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복수
2017-01-18
글 : 김혜리

※<녹터널 애니멀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매기스 플랜>

“셋 중 누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매기스 플랜>을 보고 나오는 길에 받은 질문이다. 영화의 중심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매기(그레타 거윅), 존(에단 호크), 조젯(줄리언 무어)도 막상막하지만, 인공수정을 위해 매기에게 정자를 제공하는 동창 가이(트래비스 핌멜)도 만만치 않다. 이름마저 수더분한 이 남자는 얼마나 자만심이 없냐면, 수학 천재지만 광활한 진리의 옷깃만 스치는 좌절이 두려워 포기하고 수제 피클 제조를 생업으로 택했다. 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명백한 매기를 향한 우정 이상의 감정을 결코 표내지 않는다. 그러나 카메라가 그의 신실한 두눈에 한발 접근하면 관객은 털모자와 수염에 가려져 있던 상냥한 미남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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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야기 말고 다른 것에 대해 써보지 그래.”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 아냐?”

<녹터널 애니멀스>의 과거 장면에 등장하는 젊은 예술사학도 수잔(에이미 애덤스)과 작가 지망생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홀) 부부의 대화다. 남편이 좇는 불투명한 미래에 회의를 느낀 수잔은 마침내 냉정하게 이별을 통고하고 사업가와 재혼한다. 그리고 20년 후 LA의 성공한 갤러리 대표가 된 수잔의 책상에,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헌정한 미출간 스릴러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의 원고가 배달된다. 과거에 에드워드가 피력한 “모든 픽션은 작가의 이야기”라는 신념은, 그렇지 않아도 페이지 안에서 본인의 모습과 본인이 전남편에게 남긴 흔적을 찾을 수밖에 없는 수잔을, 더욱 민감한 독자로 만든다. 야심만만한 톰 포드 감독은 두 번째 장편영화를 세개의 평면으로 구성했다. LA 저택에서 독서하는 수잔의 현재, 토니(제이크 질렌홀)라는 남자의 비극을 따라가는 책 속 세계, 소설 속 인물의 감정이 고조될 때마다 수잔이 떠올리는 에드워드와 그녀의 과거가 그 셋이다. 더 넓게 보면, 커플의 계급차가 갈등 원인이 되는 전형적 멜로드라마가 범죄 스릴러의 테두리를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기본적으로 예술은 작가의 투사라는 에드워드의 입장에 따르자면 소설은 곧 고발, 반성, 객관화, 속죄, 대리만족, 방어 등등이 된다(공교롭게도 <녹터널 애니멀스>의 촬영감독 시머스 맥가비의 전작 가운데에는 유사한 테마를 보다 성숙한 매너로 다룬 <속죄>와 <디 아워스>가 있다). 그리고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의 경우는 버려진 배우자의 복수다. 작가 에드워드는 고속도로에서 건달 패거리에게 아내와 딸이 납치·살해당한 중산층 남자 토니에 본인을 투사해, 마초적 남성성이 부족하다는 이유- 수잔은 그가 약하다고 여겼다- 로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고통을 무려 장편 길이로 서술해 “당신이 내게 준 상처가 이만큼 끔찍했다”는 메시지를 송신한다. 심지어 토니가 소설의 결말에서 맞이하는 운명은 “네가 나를 떠난 이후 내 삶은 회복 불가능하다”는 단언을 암시한다. 영화의 원작인 <토니와 수잔>은 비극 이후 한동안 일상으로 복귀한 토니의 내면을 상술함으로써 이보다 복잡한 심리적 궤적을 드러내지만, 톰 포드 감독은 해당 부분을 각색에서 삭제함으로써 <녹터널 애니멀스>를 분노한 희생자의 승화된 앙갚음으로 얼마간 단순화했다. 책장을 넘기며 극중 인물의 대사와 상황으로부터 사적인 원한의 메시지를 빠짐없이 알아차리는 수잔은 당연히 몸서리친다. 하지만 세 갈래 서사를 갈아타는 구조의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고 생각해보면, 에드워드의 행위는 플래시백으로 소개된 그의 퍼스낼리티와 어울리지 않는다. 남자다움을 의심받고 아내에게 버림받은 경험은 물론 큰 고통이었겠으나, 이를 가족을 강간 살해로 잃고 파멸하는 남자의 불행과- 20년이 흐른 후에도- 동일시하는 상상력은 자기연민의 최고봉이다. 소설 속에서 갱의 우두머리 레이(에런 테일러 존슨)가 내뱉는 범죄 동기는 자못 서늘하다. “네 여자들이 나를 먼저 강간범 취급해서 거기 맞게 행동한 것뿐이야.” 이를 에드워드의 목소리로 바꿔 읽으면, 수잔의 불신이 결혼 생활 파탄의 전적이고 근본적인 씨앗이었다는 비난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감독 톰 포드가 연출을 통해 에드워드 편에서 일방적으로 수잔을 비난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했다. 영화가 다루는 (크게 보아) 두 세계 가운데 픽션의 톤은 사실적이고 생생한 반면, 현실인 수잔의 생활은 허깨비처럼 찍혀 있다. 미라 같은 메이크업을 한 수잔은 불행한 부르주아 여성의 전형적 징후를 전시하며, 물질에 홀려 과거에 그녀가 버린 ‘진정성’을 점점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혹시 톰 포드는 외면당한 남성 예술가에게 이입해 수잔을 벌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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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핑된 한 더미의 종이에 불과한 소설이 독한 복수가 될 수 있는 까닭은 단 하나, 읽는 이를 등장인물의 고통 안에 끌어들일 수 있어서다. 원작에서 토니는 범인들이 어떤 벌을 받았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자 “나와 같은 경험을 겪게 하고 싶다”고 답한다. 에드워드는 해묵은 원한을 전처에게 토로하느니 소설을 읽히는 쪽이 수잔을 훨씬 크게 타격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녹터널 애니멀스>의 재미는,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과장스럽게 시각화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아무래도 독서 체험은 영화로 옮기기에 적당한 소재다. 독자란 책을 읽으며 캐스팅 디렉터와 미술감독이 되어 일종의 영화를 머릿속에서 찍기 마련이니까. 따지고 보면 <녹터널 애니멀스>의 세 평면- 현재, 추억, 소설 속 세계- 은 모두 수잔의 의식으로 필터링된 결과물이다.원작 <토니와 수잔> 속 수잔은 <녹터널 애니멀스>를 읽는 체험을 가리켜 “당신(에드워드)과 나의 협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소설의 남성 주인공 토니는 과거의 에드워드와 동일한 얼굴을 갖고 있고, 그의 아내와 딸은 수잔과 같은 붉은 머리칼의 소유자다. 수잔은 부지불식중에 소설 속 토니를 따라 웅크리고, 샤워기 아래 서서 그가 느끼는 공포와 아픔을 맛본다. 소설에서 시신이 발견되는 소파는 수잔의 장의자와 같은 모양과 색이고, 수잔의 거실에 걸려 있는 사진 작품의 이미지는, 토니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는 풍경에 반영된다. 더욱 노골적인 사례로는 수잔이 근무하는 갤러리의 복도에 걸린 ‘복수’(REVENGE)라는 타이포그래피가 박힌 그림-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있다. 이쯤되면 톰 포드 감독이 수잔의 계급과 직업을 원작의 대학 강사로부터 성공한 아트 딜러로 바꾼 중요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상이한 차원에 속한 복수의 이야기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즐겁다. 정밀한 예술영화를 보고 있다는 착시도 생긴다. 그러나 <녹터널 애니멀스>가 제시하는 세 갈래의 이야기를 하나로 땋고 한 걸음 물러나서 조망하면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나로서는 냉소 이외의 무엇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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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나>는 2017년 현재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제출한 현황보고서 같은 모범생 영화다. 일단 이 영화는 <인어공주>와 <알라딘> <라이온 킹>으로 이어진 장편 뮤지컬들이 구가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90년대 2차 전성기를 재현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뮤지컬인지 아닌지 애매했던 <겨울왕국>이나 <정글북>의 어정쩡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모아나>는 서슴없이 뮤지컬영화의 정체성을 끌어안는다. 암초 너머의 모험을 꿈 꾸는 모아나(아우이 크라발호)가 부르는 <How Far I’ll Go>는 <인어공주>의 <Part of Your World>의 메아리이고, 반신반인 마우이(드웨인 존슨) 캐릭터는 <모아나>의 ‘지니’(<알라딘>)다.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선택받은 주인공이 모험 끝에 합당한 지도자의 위치에 선다는 내러티브는 많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식이다. 물론 중요한 업데이트가 있다. 모아나는 <겨울왕국>의 자매에 이어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종의 ‘공주’다. 캐릭터 디자인 면에서 모아나의 체격은 그나마 현실적인 여성의 실루엣에 가까워졌다. 미국 문화 바깥으로 손을 뻗었지만 서구적 편견의 투사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던 <알라딘>과 달리, 디즈니는 <모아나>를 위해 폴리네시아의 문화를 연구했고 그 유산을 물려받은 작곡가와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노력을 쏟았다. 비슷한 문화권을 배경으로 삼은 <릴로&스티치>의 경험도 무시할 수 없다. 나만의 넘겨짚기인지 몰라도 <모아나>에는 디즈니 울타리에 들어온 픽사의 성취를 흡수한 흔적도 보인다. 픽사의 단편 <파이퍼>에서 파도와 아기물새가 어울려 노는 장면이나 단편 <라바>의 의인화된 화산섬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모아나>에서 기시감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모아나>는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의 총합보다 전체가 작은 작품이다. 아마 서사나 캐릭터에 있어 어떤 리스크도 감수한 흔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 크레딧에 네명의 이름이 올라 있는 이 영화는, 그 주인공만큼 모험심이 없다.

<모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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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해적

우여곡절 끝에 파트너가 된 모아나와 마우이가 처음 맞이하는 시련은 해적선의 습격이다. 모아나가 생태계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여신에게 돌려주려는 심장을 탐내는 이들은 카카모라. 카카오 열매를 갑옷으로 쓰는 남태평양의 문화에서 힌트를 얻은 캐릭터들이다.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소통하고 인해전술로 집요하게 목표물을 좇는 모습은 다분히 ‘미니언즈’와 닮았다. 흉폭해 보이려고 갖은 분장을 했지만 카카오만 한 체구 때문에 귀엽다는 평판을 면치 못한다는 점이 애석하다. 이들은 메이크업뿐 아니라 전투를 독려하는 가열찬 북소리까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대번 연상시키는 꽤 복잡한 액션 시퀀스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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