지는 않았으니까. (기껏 찾아낸 위안이라는 것이 참으로 구차하다.) 아니, 뭐, 누가 나를 괴롭히는데도 그걸 몰랐을 수는 있겠지만. 남의 말이 잘 안 들리더라고.
이쯤에서 다시 동료와의 대화로 돌아가보자. 그의 분석에 의하면 나는 뭔가를 해서 문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 문제인 캐릭터라고 한다. 나는 분개했다. 그게 뭐 어때서! 착한 일도 안 하고 나쁜 짓도 안 하잖아! “넌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거야. 인간답지가 않다고.” 이게 무슨 헛소리… 인 줄로만 알았지, 얼마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비인간적 표본을 날마다 보고 있으려니 사회성 상승의 욕구가 불타오르는 요즘이다. 저런 인간은 되기 싫다고. 아, 인간 아니랬지.
오감으로 기억하는 왕따의 원한
왕따의 별 아래 태어난 자들을 굽어살피는 두세 가지 은총
왕따의 탄성력
많은 왕따가 전학과 졸업을 꿈꾸지만 그것은 한낱 봄날의 헛된 꿈, 어른이 돼도 왕따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삶의 진리를 보여주는 산증인이 <러브 앤 피스>의 료이치(하세가와 히로키)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 한번은 변신을 하지. 소원 들어주는 약을 먹은 거북이가 소원을 들어줘서 (오타처럼 보이겠지만 영화 내용이 이렇다) 스타 가수가 된 료이치는 순식간에 정상인의 허물을 벗고 단 한순간도 왕따 아닌 적이 없었던 것처럼 본래 모습으로 회귀하는 놀라운 탄성력을 과시한다. 온 우주가 너의 왕따를 기원하고 있어.
왕따의 생명력
<구타유발자들>의 봉연은 옥상에서 투신해 머리부터 땅바닥에 박고도 무사히 살아남아 이제는 어엿하게 왕따를 주도하는 성공한 왕따가 됐다. 같은 동네 사는 오근(오달수)은 군대에서 왕따를 당하다가 야구방망이로 죽도록 두들겨 맞고도 살아남아 이제는 사회에 나와 왕따에 협조하고 있다. 역시 같은 동네 사는 현재는 기묘하게도 또래가 아니라 어른들에게 왕따를 당하면서 영화 상영 도중 두번이나 사망 진단을 받지만 역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왕따 별은 장수 별.
왕따의 기억력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발 뻗고 못 잔다는건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나 떠드는 소리지, 맞은 기억이 자꾸 떠올라 꿈에서 한번 더 재연이나 안 되면 다행이겠다. <방과후 옥상>의 남궁달은 전학과 동시에 정상인의 가면을 장착한 왕따 동지 연성(진태현)을 만나 그의 수치스러운 과거는 물론 방귀 냄새까지 기억해낸다. 오감으로 기억하는 왕따의 원한, 서리는 내리지 못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