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용철의 영화비평] 근대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낸 파열음 <여교사>
2017-01-19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처음에는 무지 복잡한 심리 상태의 인물과 마주 앉아 긴 고백을 듣는 것 같았다. 자연스레 <위험한 정사>(1987)의 알렉스(글렌 클로스)처럼 이해하기 힘든 인물의 리스트에 <여교사>의 효주(김하늘)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김태용의 영화다. 계급적이고 사회적인 무언가가 한 인물에 입힌 상흔이 분명 읽히는데 그걸 개인의 심리로만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 계급적인 것으로 읽기엔 그녀의 욕망이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크다. 그래서 난감한 심정으로 그녀를 며칠 동안 생각했다. 개봉 이후 그저 그런 치정극이란 평가가 내려지고 있었고, 김태용이 그런 의도로 <여교사>를 찍지는 않았다는 말이 생생하게 맴돌았다. 의도가 곧 영화는 아니지만 적어도 억울한 마음은 풀어줘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주인공 효주에 대해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곧바로 떠오른 건 그녀의 표정이다. 무표정에 가까워 모든 걸 체념한 듯 보이는 그 표정.

효주의 무표정은 엔딩에서 정점에 오른다.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아침, 혹은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이 지난 뒤의 아침, 그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녀의 첫 행동은 배를 채우는 일이다. 샌드위치를 꺼내 베어 문다. 가까이 접근하는 사이렌 소리에 그녀는 바깥을 바라본다. 그때 그녀는 어떤 놀라움이나 상실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아침 식사를 방해하는 무언가를 향해 무심하게 시선을 돌린다. 엔딩이 아니어도 영화 내내 효주의 표정은 무심하거나 굳어 있는 상태를 드러낸다. TV를 켜면 모두가 과장된 표정으로 고성을 지르며 상대를 억압하는 시대에 그녀의 무표정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나는 이 시대에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중이다. 계약직 교사인 효주가 학교 이사장의 딸이자 신임 교사인 혜영(유인영)에게 그리 독하게 구는 건 아마도 그녀의 달달한 표정 때문일 것이다. 힘겨운 나는 무표정 아래 마음을 숨긴 채 사는데 너는 뭐가 그리 행복해 과장된 표정으로 나를 대할까, 라는 심정. 이렇게 요란스러운 시대에야 효주가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기실 그녀에겐 한 세기를 넘어 살았던 오랜 동지들이 존재한다.

근대와 불화한 여성들

20세기 초반, 근대(혹은 근대라고 일컫는) 시기에 조선의 민중을 사진에 담은 외국인들은 조선인의 특징 중 하나를 ‘무표정’이라 했다. 이건 좀 이상한 일이다. 조금 더 시간을 돌리면 그림 속에 비친 민초들의 모습엔 풍부한 표정이 자리한다. 21세기의 한국인보다 훨씬 익살맞은 표정의 조선인들이 풍속화 속에서는 한둘이 아니다. 왜 그들은 사진기 앞에선 무뚝뚝한 표정으로 변했던 것일까. 특히 20세기 초 사진에 찍힌 서양 여성들의 화려한 표정과 비교해, 동시기 한국의 여성들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기가 일쑤였다. 그건 사진(기)이라는 근대의 물질과 마주한 불편함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근대의 시간과 관계 맺기를 머뭇거리는 이의 자세 말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여성의 숫자가 물경 수천명에 이르렀다는 당시, 사진에 기록된 신여성의 모습은 다르다. 신여성들의 표정은 다소 자연스러운 쪽에 가깝다. 적극적으로 근대라는 시간을 받아들이려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미몽>(1936)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남편에게 말 한마디 지지 않는 그녀가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는 했지만, 신여성 애순을 연기한 문예봉의 얼굴은 얼핏 관능적 매력마저 뿜는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소수의 신여성을 제외한 평범한 여성들은 굳은 표정 아래 근대의 시간이 자기 편이 아니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하녀>와 <해피엔드>, 그리고 <여교사>

박정희가 근대화를 외치기 직전인 1960년, 김기영의 <하녀>가 등장한다. 도시 아주머니들이 극장에 몰려가 “저년 죽여라”라고 외치게 만든 작품이다. 여기에 하녀로 등장하는 이은심의 표정은 굳이 말해 무표정한 건 아니다. 그러나 동식 부부로 나온 김진규와 주증녀가 보여주는 표정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과는 달리 이은심은 무심한 듯 뜻모를 표정을 지을 때가 많다. 동식의 피아노 건반을 반복적으로 두드릴 때, 이층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바라볼 때 그녀의 표정에 깃든 감정을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본 <하녀>에서 눈에 띄는 건 서브플롯인 노동자 이야기다. 동식의 음악 수업을 듣는 노동자 중 한명이 그에게 러브레터를 보낸다. 그는 풍기문란을 염려해 사감에게 편지를 가져가고, 노동자는 정직을 당한다. 수치심에 고향으로 내려간 여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 동식이 비난을 면하고 자리를 보전하는 사연이 괴상하다. 그가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돈을 계속 벌어야 한다는 거다. 동식이 하녀와 이층에서 같이 누워 있을 동안, 그의 아내도 재봉틀을 밤새 돌리며 돈 모으기에 일조한다. 근대의 시간, 이층집을 마련한 동식 부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영화에서 거의 짐승의 욕망을 지닌 하녀에게 어떤 결말이 준비되어 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자는 그 세상 속에서 살 수 없다.

<하녀>와 <여교사> 사이에 놓인 <해피엔드>(1999)에서도 보라(전도연)는 비슷한 운명에 처한다. 세 영화에서 남자를 벌어 먹이는 건 죄다 여자들이다. <해피엔드>에서 보라가 남편을 다그치는 장면에서 가스레인지 위로 주전자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해피엔드>는 근대를 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의 음악을 잔혹하게 사용한 영화다. 도입부에서 보라는 옛 연인 일범(주진모)과 관계를 맺으며 “네 몸이 너무 좋아”라고 말한다. 다음 장면에서 그녀의 남편 민기(최민식)는 헌책방에서 책을 읽는 중이다. 그는 근대의 시기에 남성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나라는 IMF 사태로 넘어갔고, 근대를 이끈 남자는 실직 상태다. 집과 가족을 책임진 아내는 연인과의 시간에서 쾌락을 찾는다. 일범의 사진첩 속 사진에서 화사하게 웃던 보라의 모습은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돌변한다. 화장실에 앉은 무표정한 여자. 가장으로서 가족을 이끄는 그녀에게 다른 욕망은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서 허락의 주체는 민기라고 불리는 남성 시스템이다. 하녀처럼 보라도 죄에 따라 ‘벌’을 받는다. 다시 말해 <하녀>와 <해피엔드>는 이층집과 아파트에 대한 열망과 욕망의 충돌이 빚은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다. 뒤틀린 상태로 근대의 시간을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21세기로 넘어온다. 시간으로 치면 <여교사>의 효주는 하녀의 자녀뻘에 해당한다. 그녀가 어떤 욕망을 품었든 나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초래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말할 마음이 당장 없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극중 ‘미친년’으로 불리는 하녀와 ‘불륜에 빠진 아내’인 보라는 근대의 시간에서도 굳건하게 가치를 잃지 않은 가족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면 제자와 관계를 맺는 ‘부도덕한 교사’이면서 종종 ‘제정신이 아닌 여자’로 보이는 효주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가. <여교사>의 태도는 당차다. 효주는 내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묻는 쪽이다. 효주에게 무표정은 버티는 태도의 다른 말이다. 무표정으로 버티던 그녀의 언니-보라와, 엄마-하녀가 죽임을 당한 자리에서 효주는 죽임을 당하는 게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서 자신이 직접 행동에 나선다. <여교사>가 욕망에 관한 영화인가 아닌가, 라는 판단 이전에 흥미를 끄는 부분은 이 영화에서 아무도 효주를 욕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직업적인 이해로 얽힌 학교 선생들과의 관계가 그러하다. 권력을 쥔 교감은 물론이고, 그녀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늘어놓는 선배나 비슷한 위치의 경쟁 관계인 동료들 모두 그녀에게 종이 한장의 너비만큼도 관심이 없다. 선생으로서 함께 길을 걸어가고싶다는 열망 따위는 그들 사이에서 처분당한 지 오래다. 더 끔찍한 건 수년간 동거해온 남자다.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인 그가 효주 곁을 지키는 건 오직 먹고살기 위해서다. 자기 손으로 밥조차 해먹지 못하는 그는 그녀가 아닌 그녀의 돈과 보호를 욕망한다. 제자인 재하(이원근)는 효주를 사랑하는 듯이 연기하는 못된 소년이다. 혜영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게임에 뛰어든 그는 효주에게 누구보다 더한 굴욕감을 안긴다. 혜영의 경우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그녀는 가진 자 특유의 관용으로 효주를 대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감정의 기복에 따라 움직인다. 그나마 그녀는 극중 유일하게 효주와의 관계를 자발적으로 원하는 인물인데, 그녀가 지닌 관계의 욕망도 알고 보면 그리 깊은 게 아니다. 그래서 나의 시선에 효주는 하나의 물체 이상이 아니다. 없어도 그만인 채 이상한 곳에 놓인 물체. 그게 그녀의 비극이라면, <여교사>의 희극은 기실 그녀가 지극히 평범한 외양을 지녔다는 데 있다. 그녀는 하층민이 아니며 동정을 살 정도로 바닥에 머무는 위치도 아니다. 딱히 말해 누군가를 질투해야 할 정도의 외모도 아니다. 그런 그녀가 이상한 심리에 사로잡혔음을 무언중에 실토한다. 결국 그녀는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거니와 이해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그것이 그녀의 슬픔이다. 여성으로서 삶과 욕망의 주체로 사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그녀는 근대적인 관계 맺기에 실패한 현대 여성이다.

제 손으로 해방을 맞이하다

이제 나는 효주가 무표정을 지은 엔딩으로 돌아온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마지막 표정에서 느껴지는 건 해방과 편안함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마지막 무표정은 바로 앞 시퀀스에서 막을 내린다고 말하는 게 맞다. 그녀는 문제의 주전자 장면에서 무시무시한 무표정을 유지한다. 나는 질문한다, 달관하고 체념한 여자가 왜 무표정한 태도로 그런 행동을 벌일까. 분노라 부르기엔 표정이 너무 흐리다. 그렇다면 그건 피곤함의 성질이 아닐까. 얼마 전 효주는 혜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직장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녀의 삶은 그런 과정의 연속이었다. 무언가 조그만 것을 지키고 소유하고 싶을 때마다 그것들은 그녀를 비웃으며 떠나거나 사라진다. 동거했던 남자가 그랬고 그녀를 속인 제자가 그랬다. 마지막 남은 직장 하나를 지키려 그녀는 얄미운 것의 집에서 하녀인 양 서 있다. 재잘거리며 삶의 가벼움을 만끽하는 혜영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효주는 자기 몸을 세우고 있느라 거대한 피곤과 싸운다. 급기야 혜영이 내뱉는 언어들은 피곤함의 극한치 위로 돌 하나를 얹고 만다. 시스템 안에서 여교사로서 살며 견딘 피곤, 그것의 폭발은 그녀가 그 ‘짓’을 하게 한다. 어떤 죽음을 끝내기 위해 그녀는 몸 안에서 가장 폭력적인 에너지를 불러낸다. 그게 너무 힘들어 숨을 헐떡인 시간이 지난 아침, 그녀는 자기가 그렇게 지키려 애썼던 자리로 돌아온다. 그녀는 샌드위치를 꺼낸다. 나는 궁금했다. 그 아침에 무슨 힘으로 샌드위치를 싼 건가, 아니면 편의점에서 사온 건가. 보는 행위는 그렇게 무심하다. 그런데 그녀가 샌드위치를 무는 순간 양상추가 내는 아삭 소리가 내 귀를 가득 때렸다. 그 소리 덕분에 그녀의 삶이 피곤함으로부터 되살아난 것 같았다. 아니, 그 생생함이 그녀의 피로한 삶에 끼어들기를 바란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소중한 것을 얻으려면 그것에 반하는 무언가를 죽여야 한다. 그 아침, 그녀는 그것을 막 해낸 이후의 시간을 산다. 세상은 죽음과 악마가 판치는 곳이지만 둘 중 더 나쁜 건 악마다. 전날 밤, 그녀는 악마를 죽여 자신은 살아남기를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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