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0~70년대에 충남 금산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버스도 없고 전기도 없이 초등학교 시절을 고스란히 보냈다. 누군가가 유랑극단처럼 영사기를 들고 와 초등학교 운동장에 하얀 천막을 치고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보았던 이름 모를 영화가 나의 첫 영화 추억이다. 딱 한 장면, 남녀 배우의 키스 신이 나왔는데 동네 전체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대전에 있는 어느 극장에 공짜로 몰래 숨어들어가 보았던, 소피아 로렌이 출연한 <해바라기>는 내 눈물을 짜낸 첫 영화였다. 사랑하는 남편이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리고 사는 장면을 보고 울부짖던 소피아 로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 표정과 입가를 타고 흘렀던 미칠 것 같은 묘한 여운이 전율처럼 남아 있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 가장 깊은 감동과 많은 눈물을 흘리게 만든 영화는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다. <판도라>가 빤한 스토리이고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라는 영화계의 평가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영화에 대한 조예가 깊은 평론가의 입장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떡해, 어떡해~’ 하며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해야 했다.
평화롭던 원전 마을이 강진으로 기우뚱거리면서 <판도라>는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부실하게 설계된 원전이 위험천만한 강진에 노출되면서 위기에 대한 대처가 또한 여과 없이 노출된다. 원전에 대한 위험성과 그 위험에 대처하는 매뉴얼 모두 터져버릴 것 같은 시한폭탄으로 묘한 대비를 이룬다. 원자로 1차 폭발이 있고 폐연료봉이 보관된 곳의 2차 폭발이 예정된 급박한 상황에서 국무총리를 연기한 이경영과 대통령을 맡은 김명민의 갈등과 대립은 흡사 세월호에 대한 대처와 비슷한 상상을 하기에 충분하다. 탐욕과 자본의 논리에 충실했던 이경영과 그를 따르는 원전 간부들. 현장소장으로 밀려나면서도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정진영과 김명민의 극적인 소통과 솔루션은 그동안 극장을 짓눌렀던 답답한 분노를 걷어내기 시작한다. 주민 대피령이 내려지고 도로를 가득 메운 피난 행렬과 혼란은 정진영과 김남길이 죽음을 각오하고 폐연료봉 처리를 위해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삶과 죽음의 머릿속 혼란과 오버랩이 된다. 이미 방사능에 오염돼 ‘죽게 될 목숨’들이 더 많은 희생을 막고자 결단하는 장면이 좀 작위적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 대목에서 계산 없이 울기 시작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 같은 재난이지만 악마의 속삭임을 뚫고 대통령 김명민과 현장소장 정진영이 나눈 전화 통화는 김남길이 목숨을 바꾸는 장면을 이끌기에 충분한 영화 전개였다. 혹자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김남길과 그의 어머니 김영애의 통화가 너무 길었다느니 너무 신파극이라느니 트집을 잡는다. 하지만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팠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고국에 기쁨을 선사했던 권투선수 홍수환의 목소리가 흥분의 상징이라면 김남길이 “나도 살고 싶다”며 어머니 김영애에게 절규한 장면은 진한 메시지로 길게 여울져 남아 있다. 국가는 무엇이고 한 국가의 대통령은 어떠해야 하는가? 한 사람이 천하이고 우주라고 했다. 한 사람의 생명을 바쳐 더 많은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희생정신이 이 영화의 목적일까?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흔히 현실에서 벌어지기 어렵거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있을 때 ‘영화 같은 현실이 벌어졌다’고 표현한다. <판도라>는 영화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 같은 현실이 이 땅에서 벌어질 가능성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로 원전에 대한 위험성이 대중적으로 경고되었다면 이 영화는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나의 살던 고향에서도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 <판도라>, 정말 감사하다.
정청래 전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소속.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마포구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마포구을) 당선.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 출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