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송경원의 영화비평] <라라랜드>, 마법의 이름은 시네마가 아니다
2016-12-27
글 : 송경원

쇼가 끝나는 순간 마법도 풀린다. 그랬어야 했다. 한데 그토록 열망하던 재즈바 ‘샙스’에서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애잔한 실루엣은 꽤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라라랜드>는 좌절된 사랑을 낭만으로 포장한다. 여름밤 폭죽 냄새의 설렘이 묻어나는 말캉한 화면들은 제법 근사해 세바스찬의 씁쓸한 우울감마저 멋들어져 보인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가정법은 완성된 행복보다 오랜 잔영을 남기는 법이다. 과거라는 사막의 신기루가 유독 아름다운 건 우리가 이미 그것이 신기루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 회복할 수 없는 시간과 거리가 확인된 다음에야 상실의 계곡 사이로 멜랑콜리한 감정을 때려 부을 수 있다. 현재진행형의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낭만적인 되새김질은 공감과 체험이라기보다는 관람에 가까운 행위다.

아련함에 흠뻑 취해 피아노 선율을 곱씹고 있을 때 흥미로운 해석을 들었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투덜거리며 불만을 이어갔다. 그는 남자의 어리석음을 답답해하며 말했다. 여자가 두번이나 자신을 붙잡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는데 남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떠나보낸 거라고. 그러고선 혼자 순정을 지키고 있었던 양 낭만적인 척한다고. 세바스찬의 입장에 한껏 이입했던 나는 그저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말 중 유독 ‘~척한다’는 표현이 뇌리에 박혔다. 어쩌면 그 단어가 이 영화를 함축하는 열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환상이 곧 현실이다

<라라랜드>는 수사적 표현이 그대로 화면이 되는 가정법의 영화다. 비단 ‘우리는 그랬어야 해’라는 상상의 플래시백으로 채워진 엔딩 때문만은 아니다. ‘그랬으면’ 하는 모든 묘사들이 영화에선 고스란히 현실이 된다. 여타 이야기들을 감정을 에둘러 표현하고 사물에 빗대어 표현할 때 <라라랜드>는 은유적인 수사를 화면 속에서 일대일로 치환해버린다. 수사적으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말하는 대신 <라라랜드>는 그냥 구름 위를 걷는 남녀를 보여준다. 쏟아지는 별빛이 필요한 낭만적인 밤에는 별들 사이로 올라가 춤을 추면 그만이다. ‘~처럼’의 문장이 영화에서는 직유, 은유, 환유 등등 숱한 비유의 다리를 건너뛰고 곧장 현실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뮤지컬영화이기에 허락된 마법일 것이다. 시네마스코프를 선언하며 군무를 펼쳐 보이는 오프닝 시퀀스는 하나의 약속이다. ‘지금부터는 환상의 땅으로 들어설 예정이니 사실적이니 말이 되느니 따지지 말고 흥겨운 쇼를 감상하십시오.’ 우리는 합의된 환상의 자리에서 거부감 없이 영화가 펼치는 마법 같은 순간을 관람한다. 체험이나 이해가 아닌 관람이란 점이 중요하다. 합의된 환상의 세계로부터 객석까지의 거리는 뮤지컬영화의 동력이자 매력이다. 뮤지컬은 여타 드라마보다 훨씬 폭넓은 영화적 허용을 강요한다. 이 권유에 응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장르에 대한 호불호가 결정된다. 우리가 만끽하는 건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를 다시금 재구성한 (영화적 시공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한편의 흥겨운 쇼다.

실패한 사랑의 애달픈 이야기를 보면서도 슬픔보다는 행복감이 차오르는 건 그 과정에서 펼쳐 보이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순간들 덕분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라라랜드>에서 관객이 목격하는건 세바스찬의 좌절, 미아(에마 스톤)의 안타까움과 같은 드라마의 굴곡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들을 무대화하는 화사한 재현 방식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1952), <밴드 웨건>(1953), <페임>(1980) 등 고전 뮤지컬의 각 순간들을 차용한 장면들, 음악과 일치하는 유려한 카메라의 롱테이크, 은유적 문장이 고스란히 그림이 되는 CG까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보다는 어떻게 재현되는지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 영화가 황홀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그건 무대 위에 구성된 재현 방식, 배우들의 율동과 음악, 카메라의 움직임이 화사하고 신기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인 한편의 뮤지컬을 최대한 역동적으로 찍어낸 것과 다름없다.

도취된 카메라

<라라랜드>는 재즈를 닮았다. 스스로 재즈가 되려는 영화, 아니 영화인 척하는 재즈 공연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연출은 여러 뮤지컬 고전들을 인용하고 그에 대한 경배를 바치되 자신만의 호흡으로 재편한다. 재즈와 비교하자면 리듬은 남겨두고 멜로디를 역동적으로 변주하는 셈이다. 이 영화에 대한 반응도 재즈를 접한 이들의 반응을 닮은 것 같다. 감독이 뮤지컬 고전의 여러 장면들을 자신만의 박자로 변주할 때 이를 알아보는 이들은 그 현란한 솜씨에 반한다. 장면의 연결, 여러 레퍼런스의 변주들을 알아보고 흥겨워하며 감독의 재간에 격찬을 보낸다. 반면 전형적이고 편편하다고 해도 좋을 스토리라인에 지루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몇몇 장면에서는 감탄하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교에 피로감을 느끼고, 그 속에 정작 알맹이가 없음에 실망한다. 한편 이러한 기교와 판타지에 익숙지 않았던 이들 중에는 꿈결 같은 화면들에 새삼 반하고 마음이 동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해질녘 그리피스 공원의 형용하기 어려운 빛깔은 그 어떤 거부감도 무장해제시킬 만한 마법이라 할 만하다. 뮤지컬이라는 합의된 환상에 어색함을 느끼던 이들도 오프닝 시퀀스에서 건네받은 초대장의 봉인을 기꺼이 풀고 춤과 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다. 세바스찬 덕분에 재즈를 사랑하게 된 미아와 같은 심정이라고 할까.

한 가지 의심이 드는 건 이 영화가 재즈를 닮으려 한 것인지, 재즈가 영화를 흉내내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거다. LA를 무대로 벌어지는 총천연색 공연은 실제 무대에서는 재현 불가능한 순간들을 영화라는 도구를 빌려 화려하게 장식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 영화는 무대를 카메라로 옮겨 찍었을 따름이다. 한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카메라가 종종 인물과 사건을 앞서가버리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롱테이크를 선호하는 영화는 가급적 장면을 잘라내지 않고 한 호흡에 담아내어 현장감이나 역동성을 전달하려 애쓴다. 꽉 막힌 도로가 무대로 변신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롱테이크에 대한 강박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때 카메라가 호흡을 끊지 않으려고 갖은 트릭을 활용하는 건 지금 당신이 만끽하고 있는 것이 실황공연임을 강조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여기엔 또 하나의 효과가 있다. 무대나 무대 위 이야기보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도드라져 보인다는 점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인물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일사불란한 동작들은 마치 무대 뒤를 넘나드는 배우들을 보는 것 같다. 화면이 전환되는 타이밍,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추고 시작하는 위치는 이 공연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라라랜드>에서 가장 현란한 무대효과는 다름 아닌 카메라다. 무대 곳곳을 훑는 행위에 도취된 카메라는 종종 장면의 주인공 행세를 하기도 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고가도로에서 혼신의 춤을 추는 배우들, 총천연색 의상의 조합, 기막힌 군무, 모두 좋다. 하지만 이들 사이를 헤집고 넘나들며 공간을 구성해 나가는 카메라만큼 인상적이고 역동적인 대상이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데이미언 셔젤은 스스로 영화라는 이름의 재즈를 연주하는 뮤지션이 되어 화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애초에 영화가 카메라의 움직임이 허락하는 건 단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인물의 시점을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독이 개입하여 절대자의 손길로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다. 전자는 몰입을 유도하고자 인물과 시선을 일치시켜 세계를 훑는다. 후자는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것, 보여줘야 하는 것을 중심으로 대상을 지시한다. 어느 쪽이든 카메라의 동작은 영화 내러티브와 관계된다. 종속적이라고 해도 좋겠다. 반면 <라라랜드>의 카메라는 반드시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는다. 어떨 때는 이야기를 앞서가기도 하고 인물의 감정과 전혀 상관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커팅 없이 인물의 시선을 따라 이동하던 카메라가 불현듯 자유롭게 무대를 훑기 시작할 때 관객은 카메라의 존재를 선명하게 자각할 수밖에 없다. <라라랜드>가 이야기와의 거리를 확보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자유분방한 카메라는 마치 리듬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재즈 뮤지션의 솜씨를 연상시킨다. 다만 그것은 이야기의 호흡, 인물의 호흡이라기보다는 감독의 호흡이다. 때때로 카메라는 이야기와 불일치하고 감정으로부터도 비켜나가지만 스스로의 흥에 도취된 감독은 공연 중인 무대에 멋대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롱테이크를 구성하는 솜씨는 완벽에 가깝게 조율된 듯하지만 현란한 기교가 반복될수록 이 무대의 주인공은 세바스찬도, 미아도 아닌 데이미언 셔젤이 되어버리고 만다. 음악보다 연주자의 흥이 돋보이는 무대라고 해야 할까.

영화인 척하는 실황 공연

나는 아직도 데이미언 셔젤이 이토록 커팅을 꺼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세바스찬이 미아에게 평범한 인사를 건넬 때, 일상의 대화가 오가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호흡을 끊지 않고 이쪽과 저쪽 분주하게 고개를 돌려가며 두 사람의 공간을 이어 붙인다. 하지만 이때 정말 두 사람의 공간이 하나로 이어지는가. 이 순간을 끊고 싶지 않다는 카메라의 무리한 욕망만 보이는 건 아닌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평범한 커팅으로 구성된 장면이 있다. 밴드 순회 공연을 떠나야 하는 세바스찬은 짬을 내어 미아를 위한 저녁을 준비한다. 연극 초연을 앞두고 불안에 휩싸인 미아에게 세바스찬은 자신이 이상을 포기한 것은 너를 위해서였다며 화를 낸다. 두사람의 감정이 엇갈리는 순간 카메라는 둘을 각각 나눠진 화면에 따로 담아낸다. 어떻게든 움직여 공간을 잇던 카메라가 드디어 여느 극영화의 호흡으로 돌아온 것이다. 평범하고 정적인 연출. 우리는 그제야 두 사람의 대화를 담아내던 앞선 카메라들이 그동안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는지를 자각할 수 있다. 이 대화 장면을 커팅으로 담아낸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엇갈리는 감정에 대한 적절한 연출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음악이 멈췄다는 사실이다. 이 장면은 이를테면 막간의 쉼표다. 침묵의 연주라고 해도 좋겠다. 음악이 들리지 않자 카메라도 잠시 멈춘다. <라라랜드>에서 카메라는 솔로 연주가 가능한 악기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인물의 감정에 따른 것도, 내러티브에 따른 것도 아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재즈 선율에 맞춘 것이다. 음악이 빨라지면 카메라도 흥겨워지고 리듬이 잦아들면 카메라도 숨을 죽인다.

세바스찬은 재즈는 싫다던 미아에게 재즈의 매력을 알려준다. “재즈는 편하게 따라가는 게 아니야. 재즈는 꿈이야. 충돌이 있으면 화해가 있지. 매 순간이 새로워. 정말 흥미진진하다고.” <라라랜드>가 이상과 현실 사이 각자의 꿈을 좇던 청춘들을 그려내는 방식도 그렇다. 충돌하고 화해하고 매 순간이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아니다. 흥미진진한 건 예정된 엇갈림을 그려나가는 데이미언 셔젤의 카메라, 기교 넘치는 연출이다. 그래서, 정작 이 영화가 들려주는 멜로디는 어떤가. 해질 무렵 매직아워를 잡아낸 장면들,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낭만적인 데이트 등은 관객에게 보는 즐거움을 안기지만 그것이 내 이야기인 양 가깝게 파고들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잘 모르겠다. <라라랜드>의 생동감은 영화라기보다는 일종의 공연 실황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스크린과 객석 사이 관람의 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흥미로운 구경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벽이 되기도 한다. 세바스찬과 미아의 사랑은 정말 낭만적이었나. 5년의 시간, 영화는 그랬어야 한다는 행복한 가정법 이외에는 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을까. 한발 더 나아가 내가 본 건 정말 뮤지컬영화인가. 뮤지컬영화인 척하는 재즈 공연은 아니었나. <라라랜드>는 분명 마법 같은 순간을 선물한다. 행복인지 쓸쓸함인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무언가 충만하게 차오른다. 하지만 그 마법의 이름이 시네마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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