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플랜 B
2017-01-25
글 : 김혜리

※<매기스 플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방의 푸른 꿈>

<다방의 푸른 꿈>은 김시스터즈를 회고한다. 음악인 이난영과 김해송의 딸 애자, 숙자 자매와 외사촌 민자로 결성된 ‘걸그룹’ 김시스터즈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 클럽 공연에서 인정받고 미국까지 진출했고 그들의 음악은 가요가 아니라 팝이었다. 당대의 슈프림스, 맥과이어 시스터스와 다름없는 패션과 무대 매너로 천진하고 분방한 솔을 뿜어내는 그녀들은, 국적과 시대를 벗어나 오직 ‘스테이지’라는 독립된 시공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 인용된 과거 영상자료는 세 자매를 조신하고 자랑스러운, 김치를 그리워하는 한국 여성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내 눈에 그들에게 제일 덜 어울리는 무대의상은 한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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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스 플랜>이 시작되면 카메라는 뉴욕 거리를 빠르게 걷는 여성을 뒤따라간다. 꽤나 바빠 보이지만 그녀는 횡단보도에서 시각장애 노인을 친절히 돕는다. 잠시 후 유니언 스퀘어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친구(빌 헤이더)에게 대뜸 털어놓는다. “나, 아기를 가지려고 해.” 친구는 그 아이디어가 탐탁지 않지만 매기에겐 준비된 대답이 있다. 뭐 어차피 각자 사는 거다. 오래전 애인이었던 둘은 서로의 입냄새를 점검해주며 짧은 논쟁을 마무리한다. 이 심플한 도입부는 주인공의 근본적 선량함과 과단성,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과 매기가 속한 친구 집단의 분위기를 간결하게 소개한다. 레베카 밀러 감독은, 움직이는 버스에 폴짝 올라타듯이 <매기스 플랜>을 연다. 이 속도감은 영화 내내 유지되며, <매기스 플랜>을 우디 앨런 영화와 동류라고 느끼게 만드는 특징의 하나다. 나머지 유사성으로는 언어가 중요한 영화라는 사실과 주요 인물들이 속한 계층- 뉴욕 지식인 사회- 그리고 음악을 넣는 방식을 꼽을 수 있다.

그러니까 매기(그레타 거윅)의 첫 번째 플랜은 남편 없는 출산과 육아다. 30년을 살아본 경험으로 짐작건대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관계는 본인 몫이 아니라고 판단한 매기는, 가임기 막바지에 쫓겨 정자은행을 찾느니 일찌감치 능동적으로 인생을 기획한다. 학생마냥 카디건에 롱스커트, 타이츠와 단화를 즐겨 신는 그녀는 얼핏 도전적으로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큰 문제에 있어 단호하다. 이런 자질을 혹자는 “깜냥이 된다”(capable)고 표현하고 친구들은 통제 집착(control freak)이라고 혀를 찬다. 물론 대학의 카운슬러인 매기는 양육을 감당할 생활력도 있다. 그러나 나무랄 데 없어 보였던 계획은 예상 못한 절차로 실현된다. 수학 잘하는- 유전적 플러스- 대학 동창 가이(트래비스 핌멜)로부터 정자 샘플을 받아놓고는, 유부남인 방문 교수 존(에단 호크)과 사랑에 빠져 끝까지 가버린 것 이다. 존은 같은 학계의 스타 교수인 아내 조젯(줄리언 무어)에 가려지고 치다꺼리를 도맡는 데에 지쳐 있던 차에, 본인의 로망인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알아주는 매기에게 빠져든다. 매기의 두 번째 계획, 플랜 B는 2년 후 추진된다. 이혼한 존과 결혼해 딸을 키우며 생활하는 매기는 편중된 가사 및 (존과 조젯의 자녀를 포함한) 양육 부담과 영원히 완성될 줄 모르는 존의 소설에 지친다. 게다가 실체를 마주친 조젯은 존의 묘사와는 달리 근사한 여성이다. 문제는 매기가 그냥 존을 떠나지 않고, 남편을 전처와 다시 맺어주는 ‘애프터서비스’까지 도모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극중 친구가 관객을 대신해 매기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한다. “낭비잖아.” 살면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관계 재편에 따르는 잡음과 고통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선한 의도의 오만은, 바쁜 싱글 엄마 대신 열두살부터 살림을 도맡아온 엽렵한 성격의 발로이기도 하다. 남의 인생을 대신 정돈하려는 매기의 주제넘음에도 알리바이가 있긴 하다. “모든 관계에는 장미와 정원사가 있다. 내가 정원사고 조젯이 장미다. 그런데 나는 원예에 소질이 없다”라고 토로하던 존은 매기와 재혼하자 잽싸게 장미의 자리를 차지한다. 게다가 그의 장미- 걸작 소설- 는 도통 필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존은 매기의 돌보는 천성에 기댄다. 매기와 첫 섹스를 하는 날 구애하는 존의 포즈는 엄마에게 매달리는 아들의 그것이다. 심지어 외도를 저지르고 돌아와서는 “오, 난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매기에게 답을 구한다. “그녀에게 돌아가.” “으음, 그렇게 생각해?” 아무리 직접 판 함정이라지만 다른 상대와 자고 온 배우자에게 해결책까지 알려줘야 하다니 이 순간만큼은 매기가 무척 딱해 보인다. 매기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시야를 흐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녀의 행위를 욕할 수는 있어도 그녀의 명쾌한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다. “조젯, 당신은 애정결핍에 자기도취가 심하지만 존한테는 그게 필요해요. 남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 생각만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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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와 오해의 우회로를 거쳐 궁극적으로 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매기스 플랜>은 제인 오스틴과 셰익스피어의 짝짓기를 둘러싼 고전 로맨스 희극을 연상시킨다. 매기는 <레이디 수잔>의 수잔처럼 주변 타인들의 감정을 조정하려고 들면서도 <엠마>의 엠마가 그랬듯 본인에게 가장 따스한 감정을 가진 가이는 알아보지 못한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 듯하지만 처음과는 달라지는 세 사람의 자리 바꾸기는 사랑의 묘약으로 벌어진 <한여름밤의 꿈>의 한바탕 소동같다. 과연 <매기스 플랜>에는 공원에서 <한여름밤의 꿈>을 공연하는 길거리 배우와 <엠마>의 현대판 <클루리스>에 출연했던 배우 월레스 숀이 잠깐 등장한다. <매기스 플랜>은 우디 앨런의 아류작이라기보다 앨런의 영화를 극복한 로맨틱 코미디다. 적어도 나이 많은 남성이 젊은 여성을 동경하고 대상화하는 앨런의 고착된 서사구조를 감내하지 않아도 되니 웃음이 한결 흔쾌하다. <매기스 플랜>은 트라이앵글의 중심인 남자 존의 자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매기의 계획과 조젯의 감수(監修)에 대한 이야기다. 에단 호크의 캐스팅도 적절하다. 더 높은 연령대로 설정됐다면 장년의 망연자실함 혹은 세대차에 관한 소극(笑劇)으로 변질됐을 터다. <매기스 플랜>은 어디까지나 매기와 친구들 세대의 이야기다. (적어도 미국에서) 이혼으로 부모 중 한쪽과 생활하며 성장한 예가 드물지 않은 30대, 이혼과 재결합이 흔해지고 결혼의 청산이 서로의 삶에서의 완전한 퇴장을 의미하지 않는 문화, 여성이 아이를 갖고 키우는 데에 있어 결혼이 필수적이지 않은 시대가 <매기스 플랜>을 시의적절한 장르 업데이트로 인정하게 만든다. 레베카 밀러 감독은 카렌 리날디의 미완성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자녀들 문제로 전남편과 계속 약속을 잡고 만나다보니 그냥 그랑 재결합하는 게 제일 간단하겠다 싶더라”던 친구의 경험담이 흥미로웠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요컨대 매기를 둘러싼 인물 군상이 보여주듯 연애와 우정, 이혼과 재결합이 빈번해지면서 교우 관계와 가족은 연결되고 확대된다. 현대의 로맨틱한 관계를 소재로 삼는 영화가 여기에 시선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쿨하고 현명한 현대의 연인들이 아무리 많은 함정을 예견하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워도 삶은 수습할 수 없는 속도로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래서 수정안을 요구한다. 눈 깜짝할 새 2년을 점프하고 관계의 챕터가 넘어가는 <매기스 플랜>의 편집은 이 세대가 체감하는 삶의 스피드 같기도 하다.

<컨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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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지구 열두곳에 동시출현한 외계인들의 우주선은 접시 형태가 아니다. 하얀 광선이 뿜어 나오는 창도 없다. 원작인 테드 창의 단편소설 <당신 삶의 이야기>에서 구(球)형의 ‘체경’(looking glass)으로 묘사된 이 비행체를 영화 <컨택트>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파트리스 버메트는 세로로 잡아 늘린 타원 모양으로 재해석했다. 결코 착륙하지 않는 이 우주선은, 공중부양한 거대한 암석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을 대뜸 떠올리게 한다. ‘셸’(shell)로 불리는 이 미끈하고 세련된 구조물의 디자인은 애플풍이지만 그저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니다. 방문 목적을 알 수 없는 외계인들에 대한 지구인들의 매혹과 공포는, 아름다우면서도 위협적인 셸의 반들반들한 표면과 늘씬한 형태 앞에서 배가된다. 한편 중력을 무시하고 가볍게 떠 있는 육중한 볼륨의 구조물은 지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시공 인식을 가진 존재를 이미지로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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