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금희의 영화비평]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의 한계를 명랑하게 풀어가는 <매기스 플랜>
2017-02-14
글 : 김금희 (소설가)

이렇게 말하면 낯뜨거운 일이 되겠지만 요즘 내가 심각하게 하는 고민은- 나를 포함해- 이토록 다정한 사람들의 오갈 데 없는 다정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그런 고민은 친구들의 연애 실패담과 결혼 생활의 고충을 들으며 시작되었는데 그러고보니 내 경험으로 돌아봐도 사랑이란, 연애란 그리고 결혼이란, 무언가 수탈의 느낌을 지울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를 그 수탈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가 생각해보니 다정(多情)이 병이었다.

누가 우리의 다정함을 노릴까

<매기스 플랜>(감독 레베카 밀러, 2015)에도 그렇게 해서 곤란에 빠지는 여자 매기(그레타 거윅)가 등장한다. 대학에서 예술비즈니스 강사로 일하는 매기는 이름이 비슷해 잘못 입금된 강사료 때문에 행정과에 갔다가 인류학 강사인 존(에단 호크)을 만난다. 그 뒤 공원에서 조우한 둘은 대화를 나누고 존이 매기에게 자신의 소설 원고를 읽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둘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가족으로 관계가 급진전한다. 여기서 문제는 존에게 두명의 아이와, 인류학 분야에서 존보다 훨씬 나은 학문적 성취를 이룬 아내 조젯(줄리언 무어)이 있고 매기에게는 친구의 정자를 기증- 말 그대로 육체적 접촉 없이 정자를 제공- 받아 아이를 낳고 싶은 플랜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기의 플랜을 실행한 날 밤 공교롭게도 존이 매기를 찾아와 아내와의 갈등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가련하고 슬픈 몸짓으로 구원을 요청하고, 매기가 그것을 받아들여 존과의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것은 매기의 인생에서 전혀 계획되지 않은 것이었지만 무릇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그런 우발적이고 우연한 것에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준 것이었다. 매기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사람이니까.

결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에만 몰두하게 된 존은 생활비는 물론이고 육아와 가사까지 모두 이 다정한 매기에게 기댄다. 싱글맘이었던 엄마에게서 충실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매기는 존과 조젯의 아이들까지 열심히 챙기며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더이상 이 다정함의 착취 아래 순응할 수 없음을, 자신을 인내하게 했던 사랑이라는 동력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존은 자기 연민과 욕망에 충실한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 역시 누군가를 살피고 돌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 아닌데, 그 대상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이 외도로 상처를 준 조젯이다. 신경병적이고 예민하며 냉혹하기까지 한 조젯의 평온을 위해 존은 하루에도 서너 차례 통화를 하는, 조젯을 달래기 위해 중요한 미팅도 취소해버리는 끈끈한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역설적인 건 그렇게 조젯에게 연연해하는 바로 그 순간에야 존이 가장 독립적인 인간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몇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했던 소설에서 벗어나 전공 분야인 인류학으로 돌아갈 때,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조우했다가 산에서 길을 잃고 공포에 떠는 조젯을 따뜻하게 달래줄 때 비로소 존은 그의 인생과 성취에 걸맞은 존이 된다.

마치 반사판의 거울처럼 우리의 마음이 타인에게 어떻게 가닿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규정되는 이 과정은 왜 인류가 너무나 많은 사랑과 실연의 고통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특별한 누군가를 찾아내고 그의 빈 곳을 채워주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짐작보다 문제는 더 복잡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견딜 수 없게 다정한 것- 누군가를 보살피고 도우며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강렬한 만족감- 을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나 결혼이라는 형태로 표현하게 되는 데는 모든 관계를 ‘재생산’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물신주의를 벗어나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존재의 완성에 대한 바람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다정의 구조가 일상으로 오면 아주 쉽게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며 균형을 잃어가는 것이 문제이지만.

피클맨은 알고 있다

<매기스 플랜>은 근사한 로맨스영화이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랑에 관한 냉소적인 농담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사랑을 위해 가정을 버렸던 존은 고립된 산장에서 이틀을 보내며 조젯을 다시 원하게 되고, 결혼 생활에 지친 매기는 존을 조젯에게 되돌려보낼 또 다른 플랜을 짠다. 그런데 조젯은 그 플랜에 동참하면서도 여전히 존을 어떤 ‘조련’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몇년에 걸쳐 쓴 존의 소설 원고를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그 냉혹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그 일을 계기로 존과 조젯은 진한 키스를 나누며 관계를 회복하지만.

영화에서 등장인물 모두는 사랑을 하면 할수록 그것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마치 매기와 존의 관계가 하딩과 하딘이라는 이름의 유사관계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언어적 유사성에 따른 착오, 그러니까 일종의 틀어진 유비관계일 뿐이었듯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개념과 실제 경험의 뒤틀어진 차이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차라리 속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존이 표현하듯 “사랑이다”보다는 “사랑인 것 같다”고 말하는 “언어적 콘돔” 상태를 유지해야 사랑의 실패를 안전하게 대비하거나 혹은 그 상실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지도. 그렇다면 영화는 결국 우리가 타인을 정확히 사랑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매기스 플랜>을 보면서 어떤 슬픔, 하지만 그것이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지극한 고독감에 휩싸이게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아주 다정하고 따뜻한 톤의 슬픔을 느끼게 한 장면은 피클맨의 등장이었다. 매기에게 자신의 정자를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제공하는 이 남자는 학창 시절 수학의 귀재였는데 지금은 피클 공장을 ‘전통적인 수제 방식’으로 운영하며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다. 매기가 왜 수학자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피클맨은 그런 물음이 아주 의아한 것이라는 듯 “수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어”라고 대답한다. “수학이 아름다워서 좋아한 것뿐이야.” 자신의 정액을 담을 작고 앙증맞은 플라스틱통을 들고 화장실 앞에서 피클맨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코미디 같은 상황에 웃음이 나면서도 지극히 위안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데, 어쩌면 그 말이 모든 실패한 사랑들에 주어지는 다정한 위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피클맨에 따르면 수학자의 삶이란 결국 전체를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한 대상을 평생 쫓아다니며 그 진리의 조각을 맞추려 하는 비극적 운명의 사람들이다. 피클맨이 그런 삶을 거부한 것은 그것의 본질적인 한계에 대해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렇게 완전무결한 진리를 상정하고 접근할 때 오히려 지금 나를 휘감고 있는 그 대상의 풍부하고 살아 있는 아름다움,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생생하고 분명한 감각들이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여기서의 수학은 사랑에 대한 비유로 읽혔다.

<매기스 플랜>은 사랑과 가족의 형태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며 끝난다. 분노한 존이 사라진 뒤 매기와 조젯은 같은 집에서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며 아이들을 돌보는데, 그것은 새로운 모계사회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런 장면이 약간 환상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갖는 감정, 질투나 분노, 독점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이 발생시킬 갈등에 대해 생략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연적일 수도 있는 둘이 그런 연대를 이루는 데는 어쩌면 존이 말했듯 브라질 원주민이 뉴요커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 버금가는 존재 전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화 속 인물들은 그것을 해냈고 그런 식의 해피엔딩인 듯 보이던 영화는 마지막으로 또다시 피클맨을 등장시킴으로써 명랑한 반전을 준비해둔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어딘가 사차원적인 말투와 눈빛, 겨울에도 항상 입고 다니는 쇼트팬츠, 지저분한 수염으로 친구들에게도 은근한 비호감의 대상이었던 이 남자의 등장이 나는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그 피클맨을 바라보는 매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그녀가 또다시 어떤 다정한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는 것도.

원고의 제목은 임승유의 시집 제목에서 변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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