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배우이며 작가인 캐리 피셔가 지난 12월27일 심장질환으로 타계했다는 비보가 들린 지 하루 만에 피셔의 어머니인 <사랑은 비를 타고>의 스타 데비 레이놀즈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캐리 피셔가 반자전적 소설을 직접 각색한 영화 <헐리웃 스토리>(Postcards from the Edge)는, 대스타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덜 유명한 배우 딸의 성장담이다. 메릴 스트립과 셜리 매클레인의 호연으로 <헐리웃 스토리>는 모녀관계에 대한 훌륭한 드라마 중 한편이 되었다. 캐리 피셔는 생전에 <헐리웃 스토리>가 얼마나 본인 경험이냐는 질문을 그녀답게 “오, 사람들은 물론 내가 상상력이라곤 없는 녹음기 같은 작가라고 여기겠죠”라고 가볍게 튕겨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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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꿈을 자주 꾼다. 주로 정해진 시각까지 어딘가에 도달하려 발버둥치는 여정, 아니면 뭔가를 찾으려고 심장이 졸아붙도록 헤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과정의 플롯이 자못 정교하고 장대해서 꿈꾸는 중에도 “영화 시나리오로 괜찮겠는걸?”이라고 생각한다. 한동안은 침대 머리맡에 펜과 종이를 두기도 했다. 급속도로 휘발되는 꿈의 기억을 메모하기 위해서였는데, 겨우 적어둔 몇줄도 두어 시간 후 읽어보면 시금털털할 따름이라 어리둥절해지곤 했다. 꿈에서 깨어 눈물을 흘리지만 이유를 알지 못하는 <너의 이름은.>의 소녀 미츠하와 소년 타키의 체험을 엄연히 현실적이라고 느낀 관객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원인은 사라지고 결과인 감정만 가슴에 괴어 있을 때, 겪어본 적도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고 처음 도착한 장소에서 고향을 감지할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내가 무엇을 잃어버린 게 아닌지 내 일부가 하염없이 먼 곳으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은지 불안해진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 신비체험을 모티브로 일주일에 세번쯤 몸을 바꿔 아침을 맞는 17살 동갑내기 산골 소녀와 도쿄 소년의 교류를 <너의 이름은.>에서 그린다. 영화의 1/3 지점까지는 <키스의 전주곡>(1992) 또는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의 <전교생>(轉校生)- 그리고 이를 리메이크한 한국영화 <체인지>(1997)- 과 유사한 익숙한 젠더 스와핑 코미디의 포즈를 취하던 영화는 점점 주제의 프레임을 넓혀간다.
흔히 시간 내지 다차원을 여행하는 영화가 그렇듯 <너의 이름은.>의 규칙은 다분히 자의적이다. 제목이 제시하듯 미츠하와 타키는 꿈을 깨면 하필 상대의 이름부터 잊지만 다른 사소한 일은 기억하는 것처럼 보인다. 1차 반전의 원인이 되는 기본 정보의 차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대목은 주인공 소년, 소녀가 이 기상천외한 사고에 대처하는 태도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 이야기를 이성의 신체에 들어간 사춘기 청소년들의 소동 코미디에 멈추지 않고 상대의 일상을 조심스레 지키고 한발 나아가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자연스런 배려의 이야기로 옮아간다. 예컨대 둘은 용돈 낭비 금지, 목욕 금지, 사투리 금지를 약속한다. 둘의 생활은 여느 10대처럼 이미 고민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서로가 잘 살길 바라고 타인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놀랍게도 2011년 지진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이 남긴 상처까지 끌어안는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지리적으로만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두 주인공의 거리는 시간의 차원으로, 다시 생사의 양쪽 기슭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기이하고 아름답게도 둘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아득한지 드러날수록 미츠하와 타키의 유대는 질기고 간절해진다. <너의 이름은.>의 후반부에는 한 마을을 사라지게 한 혜성의 궤적을 세기의 우주쇼로 찬탄하며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온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에겐 장관이 된다. 인간들은 그처럼 서로에게서 멀다. 하지만 그 사실이 연결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꺾지는 못한다. 다른 장점 이전에, 타임라인을 매듭끈을 따듯 엮어가면서 마법과 유머와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간다는 일의 의미까지 포괄하는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 솜씨는 훌륭하다. 초기부터 애틋하고 강력한 정서가 간판이었던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가 이번에는 플롯의 뒷받침까지 받아 만개한 인상이다.
돌아보면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마음은 시간과 거리를 넘을 수 있는 건지도 몰라”라는 희망을 이야기해왔다.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2011)은 망자들의 땅으로 가는 소녀의 이야기였고 <초속 5센티미터>는 초등학교 졸업 후 일본의 양쪽에 떨어져 사는 친구들의 교류를 그렸다. 하지만 어떤 전작보다 <너의 이름은.>이 소환하는 작품은 2002년의 중편 <별의 목소리>다. 204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SF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우주연합군에 선발돼 화성으로 파견된 미카코와 내내 그녀와 함께하는 고교 생활을 상상했던 소년 노보루다. 미카코가 화성에서 목성으로 명왕성으로 이동해갈수록 그녀의 2G 휴대폰이 송신하는 문자가 도달하는 시간은 8년까지 길어진다. <인터스텔라>의 전조라고 말해도 무리가 아닌 이 이야기는 즉각적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놀라운 신문물 휴대폰을 거꾸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절감시키는 소품으로 사용했다. <너의 이름은.>은 <별의 목소리>가 순정만화적 애수 속에서 페이드아웃한 지점에서 씩씩하게 출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으로 진화한 휴대폰은 <너의 이름은.>에서도 주요 소도구다. 소년, 소녀는 일기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 생활의 연속성을 지키고 타키의 친구들은 그가 찾는 소녀를 ‘채팅 친구’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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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은 달리 표현하면 ‘시간을 달리는’ 소년과 소녀의 모험이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전교생>의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이 실사영화로 만들기도 했다)와의 비교가 불가피할 법하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재회의 약속에 관한 이야기라면 <너의 이름은.>은 정말 만나기 위해 움직이는 액션이다.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시적으로 함축하고 암시한 내용을 <너의 이름은.>은 산문적으로 설명한다. 후자의 음악을 맡은 밴드 래드윔프스의 노래 가사는 상당히 직설적으로 주제를 강조하는데 “최고의 스피드로 너에게 다이빙할 거야”라고 서슴없이 외친다. 다른 공통점으로는 ‘마녀 가계’의 모티브가 눈에 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마코토가 이모에게 상담을 청했을 때 듣는 대답은 “10대 때엔 그런 일이 있기도 해”다. 미츠하 집은 이토모리 마을의 신사(神社)를 대대로 돌봐온 집안이고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녀 시절 손녀와 비슷한 일이 있었노라 추억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냐고 묻는다면 내 한표는 주저 없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쪽이다. 풍경의 해석과, 캐릭터의 동세를 통한 성격과 감정의 표현, 화면의 여백과 편집의 쉼표를 활용하는 감각이 한수 위라고 느껴서다. 널리 호평받는 신카이 마코토의 포토리얼리스틱한 배경이 내게는 오히려 조금 뻣뻣해 보인다.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도 신카이 마코토쪽이 보다 관습적이다. 남녀의 몸이 바뀌는 <너의 이름은.>의 플롯은 얼핏 성 역할에 대해 개방적 시선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츠하와 타키의 원래 성격은 예쁘고 수줍은 소녀와 착하고 서툰 소년의 타입을 벗어나지 않는다. 여성 캐릭터의 몸과 포즈를 그리는 스타일도 기본적으로 성적 매력을 강조하고 있다. <별의 목소리>에서도- 물론 제작조건도 작용했겠지만- 우주연합군 전사 미카코는 내내 딱 맞는 짧은 교복을 입고 전투에 임한다. 그러나 제일 큰 아쉬움은 따로 있다. <너의 이름은.>은 나의 일부가 나의 외부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정의한다. 미츠하와 타키의 로맨틱한 감정이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 집어낼 수 없는 것도 서로의 내부에 들어가본 경험이 고백과 데이트를 충분히 대체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후반으로 흘러가면서 이 아이디어는,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 불구하고 나의 자아는 타인의 몸뿐 아니라 자연에도 깃들 수 있다는 유유한 세계관으로 확장된다. 극중에서 미츠하가 쌀알을 씹어 만든 술이 “미츠하의 절반”으로 불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은 결국 삶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상실이 특정한 운명적 상대로 채워질 수 있다는 ‘이성애 커플링 만능론’의방향으로 돌아서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너’의 이름을 모른 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살아가라고 독려하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내겐 더 든든한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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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방망이 악당
드디어 올해 최대의 슬리퍼 히트 <마이펫의 이중생활>을 보았다. 12월29일 현재, 무려 2016년 북미 박스오피스 3위에 오른 영화치고 특출한 장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주토피아>의 주디에 버금가게 스크린을 주름잡는 토끼를 발견했다. 귀여움도 무기로 쓰는 뉴욕 동물 지하 저항조직의 우두머리 스노우볼(케빈 하트)이다. 이 동물계의 스파르타쿠스는 생일 파티 출장 마술사와 같이 살며 모자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성실 근무했지만 인기가 시들해지자 버려졌고, 그 트라우마로 반려동물과 반려인을 증오하는 무정부주의자가 됐다. 당근을 앞니로 썰어 만능키를 조각하는 능력 덕분인지 몸집이 수십배인 육식동물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발휘한다. 어째 대의보다 사적인 콤플렉스 해소가 거사의 주요 동기로 보인다는 점이 오히려 매력. 중요한 건 “나를 따르라!”를 계속 외칠 수 있는 상황이다. 안면근육에 힘을 빼면 타고난 귀여움이 튀어나온다는 사실이 약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