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경사기도권]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상대적 결핍으로 유지되는 사랑을 반품하다 <매기스 플랜>
2017-01-16
글 : 허지웅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민소원 (일러스트레이션)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곧잘 이기적인 사람들에 대한 험담으로 시간을 때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자기만 알고 자기를 위해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쪽이 좀더 편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이지 딱히 이기적으로 굴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우리가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채울 수 있을 만큼 험담할 수 있는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유는, 거기 해당하는 표본 집단이 나 빼고 전부 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때에 따라 평균을 훨씬 더 상회하는 수준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는 그런 남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남자보다 덜 이기적인 주인공들이 그런 남자를 관리해내기 위해 분투한다. 그냥 배제해버리면 될 텐데 뭐 그리 잘난 남자라고 굳이 관리까지 해가며 그녀들의 삶 안으로 끌어안아야 하나 싶겠지만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그는 그녀 아이들의 아빠이고 결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 사랑 말이다. 오늘도 수많은 구제 불능의 이기적인 인간들이 사랑받는다는 구실로 구제받는 중이다. 사랑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한 여자가 남자를 만난다. 스마트하고 괜찮아 보인다. 쓰고 있다는 소설의 도입부를 읽어봤는데 멋지기 짝이 없다. 마침 여자는 정자 기증을 통해 아이를 가지려고 시도할 참이었다. 남자가 무릎을 꿇고 구애하자 여자는 넘어간다. 그게 문제였다. 여자는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구애를 받아들인 과정도 다소 충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남자는 목적을 달성한다. 남자는 아내와 이혼하고 이 여자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시간이 흘렀다. 귀여운 딸이 태어났다. 그러나 여자는 딱히 행복하지 않다. 남자가 쓰고 있는 소설은 이미 500페이지를 넘어갔지만 갈수록 별로고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전처의 아이들까지 세명을 도맡아 길러야 하는데 남자는 자기 일만 신경 쓰고 육아에는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돈도 벌어오지 않는다. 전부 여자가 혼자 다 한다.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인데, 남자는 전처럼 여자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남자의 신경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로 쏠려있다.

여자는 깨닫는다. 이 자기 중심적인 남자가 과거 자기 삶을 그나마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자기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 군림하는 결점투성이 전처를 신경 쓰고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걸 말이다.

결핍이라는 게 사람 가슴에 난 큰 구멍이라고 해보자. 이 남자는 자기 가슴에 큰 결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처의 가슴에 난 구멍은 그것보다 더 컸다. 구멍을 막지 못하고 터지면 가정이 무너진다. 그걸 네덜란드 소년처럼 두 팔뚝과 온몸으로 막아 틀어쥐고 있는 동안만큼은 남자도 타인에 대해 신경 쓸 줄 아는 사람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지금은? 여자는 별다른 결핍이 없다. 건강하다. 타인의 요구에 순응하고 거기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타입이다. 남자는 자기 가슴에 난 구멍만 신경 쓰면 된다. 남자가 제멋대로 굴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환경은 없다.

그래서 여자는 계획을 세운다. 이 남자가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전처를 아직도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전처에게 돌려보내기로 말이다. 그래서 전처를 만나 작지만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계획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하지만 우리야 스크린 너머의 관전자니까 이 엉성한 계획이 어디로 튀어갈지 지켜보면 되는 일이다. 자, 이 영화는 주인공이 남편을 전처에게 반품하는 이야기다. 반품 버튼이 딱히 없고 누가 수거해줄 리도 없기 때문에 이 반품에는 계획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매기의 계획이다.

재미있는 영화다. 다소 가벼워서 실연과 이혼의 아픔을 겪은 사람의 눈에 불쾌하게 보일 구석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런 건 극중 줄리언 무어가 미치도록 완벽하게 연기하는 전처의 행동을 통해 어느 정도 무마된다. 전처는 매기의 계획을 듣고 말한다. 살면서 남의 인생을 조종하려 드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나봤고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을 보니 나는 아마추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군요.

맞는 말이다. 매기의 계획은 자기 인생은 물론이거니와 남의 인생마저, 그리고 아이들의 인생마저 다소 농담거리처럼 다루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어찌됐든 전처는 여전히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덕분에 이 계획은 최소한의 실행 조건을 갖추게 된다. 무엇보다 이 남자(언젠가부터 늘 철없이 나이 들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남편 혹은 아버지 캐릭터를 전매특허처럼 맡고 있는 에단 호크가 연기한다)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그리고 그런 이기적인 특징이 전처와 있어야만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억눌러질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관객은 다소 진지함이 결여된 매기의 계획을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놀라운 건 에단 호크나 줄리언 무어가 아니다. 물론 이 두명의 배우는 눈이 부시다. 정말 잘한다. 특히 줄리언 무어는 엄밀히 말해 주인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거의 극의 중심을 붙잡고 통제한다. 환상적이다. 그러나 <매기스 플랜>에서 가장 놀라운 건 그레타 거윅과 트래비스 핌멜이다. 그레타 거윅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매기 특유의 낙천성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다. 극 초반에 매기가 하는 스파이더 위킹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쾌하다. 이전까지 ‘스파이더 워킹’이라고 하면 두말할 거 없이 <엑소시스트>의 전유물이었다. ‘스파이더 워킹’이라고 하면 <엑소시스트> 이외의 다른 무엇을 떠올릴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제는 <매기스 플랜>을 먼저 떠올릴 것 같다.

트래비스 핌멜은 의외다. 매기에게 정자를 제공하는 이 천재 히피 청년은 조연이다. 제대로 등장하는 시퀀스라고 해봤자 4번 정도다. 그런데도 너무 매력적이라 보는 이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워크래프트>에서의 안두인은 여기서처럼 매력적이지 않았다. 미안하게도 갑옷을 입은 마네킹 같았다. 솔직히 그가 <워크래프트>의 안두인이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도 영화가 시작한 뒤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그는 포스트 톰 하디가 될지도 모른다. 가끔 내 예상이 들어맞을 때도 있다.

내가 시종일관 에단 호크 캐릭터에 관해 가혹하리만치 냉정한 시각을 드러내는 건, 영화를 보다가 어느 순간 나와 너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냉정하게 판단해본 나라는 인간은 아마도 저런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내가 경험한 연애들도 대개 나보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과는 안정적으로 굴러갔고 별다른 문제가 없는 사람과의 관계에선 독재자 같은 경향이 드러났었다고 말이다.

이런 타입이 많을 거라 생각하고 그래서 <매기스 플랜>이 많은 사람들의 뒤통수를 쿡쿡 찌르는 영화가 되리라 판단되지만 뭐 남의 인생이야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니 그냥 일단은 나만 그런 걸로 하자. 내게도 이 영화 속의 에단 호크와 같은 행운이 벌어질까. 아니 이건 영화니까 그냥 포기하고 더 열심히 스스로를 경계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 영화는 상상력에 기반해 만들어진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을 보다 더 냉정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객관적으로 스크린 밖을 바라보게 만든다는 거다. 나는 그래서 영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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