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내가 내가 아니라면
2016-12-28
글 : 김혜리

※<라라랜드>와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교사>

두 교사와 한 남학생을 꼭짓점으로 그려진 <여교사>의 삼각구도에서 재미있는 것은 효주(김하늘)와 혜영(유인영)을 잇는 선이다. 평범한 조건의 효주는 동동거려야 겨우 한 발짝씩 다가갈 수 있는 모든 욕망의 대상을, 재단 이사장의 딸 혜영은 아주 간단하게 처음부터 소유하고 있다. 유사한 모티브를 가진 영화 <노트 온 스캔들>에서 주디 덴치는 젊고 이상주의적인 동료교사 케이트 블란쳇을 동경(envy)하여 그녀 자체를 가지려 하지만 <여교사>의 효주는 혜영이 가진 것을 빼앗는 질투의 길을 택한다. <여교사>는 보통의 일하는 여자의 관점에서 쓰는 계급 이야기로 볼 때 흥미롭다.

12/07

<위플래쉬>(2014)는 재즈 드럼 주자가 여자 친구를 찾는- 그러다가 음악 때문에 어그러지는- 이야기이고 <라라랜드>는 재즈 피아노 주자가 여자 친구를 얻었다가 떠나보내는 이야기다. 국내에서 볼 수 없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첫 장편 <공원 벤치의 가이와 매들린>은 재즈 트럼펫 주자가 여자 친구를 찾는 이야기라고 전해진다. <라라랜드>에서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여자 친구 미아(에마 스톤)와 관련해 특기할 만한 사항은, 덜컥대는 오디션 장면을 제외하면 우리가 그녀의 연기 재능을 제대로 확인할 기회가 영화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라라랜드>는 미아가 쓰고 연기한 <안녕, 볼더 시티>도,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도, 스크린에 등장시키지 않는다. 피아니스트 세바스찬의 실력은 반면 영화의 중요한 시퀀스들의 중심에서 발휘된다. 그럼에도 이 꽉 짜인 영화에서 가장 생동하는 인간적 요소는 에마 스톤의 연기다.

장르는 스포츠영화와 뮤지컬로 판이하지만 (농담) <라라랜드>의 예술관은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의 그것을 대체로 계승한다. <위플래쉬>에서 플레처 교수(J. K. 시먼스)가 집착하는 음악성의 기준은 비트의 정확성이며, 이는 피나는 연습을 통해 성취 가능하다. 드러머 앤드류(마일스 텔러)는 음악원 동료와 토론한다거나 자극과 영감을 구하기는커녕 같은 오케스트라 멤버와 눈도 잘 맞추지 않는다. 셔젤 감독은 <라라랜드>의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이 최고로 여기는 연주 형태를 독주로 설정했다. 세바스찬의 재즈에 대한 신념은 보수적이어서 흑인 동료 키이스(존 레전드)로부터 한소리 들을 정도다. 영화에서 밴드 합류는 상업적 음악에 대한 투항으로 간주된다. 존 레전드의 음악이 소위 의문의 1패를 당하는 대목이다. 한편 오디션에 낙방을 거듭하던 미아가 스스로 창조한 기회도 직접 쓴 1인 연극이다. 물론 모노드라마는 실제로 가진 것 없는 배우가 독립 프로덕션으로 선택하기 좋은 양식이긴 하다. 그러나 <라라랜드>는 미아가 준비하고 공연하는 과정에서 극장 관계자나 스탭과 접촉하는 모습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나아가 1인극을 발판으로 미아를 캐스팅한 영화는 “주인공을 중심에 놓고 거기에 맞춰 제반 요소를 쌓아올려가는 프로젝트”로 묘사된다. 어쨌거나 성공한 젊은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무의식 안에서, 예술이란 궁극적으로 혼자 하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연애하는 양자가 관계를 지속하며 각자의 야망을 실현하는 일은 어렵다는 생각도 살짝 비친다. 몇년 후 세바스찬을 대체한 미아의 남편은 아내의 커리어를 충실히 뒷받침하는 비예술가로 짐작되며, 결말의 클럽 장면에서 음악을 듣는 동안 스쳐가는 상상 속의 세바스찬은 다분히 패밀리맨으로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몽타주 속의 그는 미아의 촬영을 따라 파리로 간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로맨스는 추억으로만 남지만 두 사람은 그 하나를 제외한 모든 소망을 성취한다. 새로운 사랑을 포함해서. A를 중히 여겨 B를 포기했는데 A도 손에 넣지 못하는 일이 허다한 현실과는 거리가 몇 광년이다. 나의 상상은 계속됐다. 만약 미아와 세바스찬이, 아니 둘 중 하나라도 할리우드로 상경한 대다수 젊은이들이 현실에서 그렇듯 예술계 커리어를 포기하고 평범한 인생으로 돌아갔다면 마지막 15분의 <슬라이딩 도어즈>식 몽타주가 지금만큼의 감흥을 내지 못했을까? 종류가 다른 감흥일 것은 확실하다.

12/21

데스스타씩이나 되는 우주 최고의 전투 스테이션에 건드리면 연쇄적으로 파괴가 확산되는 치명적 급소가 있다니 말이 되냐는 오랜 의문에 대한 대답이 드디어 공표됐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 원>)에 따르면, 버그는 제국의 대량 살상무기 개발에 강제로 동원된 과학자의 복수였다. 부모를 잃고 고아로 성장한 냉소주의자 진(펠리시티 존스)은 아버지의 비밀 메시지를 전달받아 데스스타를 파괴할 수 있는 데이터를 빼내는 미션에 투신한다. 이 과정에서 반군, 전향한 제국군, 포스를 믿는 승려, 드로이드 등 다양한 멤버가 합류해 결사대를 이룬다.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의 <로그 원>은 블록버스터들끼리 유니버스를 결성하는 21세기 신조어로 표현하자면 시리즈의 기존 영화들 사이의 빈 곳을 메우는 비트윈 퀄(between-quel)이다. 극장용으로는 처음 나온 <스타워즈>의 외전인데, 메인 시리즈와 정면으로 전면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라서 스핀오프라고 부르기는 조금 어색하다. 반군의 손에 데스스타의 설계도가 들어온 경위를 알려주는 <로그 원>의 각본은 <스타워즈 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 시나리오를 책상에 펴놓고 ‘옥에 티’를 지우며 역산해서 쓴 듯하다(<황금나침반>과 <신데렐라>의 크리스 웨이츠와 본 시리즈의 토니 길로이가 공동 작가 크레딧에 올라 있다). 그러다보니 시리즈 전체와 떼놓고 보면 독자적 매력은 부족하다. 특히 여러 행성을 줄줄이 소개하는 영화 초반은 <스타워즈> 프리퀄의 요령부득한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로그 원>이 평면적이라는 인상은 <스타워즈> 시리즈 특유의 스토리 공식- 도움을 청하는 메시지, 외인부대 결성, 구름다리 같은 구조물에서 벌어지는 클라이맥스 액션 등등- 반복에도 기인하지만, 주로 캐릭터 만들기의 실패에서 온다. 여성, 아시아, 아프리카, 히스패닉, 로봇을 고루 기용한 <로그 원>의 캐스팅은 인종적 다양성 요건을 갖추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그들에게 살아 숨쉬는 성격을 부여하지 못해 빛이 바랬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생기 넘치는 레이(데이지 리들리)와 달리 <로그 원>의 진은 <스타워즈>뿐 아니라 대중문화가 습관적으로 그려온 여성 전사의 전형에 머문다. 가장 중요한 조연의 결정적 심경 변화는 계기가 모호하고, 고강한 무공으로 액션의 재미를 선사하는 견자단과 장원의 캐릭터는 성격적으로는 동양 무협 고수의 상투형을 벗어나지 않는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거신병을 연상시키는 팔이 긴 드로이드 K-2SO는 개그 욕심이 과하다. 위트 있는 로봇은 언제 어디서나 사랑받는 캐릭터지만, 모든 대사가 재치를 과시하는 농담인 것도 지겨운 노릇이다. 무려 살신성인과 산화(散華)의 서사를 가진 영화가 비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니 더욱 아쉽다.

<로그 원>의 톤은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만큼 어둡다. 거칠고 절박하다. <스타워즈 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이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인 만큼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희망이 없는 상황이니 당연하다.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이 달성한 목표가 하나 있다면, <로그 원>을 실존 역사에 기초한 듯한 전쟁영화로 연출한 것이다. 우주의 전투 못지않게 <로그 원>은 봉과 검을 쓰는 백병전과 침투 작전, 흙과 물이 튀는 폭격을 공들여 묘사한다. 흡사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을 다룬 영화들의 미장센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전쟁영화에 대한 에드워즈 감독의 도전은 거기까지다. <로그 원>은 제국에 반대해서 일어난 반군이 어떤 전략으로 싸워왔고, 왜 내분을 일으켰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진의 계획에 일부 반군 병사가 자원하는 심리적 원인으로 암시되는, 결과로 부도덕한 수단을 정당화해온 내력도 변죽 만 울리는 데에 그친다. 포레스트 휘태커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임모탄 조를 닮은 의상을 입고 연기하는 인물 소 게레라 역시, 반군 내에서 배척당하는 급진파로 설정돼 그의 사연과 정치적 신념을 풀어내면 관객의 은하계 전쟁사 이해를 풍성하게 할 만 한데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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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숏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사람인지, 장소인지, 취직에 성공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고등학생 시절 모르는 소녀와 몸이 바뀌는 신비한 꿈을 꾸었던 청년 타키는 그 기억이 희미해진 어느 날 그렇게 되뇐다. <너의 이름은.>은 무라카미 하루키식으로 말하면 ‘결락’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의 내면에 구멍이 생길 수 있다면, 없어진 사람의 일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우리의 보편적 신비 체험-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며 찾아 헤매고 슬픔의 이유를 모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느낌에 착안한 판타지 모험담을 쓰고 그렸다. 그러므로 <너의 이름은.>에서는 자연재해로 지상에서 사라진 마을의 풍경이, 잊어버린 사람의 이름이 중요하다. 영화의 절정부에 등장하는 (한쪽이) 보이지 않는 소년과 소녀의 투숏은 이를 함축하는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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