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세편 모두 깔끔하게 말아먹었는데? (웃음)” 오랜만에 인터뷰를 요청하자 권해효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세편의 성적이 저조하다며 쑥스러워했다. <스플릿>(11월9일),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11월10일), <가려진 시간>(11월16일) 등 지난 11월, 한주 간격으로 무려 세편의 개봉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던 그다. 권해효가 던진 농에는 짙은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세 영화 모두 개성 있는 작품이라 좀더 많은 관객을 만날 자격이 있는데 여러 이유 때문에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못한 데서 비롯된 아쉬움 말이다. 또 그는 지난 12월1일 CGV압구정에서 열린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2016에서 류시현과 함께 개막식을 진행했다. 개막식 마이크를 잡은 게 올해로 16년째. 그는 “지난 16년 동안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위원장이 8명이나 바뀌었다. 이번에 조영각 집행위원장이 그만둔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를 ‘제쳤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아쉬워했다. 몽당연필(재일 조선학교를 돕고 있는 모임으로, 권해효는 이곳에서 5년째 활동하고 있다)이 운영하고 있는 카페에서 오랜만에 권해효를 만났다.
-오전에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청문회 봤나.
=보다가 아주… 오찬 때문에 정회를 한다는데 재벌들이 2시간 동안 밥을 먹어? (웃음)
-올해도 서독제 개막식 사회를 보았는데.
=서독제 전신인 한국독립단편영화제 때부터 개막식 마이크를 잡았으니 올해로 16년째다. 2002년 서울독립영화제로 전환된 뒤로는 13년째 사회를 보고 있고. 그사이 이현승 집행대행을 포함해 영진위원장이 8번(유길촌, 이충직, 안정숙, 강한섭, 조희문, 김의석, 김세훈) 바뀌었다.
-올해도 영화제에 먼저 연락해 개막식 일정을 확인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나이가 들면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도 한다. 하지만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는 독립영화 최고의 축제에서 “어서 오세요” 하며 손님을 반갑게 맞아줄 수 있는 선배도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는 사람들에게 ‘뭘 하지 마라’든가 ‘뭘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다. 40 먹은 사람도 결혼식 사회를 보지 말라는 법은 없잖나. (웃음)
-18년 동안 영화제를 이끌어온 조영각 위원장이 ‘자진 하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니 어땠나.
=1999년 <EBS 단편영화극장>을 진행했다. 당시 조영각 위원장이 그 프로그램의 구성작가였다. 그때 그를 처음 만났다. 그가 2002년 서독제 개막식 사회를 봐달라고 요청해왔고, 그 일로 서독제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12월9일 서독제 폐막식을 끝으로 집행위원장을 그만두는 조영각에게 그동안 애썼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그가 그만둔다니 만감이 교차한다. 아직 실감도 안 나고. 조영각 덕분에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얼마 전 출연한 영화가 한주 간격으로 무려 세편이나 극장에 걸렸다.
=모두 아쉽다. 아니, <스플릿>은 흥행이 아주 나쁘지 않았다.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관객을 불러모았을 텐데.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다른나라에서>(2011) 이후 5년 만에 작업한 홍상수 감독 작품이다.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홍상수 감독은 어떤 이야기를 어떤 날짜에 찍겠다고 혼자서 결심을 한 뒤, 그 날짜가 다가오면 뜬금없이 전화를 해와서 시간이 되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 <다른나라에서>로 처음 작업한 뒤 이번 영화로 다시 만나기 전까지 일정이 안 맞는 경우가 좀 있었다가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 출연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다시 만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네.
-이번 영화에서 맡은 박재영은….
=(질문 도중에) 아, 배역 이름이 박재영? (웃음) 이름이 딱 한번 나온다. 민정(이유영)과 상원(유준상)의 술자리에 불쑥 끼어드는 영화의 후반부, 상원과 티격태격하다가 상원이 “네가 재영이야?”라고 묻는 장면이지? 우리(배우)는 배역 이름을 잘 모를 수 있지. (웃음)
-촬영 전, 홍상수 감독이 재영에 대해 설명해주었나.
=“연남동 일대에 오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 같은데 영화쪽 관련 일을 하지 않겠니?” 정도만 들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정확한 직업은 등장하지 않는다. (유)준상이가 연기한 상원은 너무나 확실하게 자신이 영화 일을 한다는 대사가 있고. 허허허.
-촬영 전, 홍상수 감독으로부터 특별한 주문은 없었나.
=딱히. 촬영 전날, 연남동에 잠깐 가서 옷 컨펌만 받았다. 편하게 입는 평범한 옷. 접이식 자전거는 내 거였고. 원래 평범한 자전거를 빌렸다던데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있다고 하니 그걸로 하자고 했다. “약간 튀는데” 했더니 감독님이 괜찮다고 하셨다. 재영이 민정과 대화를 하러 카페에 들어갔다가 민정과 함께 나올 때 자물쇠를 자전거에 채우고 푸는 과정이 있지 않나. 감독님은 자물쇠를 채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본 것으로 보아 그 시간을 좀 줄이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민정과 술을 마시면서 사랑의 맹세를 하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한국 남자들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았다.
=여성을 바라보는 한국 남자들의 지질한 시선을 풍자하는 내용인데… 민정이 영수(김주혁), 재영, 상원과 각기 다른 공간에서 각각의 사랑을 한다는 내용의 평도 본 적 있다.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하면서 재미있는 상황이 많았다. (김)주혁이가 촬영 둘쨋날 다리가 부러져 목발을 짚고 현장에 왔다. 그의 목발이 민정을 찾기 위해 연남동을 헤매는 사람의 속도감을 제어하니 영수의 답답함이 강조되지 않나. 주혁이는 불편한 다리로 되게 힘들게 찍었지만 말이다. 또 영수가 막걸리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가게 밖으로 나온 여자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안대를 쓴 여자는 홍 감독님의 건국대 제자다. 감독님이 촬영 전에 갑자기 생각났는지 그 친구에게 “오늘밤에 시간 있니?”라고 전화를 하셨고, 그 친구는 안대를 쓴 채로 촬영장에 나왔다. 우연한 상황인데 너무 설정한 장면처럼 보이지 않나. 한쪽은 목발, 다른 쪽은 눈병. (웃음)
-오랜만에 홍상수 감독과 함께 작업해보니 어땠나.
=이번에는 작업 방식이 좀 특이했다. 일주일에 이틀씩, 한달에 총 8회차 촬영했다. 일주일에 이틀만 찍고 생각을 정리하는 리듬을 시도해보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배우로서 홍상수 감독과 작업할 때는 촬영하는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배우가 홍상수 감독의 세계 안에서 인형처럼 통제된 채 기능하기 때문이다. 촬영 직전에 대본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에서 배우는 촬영 전 장치나 설정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다. 주어진 대사에 집중해야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인물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홍상수 감독을 만나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가 이런 얘기를 했다. 배우가 가진 색깔이 자신의 영화 절반 이상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다고. 배우들은 홍상수 감독이 평소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지만 정재영, 유준상, 권해효 등 배우마다 영화의 톤을 다르게 변화시킨다는 얘기다. 우리 시대의 예술가이자 시네아스트인 그의 작품에서 한 색깔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스플릿>과 <가려진 시간>은 신인감독의 작품들이다. 우선, <스플릿>에서 맡은 백 사장은 어떤 면모가 매력적이었나.
=백 사장은 <소수의견>에서 연기한 판사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당시 <소수의견>의 김성제 감독과 함께 얘기한 게 판사는 누구의 편도 아닌 사람이었다. 백 사장이 내 편인지, 네 편인지 궁금해할 때 긴장감이 구축될 거라고 생각했다.
-백 사장은 처음에는 동네 아저씨 같다가 내기 판이 커질수록 내기 볼링의 설계자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처음에는 조기축구회 아저씨지. (웃음) 돈 앞에서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것만 생각하면 됐다.
-숙소 방이 낮에는 카페, 밤에는 술집이었다고 들었다. 그만큼 현장 분위기가 좋았다고.
=(유)지태, (이)정현, (정)성화 모두 처음 작업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들과 만나 반가웠다. 보통 시나리오를 직접 쓴 감독은 자신의 시나리오에 매몰되기 쉽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그때그때 떠오른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감독으로서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최국희 감독은 배우들의 생각을 수용하는 판단이 빨랐다. 예산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40회차 만에 다 소화했을 정도니 작업 과정이 무척 만족스러웠고 분위기가 좋았다.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도 함께하고 싶다.
-<가려진 시간>의 백 반장은 사라진 아이들을 추적하는 역할이었는데.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독특하면서 개성 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좋았다. 잘 읽혔고. 한편으로는 상업영화로 제작될 수 있을까 걱정도 있었다. 백 반장은 매력적인 역할이었다. 이 영화 작업을 하면서 엄태화 감독에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같은 제안을 한 건 없다. 영화의 톤과 색깔은 엄 감독만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어쨌거나 여러 의미에서 아쉬움이 컸던 작업이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를 주로 작업하다가 최근에는 브라운관보다 스크린에 얼굴을 더 많이 보이고 있는데.
=여러 이유 때문에 드라마에 출연하는 게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다. 그걸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저 스스로 실력이 부족하구나 싶었다. 그때 운이 좋게도 충무로에서 많이 찾아주었고, 덕분에 영화에 얼굴을 더 많이 내밀 수 있었다.
-지난주 수요집회에 나갔던데. 최근의 한·일 위안부 합의 때문에 많이 분노했겠다.
=몽당연필 일을 처음 시작했던 2011년, 노수복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싱가포르에서 해방을 맞고, 그 이후에는 타이에서 사시다가 한국에 돌아오신 할머니다. 그래서 한국말을 잘 못하셨다. 할머니는 정부에서 받은 생활지원금을 모아 몽당연필에 전부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재일 조선학교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말씀과 함께. 할머니의 마음은 재일동포, 위안부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거다. 노수복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위패도 직접 공항에서 전달받고, 노제도 지낸 인연으로 몽당연필 일을 하면서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대학생들이 소녀상을 1년째 지키고 있다. 국민들이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몽당연필에 참여한 지 5년째다. 이번 정권에 들어서 정부가 조선학교 출입을 불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다. 그전에는 조선학교를 자유롭게 왕래해 학교 안에서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올해는 원전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 지역의 조선학교를 방문했는데,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학교 담벼락 밑에서 노래 부르고, 정문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 헤어졌다. 사실 조선학교에서 이념 문제는 희석된 지 오래됐다. ‘북핵’ 같은 북한 문제가 터질 때마다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타깃으로 삼아 압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이번 정부도 그런 시선으로만 조선학교를 바라보는 것 같다. 내년이 되면… 다른 희망이 있겠지.
-매주 광화문 집회에 나가고 있다고.
=아주 힘들어죽겠다. (웃음) 지난주 낮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가고, 저녁에는 혼자 가고. 서로 일정이 안 맞아서. 12월3일 집회 때는 짜증과 스트레스가 굉장했다. 이제는 어떤 묘한 임계점에 다다른 것 같다. 12월9일 탄핵 표결이 어떻게 나올지….
-집회 주최쪽에서 사회를 봐달라는 요청은 없나.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다. 국민으로서 집회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지 마이크를 잡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김)제동씨가 오랫동안 말도 안 되는 공격을 받으면서 대중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나. 나 같은 물밑에 있던 사람이 지금 마이크를 잡으면 선의가 대중에게 왜곡되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시민으로서 더욱 열심히 참여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웃음)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
=이미 촬영한 영화 두편이 있다. 모두 홍상수 감독의 차기작이다. 강릉에서 찍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칸에서 촬영한 작품이 그것이다. 두편 외에 정해진 내년 계획은 아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