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성욱의 영화비평] <우리 손자 베스트>의 도발적인 유희의 규칙
2017-01-03
글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김수현의 <우리 손자 베스트>에 흥미를 느꼈다. 첫째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로의 기억 때문이다. 영화의 무대인 낙원상가 근처의 주변 공간과 탑골공원, 그곳을 배회하는 어른들은 내가 10년 넘게 보았던 것들이다. 서울의 중심이라지만 영화의 무대가 되기엔 촌스런 곳이긴 하다. 그곳의 노인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느낀 적은 없지만, 영화 속 교환(구교환)이 무모하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 무리 속으로 들어가본 적은 없다. 이 영화는 용기 있게 그 안으로 성큼 들어간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둘째로, 이 영화가 도발적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영화는 표현의 예술이지만, 동시에 세계의 반응을 불러온다. 모든 장면을 구성하는 데 전략이 있기 마련이지만, 어떤 작가는 구성 대신 이미지에의 반응에 주목하기도 한다. 스캔들과 관객의 추문을 두려워하지 않은 도발적인 영화가 그렇게 나온다. 한국영화에서 이런 경향은 어쩐 일인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기덕이나 임상수의 영화가 그 비슷한 것을 했다고 여겼지만, 실은 홍상수의 영화만이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이상한 방식으로 이를 수행하고 있다. 장선우의 영화가 기능하던 도발의 시대가 끝났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 손자 베스트>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준 작품이다.

도발적이라고 말했지만, 이 영화가 영화의 두 주인공인 일베 청년과 어버이연합 어른들의 행태를 은밀하고 추악한 것으로, 스캔들로 폭로하는 영화는 아니다. 사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생각과는 달리 청년과 노인의 만남에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일체성이 거의 없다. 도리어 이들의 만남에서는 불가능한 가족에서 배제된 할아버지와 손자의 정겨움이 묻어나기조차 한다. 가령, 어버이 별동대장 정수(동방우)가 교환에게 “내 몸에서 냄새가 나니?”라고 묻는 장면이 그러하다. 관객의 곤혹스런 반응을 불러오는 것은 이런 정서적인 순간들이 아니라, 대신 영화의 기이한 유희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초반부, 교환은 고시학원에서 9급 공무원 수강신청을 두번이나 변경한 후에 친구의 꾐에 이끌려 결국 돈을 환불받고는 PC방으로 향한다. 그가 환불 창구에서 직원에게 변명을 늘어놓는 말들과 몸짓은 웃음을 자아낸다. 비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정당하게 고객의 권리를 주장하는 중이라고 말해야만 할까 망설여진다. 나는 교환의 행동이 비정상적이라 말할 자신이 없다. 어디에서나 이런 행동이 벌어지고 있고(극장을 하는 나는 늘 이런 관객과 만나고 있다), 또 누구나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교환은 다만 일종의 어릿광대일 뿐이다. 철저히 계산된 말투와 무의식적 몸짓이 이런 (비)웃음을 불러온다. 이런 웃음은 일상생활의 관습화된 신체의 리듬이나 말의 용법과는 다른 패턴, 말하자면 일상의 문맥에서 이탈하고 탈락한 몸짓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교환의 어릿광대와도 같은 말투와 몸짓은 가정된 질서를 깨뜨리는 유희, 놀이에 가깝다. 그는 직원에게 계속 ‘제게 화를 내시는 건가요, 짜증내는 거 맞죠’라며 속 긁는 소리를 해댄다.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안하무인 행동이 처음에는 귀엽다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의식이니 정의니, 권위에서 일탈하는 돌발적 행동으로 그가 나아갈 때, 우리는 다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가령 그가 PC방에서 광화문의 시위 장면에 게임의 내레이션을 섞는 편집 작업을 할 때, 그리고 이를 ‘너나나나베스트’라는 극우 사이트에 올릴 때, 더이상 유희는 허용될 수 없는 한계지점에 이른다. 교환의 어릿광대짓은 나중에 경찰에 불려가는 것처럼 결코 무고한 일이 아니다.

교환의 행동을 잘못된 것이라 말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언제나 쉽게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기회를 현실이 아닌 인터넷 공간에서 찾게 되는데, 여기서는 신체적 흔적 없이, 몸짓 없이도 성적인 망상이나 가학적인 폭력이 실린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개인의 환상이, 유희가 규제 없이 펼쳐지는 장소다. 모든 이미지에 적당한 말들을 자유롭게 붙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말이 현실과의 관계를 잃고 흩어져, 다른 것과 아무렇지도 않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다. 이미지와 소리의 자의적인 배치가 가능해지는 장소. 모든 가능한 인용들이 무차별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장소. ‘너나 나나 베스트’인 장소이다. 영화는 그럴 자유를 잃었고, 대신 게임과 인터넷에서는 이런 것들로 넘쳐난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그런 비배제성의 장소를 영화의 공간으로 확장해 가져온다. 여기서 교환은 이상한 방식으로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교환이 광화문광장의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라스트를 어떻게 말해야만 할지 여전히 고민스럽지만, 여기에 확고한 답변이나 올바른 하나의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우리 손자 베스트>에서 특별히 강조되어 표현되는 것은 아버지의 상징적 권력의 추락이다. 교환의 아버지는 스스로를 쿨한 척하지만, 실은 가정 내 그가 어떠한 상징적 권위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내비친다. 영화 내내 교환의 집은 비어 있거나, 가족들은 바깥으로 나가려 하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만나는 장소는 일시적인 편의점에서다. 어버이 별동대장 정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극우적 행동은 부성적 권위를 실패한 가족이 아닌, 사회의 투쟁에서 회복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매번 좌절한다. 이는 지젝이 히치콕의 <새>에 대해 언급하며 병리적 나르시시즘과 상징적 권위의 실추, 그리고 어머니의 초자아의 지배에 대해 말했던 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를 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다만 영화에서 발생하는 다른 균열에 대해 말하고 싶다. 가령 성우 김상현과의 두번의 만남 이상으로 흥미를 끄는 것은 티파니(전여빈)에게로 향한 교환의 이상한 구애와 만남의 좌절이다. 그는 왜 티파니에게 제대로 가지 못하는가? 그 심리에 대해 말하고픈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의 유희가 좌절하는 지점을 지적하고 싶다. 교환은 전화로 영어회화 공부를 신청하면서 사진에 올라온 사람이 진짜인지 어떻게 아냐고 상담사에게 질문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리고 교환은 티파니의 목소리를 듣고는 그녀가 현지인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전화로 말을 하는 동안에 티파니는 거기서 말해지고, 제시되는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그외에 다른 이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녀를 만나지 않고는 이를 확인할 길은 없다. 이는 교환의 유희적 행동이 궁극적으로 실패하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스스로 상정한 놀이의 규칙을 깨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만남은 유예됐지만, 자발적인 제약의 놀이의 규칙을 따르는 대신 어떤 속성들로 환원되지 않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이 먼저 그에게 허용된다. “내가 찾은 팩트는 바로 나다”라는 광장에서의 외침과 몸짓 말이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예술이다. <우리 손자 베스트>의 미덕은 좀처럼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을 사람들에게 말과 몸짓을 허용한 도발적이지만 관대한 영화다. 그러니 더 많은 관객이 이 영화에 대해 말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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