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꿈의 해석
2016-12-21
글 : 김혜리
<판도라>

4월의 그날 이후 재난영화는 한국인에게 슬픈 꿈 비슷한 것이 되었다. <부산행> <터널>에 이어 <판도라>다. 우리는 극장의 어둠 속에서 눈물을 닦으며 재난을 당한 이웃을 구하고 또 구했다. 그러나 불이 켜지면 이웃들은 여전히 죽어 있었고 우리는 실패한 채였다. <부산행>과 <판도라>에는 앞다투어 질주하는 인파의 이미지가 있다. 내가 남을 밟고 달리거나 딛고 올라가지 않으면, 선을 지키면 죽을 거라는 공포가 위기상황을 지배한다. <판도라>의 연주(김주현)가 중앙분리대를 부수고 넘어갈 때 관객은 겨우 안도한다. 영화에서, 이유가 무능이건 부패건 정부는 시민을 구하지 못하고 최우선은 생명이 아니라 돈과 책임회피다. 이제는 기본값이 돼버린 ‘자력구제’의 서사 가운데에서도 <판도라>는 1차 피해자들이 다시 구조자로 불려나간다는 점에서 끝판이다.

12/2

<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는 두 여성이 끌어가는 대중 장르영화다. 뭐 대수인가 싶지만 극중에서 이름이 주어진 두명 이상의 여성 캐릭터가 남자와 무관한 화제로 대화하는 영화가 절반이 못되는 게 현실이다. <미씽>은 중국인 보모 한매(공효진)와 함께 실종된 아기를 엄마 지선(엄지원)이 탐정이 되어 애타게 찾아다니는 줄거리를 가졌다. 그런데 추적 과정에서 지선이 정작 발견하는 것은 한매의 초상이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은 딸 민진의 행방불명을 조사하다가 자기를 지켜주려던 딸의 의지와 계획을 뒤늦게 발견한다. 모녀의 서로를 향한 애정은 진짜였지만 두 사랑은 한점에서 만나지 못했다. 딸은 포기했고 엄마는 몰랐다. 둘을 고리로 맺는 존재는, 어긋난 모녀의 사랑을 공히 목격한, 민진의 친구 미옥이다. 아마추어 탐정으로서 <미씽>의 지선도 연홍처럼 놀라운 실력을 발휘한다. 그녀들이 경찰과 동일한 단서를 접하거나 한발 늦더라도 사실에 곧장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여자로서 추격 대상이 처한 상황과 동기를 상상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미씽>의 지선은 도중에 탐정 역을 경찰에 넘기고 피해자 자리로 돌아간다). 유아 실종이 중심 사건이지만 <미씽>은 엄마와 악녀가 대결하는 유괴 스릴러도 아니고 일에 매달려 육아를 소홀히 한 여성이 자식 잃은 여자의 광기를 접하고 대오각성해 모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부제가 말하는 대로 실종된 것은 출산과 노동을 위한 도구로 팔려와 이름을 잃고 시민권을 무시당한 여자의 정체성이고, “이래서 애 엄마와는 일하기 싫다”와 “무슨 애 엄마가 이따위냐” 사이에서 피해의식에 짓눌린 여자의 자아다. 그녀들과 대비를 이루는 여성 인물들은 두 남편의 어머니다. 두 시어머니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지만 아들에게 자아를 온전히 투사한 지 오래다. 의사로서 흠결 없는 탄탄대로를 걸어야 하는 아들, 어쨌거나 꼭 후사를 봐야만 하는 아들에게 인생의 성패를 건 것이다. <미씽>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놀랍게도 스스로도 피해자인 지선이다(그녀는 행위의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아픈 딸의 입원실을 어떻게 좀 알아보라고 소아과 의사인 남편을 다그쳤고 그 결과 한매의 위독한 아기가 쫓겨난다. 그러나 이 냉혹한 특정 해결책을 택한 주체는 남편이다). 한매와 지선의 남편은 끝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무지하며 이 비극에서 본인들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결국 <미씽>과 <비밀은 없다>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진실과 욕망이 추적과 탐사를 거쳐야 드러나는 비밀의 영역에 웅크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스릴러이기도 하다. 그들이 은신하고 속이지 않고서는 원하는 바를 도모할 수 없도록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미씽>의 시나리오는 완벽하지 않다. 결함의 대부분은 결핍보다 과잉쪽이다. 자전거 소년의 증언을 비롯해 인물이 엮이고 단서가 발견되는 몇몇 계기가 무리한 면이 있고, 일부 코미디는 웃음은 주지만 불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애석한 대목은 에필로그다. 눈물과 비눗방울과 햇살로 빛나는 이 후일담은, 온갖 상투적 예상을 피해가며 거기까지 주제를 구축해온 영화의 여운을 가족 모성 멜로로 뭉뚱그리는 아쉬움을 남긴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추억을 환기시키는 수중 신에서 멈췄다면 어떠했을까? “그래서 아기는 어떻게 됐다는 거야?”라고 투덜거리는 관객이 많았을까?

12/3

몇달 전의 <굿바이 싱글> 그리고 <미씽>의 평화로운 초반을 보며 퍼뜩 떠올린 생각 하나. 맞벌이건 아니건 아이를 양육하기에는 여성 동성 커플이 가장 효율적인 부부 형태가 아닐까.

12/6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는 음악의 육체성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영화였다. 음악은 단지 영감과 창의력만이 아니라 고도의 육체적 훈련과 막대한 노동- 때로는 체벌까지- 을 요하는 예술이라는 관점을 <위플래쉬>는 출혈과 골절까지 동원해 입증했다. 셔젤의 신작 뮤지컬 <라라랜드> 역시 음악과 영화의 육체성을 탐닉한다. 배우의 몸짓과 음성, 화면의 색채와 편집의 리듬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나는 <라라랜드>를 보며 어깨를 들썩이고 눈시울을 붉혔지만, 그 희열과 슬픔의 원천은 캐릭터나 플롯과 거의 무관했다. 미아(에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거의 텅 빈 캐릭터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물의 내용은 LA라는 꿈의 나라에서 성공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청춘이라는 설정이 전부다. 주인공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연애에 대한 통찰력 있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그들의 구두와 손끝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설득된다. 나중에 등장하는 연애 과정의 관습적 몽타주 시퀀스는 이 밤거리의 듀엣 댄스에 비해 1/10만큼의 임팩트도 없다. LA 고속도로를 뒤덮은 자동차들의 어느 한대 겹치지 않는 색채의 향연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그리스>를 연상시키는) 밤 외출을 나서는 배우 지망생들의 4원색 드레스, 그리고 그 치맛자락의 팽이 같은 휘날림이 나를 흥분시켰고, 미아와 세바스찬의 마주앉은 식탁을 비추는 푸른 조명이 나를 불안하게 했으며, 파리 풍경 한 귀퉁이의 빨간 풍선이 막연한 그리움을 일으켰다. 둘의 과거를 ‘만약’ (What If)이라는 가정으로 뒤집어 축약한 마지막의 숨막히는 시퀀스는 <라라랜드>가 색채와 리듬에서 정서를 길어올리는 영화임을 깔끔히 확인시킨다. 카드를 화르륵 넘기는 듯한 그 빠르기가 이 시퀀스가 자아내는 찬란한 비애의 요체다. <위플래쉬>의 최종 클라이맥스를 떠올리자면 데이미언 셔젤은 피날레에 야심이 큰 감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라라랜드>의 모든 감흥은 철저히 디자인된 것이고 셔젤은 지독하게 애쓰는 연출자다. 클래식 뮤지컬을 깊이 사랑하고 동경하는 수작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을 넘어서 스스로 클래식이 될 수 있을지 망설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라라랜드>의 흥이 온전히 노력에서 나온다는 인상 때문인 듯하다. (다음에 계속)

<나, 다니엘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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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푸드뱅크 장면은 올해 스크린에서 가장 쓰라린 광경중 하나다. 마음 아프다는 표현도 한가롭다. 관객으로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감이 든다. 집을 얻기 위해 런던에서 멀리 뉴캐슬로 전입한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극빈자를 위한 식료품 은행을 찾는다. 그러나 장보기가 끝나기까지 허기를 참지 못하고 얻은 콩 통조림을 입에 털어넣다 쏟아버린다. 남매는 엄마에게 무서운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달려오고, 아이들은 틀리지 않았다. 케이티의 눈물과 함께 바닥에 쏟아진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우리는 그제야 바람 부는 거리에서 행인들의 시선 가운데 구호소 입장 줄에 서 있던 케이티의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케이티와 다니엘 같은 노동자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게으름이나 무능이 아니다. 따라서 수치를 느껴도 안 되고 자선에 허리 숙여 감사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다름 아닌 복지당국이 그들을 금치산자 취급하고 긍지를 짓밟고 틈을 보이면 달려들 관리 대상으로 간주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래서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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