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제46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마스터클래스 지상중계
2017-02-22
글 : 김혜리
ⓒ NichonGlerum

Olivier Assayas

장편 필모그래피

<혼란>(De′ sordre, 1986) <겨울의 아이>(L’Enfant de l’hiver, 1989) <파리의 새벽>(Paris s’eveille, 1991) <차가운 물>(L’ Eau froide, 1994) <이마베프>(Irma Vep, 1996) <우리 시대 시네아스트: 허우샤오시엔의 초상> (HHH, Un portrait de Hou Hsiao-Hsien, 1997) <8월초 9월말>(Fin aou⋎t, de′ but septembre, 1998) <감정의 운명>(Les Destinees sentimentales, 2000) <데몬 러버>(Demonlover, 2002) <클린>(Clean, 2004) <보딩 게이트>(Boarding Gate, 2007) <여름의 조각들>(L’heure d’e′ te′ , 2008) <카를로스>(Carlos, 2010) <5월 이후>(Apre‵ s Mai, 2012)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 <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 2016)

<퍼스널 쇼퍼>

지난 2월2일 오후 3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본부 안에 위치한 한 상영관의 로비는 숨을 헐떡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맞은편 파테 극장에서 <퍼스널 쇼퍼>를 관람하고 곧장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마스터클래스로 달려온 팬들이었다. 한편 당일 아침 가뿐한 행장으로 로테르담에 도착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로비 한쪽 낮은 소파에서, 베로 베이어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느긋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캐나다 영화학자이자 감독인 로버트 그레이의 사회로 진행된 마스터클래스는, 이제 30년을 맞이한 아사야스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초기작 <차가운 물>과 <이마 베프> 그리고 2010년 이후 영화 <카를로스> <5월 이후>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퍼스널 쇼퍼>의 발췌 장면을 상영하며 진행됐다. 호러, SF, 전기,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는 가장 절충주의적 현대 영화 작가이면서도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견지하는 독창성과 일관성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짐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른 체구와 사뿐사뿐한 걸음걸이, 흥분으로 살짝 더듬고 다리를 떨며 폭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아사야스의 소년스러운 풍모는 여전했다. 마스터클래스가 1시간 반 만에 마무리되자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의 입에서는 아쉬움의 외마디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차가운 물>

클립 1970년대 슈퍼마켓에서 소년과 소녀가 레코드를 훔쳐 달아나다 한 사람이 잡히기까지 한 테이크로 촬영한 <차가운 물>(1994)의 초반 시퀀스

-관객이 인물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초반 장면이다. 그럼에도 물 흐르는 듯한 롱테이크로 젊은이들의 즉자성을 담아내며 배우에게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하고 있다. 어떻게 촬영을 준비했나.

=<차가운 물>은 나의 네 번째 장편이었다. (사회자가 나직이 다섯 번째라고 바로잡자) 앗! 고맙다. 전작들에 비해 나로서는 아주 조금 더 관습적인 영화이고 두 번째 데뷔작이나 다름없다. 앞서 연출한 영화를 다 잊고 젊은 배우들과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차가운 물>은 슈퍼 16mm로 촬영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프리 도그마’(pre-Dogma) 영화다. (좌중 웃음) 35mm에서 16mm로의 이행은 마치 필름에서 디지털로 가는 일과 비슷했다. <차가운 물>은 두 판본이 있다. TV방송사의 의뢰로 TV영화 수준의 예산 안에서 50분 버전을 만드는 동시에 40분 분량을 더해 실험적인 극장용 장편을 만들었다. 당연히 세트 지을 돈이 없어 1990년대 슈퍼마켓에서 미술 작업 없이 촬영했는데 그것이 클로즈업 아니면 롱렌즈를 사용한 이유다. 배경이 흐릿해지면서 시대착오적 정보를 가려주니까. (웃음) 이 영화를 찍을 당시 비르지니 르도옌은 17살이었고 처음으로 아역을 벗어난 작품이었다. 그리고 우리 세트에서 그녀가 제일 프로페셔널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웃음) 상대 남자 주연배우는 연기 경력이 전무했다. 나는 젊은 배우들이 가진 신선한 힘을 망치고 싶지 않아 테이크 전 한두번 리허설만 했다. 이후 작품에서 나는 리허설을 점점 줄여갔으며 현재는 배우와 전혀 리허설을 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진실의 순간은 슈팅의 그 순간이다.

-이처럼 복잡한 원 테이크가 경험이 적은 배우, 스탭과 어떻게 가능한가.

=그래서 나의 방식에 익숙지 않은 스탭들과는 작업이 어렵다. 항상 같은 사람과 일하려고 애쓴다. 촬영감독은 적어도 어디서 테이크가 시작해서 끝날지 알지만, 그밖의 스탭들 특히 포커스 풀러와 붐마이크맨에게는 공포스러운 촬영이라고 할 수 있다. (웃음) 평소에는 나를 미워하지 않지만 현장에서는 상당히 괴로워한다. (좌중 폭소)

-당신의 영화는 종종 음악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1970년대에 성장하고 학교를 다닌 우리 세대에게(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1955년생이다.-편집자) 최고로 쿨한 것은 순서대로 정치, 음악, 시, 영화였다. 어려서부터 필름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꿈을 1초도 의심한 적이 없지만 그게 의미하는 바는 잘 몰랐고 10대에 가장 매혹적인 대상은 새로운 시대의 사운드트랙을 제시한 대중음악이었다. 10대 후반 무렵 시대의 화두는 펑크록이었고 우리는 그 음악의 에너지 위를 서핑했다. 현재진행형의 에너지와 관계를 보면 시네필 문화보다 인디 록과 거기 깃든 시(詩)들이 한 발짝 앞에 나서 있었다. 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나를 살아가게 하는 연료, 욕망, 영감의 원천은 음악이었다. 어울리는 친구의 대다수도 뮤지션이었고 단편영화를 처음 만들 때에도 나는 배우가 아니라 음악인들을 찾아갔다.

<이마 베프>

클립 <이마 베프>에서 장 피에르 레오가 분한 프랑스 예술영화 감독이 홍콩에서 캐스팅되어 날아온 매기(장만옥)에게 본인의 영화관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장면

-<이마 베프>의 배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장만옥은 당신에게 있어 무엇을 표상하는 배우인가.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은 해에 <동사서독>으로 영화제에 온 장만옥을 처음 만났다. 왕가위 감독을 포함해 아시아영화와 인연이 있다. 젊은 시절 평론가로 활동할 때 친구 샤를 테송과 함께 <카이에 뒤 시네마>의 특집호를 편집하며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을 만났고 그 결과물은 서구 영화 언론에 일종의 현대 아시아영화 로드맵이 됐다. 아시아영화로부터 큰 영감과 흥분도 물론 얻었다. 장만옥이 준 충격은 그녀가 완전히 모던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동시대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동시에 장만옥은 스타였다.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스타와 영화를 찍어본 적이 없었고 스타덤의 현대적 화려함(glamour)은 내 영화 세계의 일부가 아니었다. 만약 스타와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종류일까 상상해보았다. 사실상 영화는 제작비, 배우의 유형, 테크놀로지 같은 조건의 인질이다. 스타 배우와 영화를 만들면 유명세와 스타덤의 섭리가 따라온다. 예컨대 내가 만약 중국의 영화감독이었다면 내 영화는 현재와 매우 달랐을 것이다. 이러한 제작 환경의 울타리를 부수는 작업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친구 클레어 드니 감독이 ‘호텔 룸’이라는 느슨한 컨셉으로 옴니버스영화 기획을 제안해왔다. ‘파리의 이방인’이라는 컨셉으로 나와 드니, 아톰 에고이얀이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장만옥과의 만남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쓰다가 단편보다는 더 강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던 차에 나머지 두 감독이 장편 프로덕션에 들어가면서 기획이 무산됐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디어를 놓지 않고 9일 동안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당시 프랑스영화계에서는 사라진 실험적 형식이었다. 1960년대 콜라주 영화 정도가 비교할 만했다. 탈고하고 캐스팅을 위해 홍콩으로 가서 당시 스타들을 거의 모두 만났다. 단, 장만옥만 빼고. 홍콩 영화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녀는 이제 연기를 하지 않는다. 홍콩에서 살지도 않을 거다. 잊어버려라”라고 손을 저었다. 귀국 전날 1984년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맨 시절부터 알고 지낸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과 통화를 하며 술자리 약속을 잡다가 장만옥 이야기가 나왔는데 대뜸 “그럼 같이 마시지 뭐” 했다. (좌중 폭소) 그날 저녁 정말 장만옥과 어울려 영화를 소개하고 시나리오를 건넨 후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같이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웃음)

-영화 스타들은 연기자인 동시에 아이콘으로 기능한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장 피에르 레오를 극중 예술영화 감독 역으로 캐스팅한 의도는.

=누벨바그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보면 장 피에르 레오와 작업한 자크 리베트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했다. 장 피에르 레오는 <이마 베프>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스파크였다. 장만옥이 파리에 온다면 무슨 일을 할까. 배우니까 영화를 찍겠지. 어떤 부류의 영화? 장 피에르 레오가 감독하는 영화. 여기까지 생각이 연쇄되자 내 손 안에 코미디 한편이 떡하니 있었다. (좌중 폭소) 이 배우가 만드는 절묘한 어색함, 영화의 톤이 바로 나와버렸다. 결국 나는 장 피에르 레오를 누벨바그의 아이콘인 실제 장 피에르 레오로서 활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나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유사한 작업을 했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줄리엣 비노쉬, 크리스틴 스튜어트, 클로이 머레츠 캐릭터는 셋 다 현실의 본인 더하기 다른 누군가다. <이마 베프>의 매기도 마찬가지다. 그때 영화는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기능하게 된다.

-프랑스의 풍부한 영화 문화는 필름메이커로 성장하는 데에 유리해 보인다. 당신의 경우는 어땠나.

=깡촌에서 자라 10대 후반 파리로 이주한 나는 좀 늦게 혜택을 봤다. 고향에서는 멀티플렉스의 원형 같은 극장에서 매우 보편적인 영화만 볼 수 있었고 집에는 조그마한 흑백 TV만 있었다. 파리에서 살게 됐을 때 당연히 흥분했다. 영화사에 관한 내 관심을 채워줄 시네마테크와 수많은 고전을 상영하는 극장이 있었고 1970년대에 최대 이슈였던 미국영화도 훨씬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25년 인생 동안 단 한번도 비평가가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앙드레 바쟁이 설립하고 내가 존경하는 많은 감독이 이력을 시작한 잡지가 궁극적으로 영화 만들기로 통하는 문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참여했다. 수혜는 컸다. 비평가로서 젊은 나이에 숱한 영화제에 가서 파리에서도 볼 수 없는 전세계의 미개봉 독립영화를 보는 특권을 누렸다. 나의 영화적 지평이 갑자기 확장된 것이다. 내가 영화를 시작했을 무렵 영화는 지금만큼 학술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당시 젊은이들이 시네마의 자유로움에 끌려 입문했다면 지금은 아주 우수한 영화학도여야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지금의 환경이라면 난 아마 영화를 못 만들었을 거다. 좋은 학생이 아니었으니까. 운이 좋았다. 시나리오작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여름방학 때 촬영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웠다. 누구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기술은 며칠이면 습득할 수 있었다. 관건은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성립하게 만들 것인가, 필름메이킹 안에서 자신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찾는 것이었다. 영화산업의 일원이 되기보다 세상에 관해 배우고 시네마보다 길고 거대한 역사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필름스쿨도, 대학도 무척 가기 싫었다. 부모님만 동의했다면 대학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에서 불문학과 회화를 공부했는데, 시네마의 지평 바깥의 무엇을 배워 나의 예술에 더하고 싶어서였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내게 사람들은 “그럼 제2 조감독을 잘해서, 제1 조감독이 되고 신용을 쌓아라”라고 조언했지만 그에 대한 내 반응은 “퍼, 퍼, 퍽 유!”였다. (좌중 폭소) 나는 훌륭한 조감독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쁜 단편영화를 감독해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싶었다. 결국 단편을 찍었고 첫 결과물은 끔찍했다. 두 번째는 별로였고, 세 번째는 절반쯤 괜찮았고 네 번째도 형편없었지만 일부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좌중 박수)

<카를로스>

클립 <카를로스>의 초반 국제석유기구 테러를 재현한 장면

-<카를로스>는 3부작 TV시리즈이면서 5시간 반짜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어떤 식으로 준비했나.

=그때까지 내가 배운 필름메이킹의 모든 것을 쏟아넣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제작사가 고용한 저널리스트의 작업을 참고해 방대한 리서치가 더해졌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일명 자칼, 카를로스라 불리는 베네수엘라 출신 테러리스트. 현재 프랑스 감옥에서 복역 중이다.-편집자) 같은 예민한 주제를 다룰 때에는 정확해야 한다. 직접 목격자의 증언으로 확인된 팩트를 갖고 최대한 사실에 가깝도록, 그래서 관객이 전체 상을 스스로 그릴 수 있도록 찍었다. <카를로스>는 액션영화이기도 하지만 판타지적 액션보다 팩트에 충실했다. 그래서 OPEC 습격 시퀀스를 찍으면서 거꾸로 내가 당시 상황의 속도감과 살벌함을 실감했다.

-편집 작업 중 편집실에 항상 있나.

=나는 내 영화의 편집에 반드시 참여한다. 각본, 연출 외에 영화계에서 보수를 받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함께 일한 편집기사들, 특히 <5월 이후>까지 내 모든 영화를 편집한 고 뤽 바르니에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뤽은 내가 없을 때는 한컷도 건드리지 않았다. 나의 모든 테이크는 반복이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에 편집할 때는 찍힌 모든 푸티지를 봐야 한다. 그러나 데일리(당일 촬영분)는 보기 싫어한다. 데일리를 보기 시작하면 내가 시네마가 아니라 무비를 만들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워서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사태의 본질은 나중에 볼 때 진면목이 드러난다.

-카를로스 역의 에드가르 라미레스도 앞서 말한 대로 배우에게 이미 있는 속성을 살린 경우 같다.

=당시 나는 <카를로스>를 하기 싫어서 빠져나갈 핑계만 찾고 있었다. 이미 카를로스의 속성을 갖춘 배우가 없으면 못한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육체적 카리스마, 연령, 베네수엘라 억양의 스페인어를 구사하고 유창한 영어와 약간의 불어, 아랍어 능력이 필요했다. 에드가르 라미레스가 유일하게 새로 갖춰야 했던 조건은 아랍어뿐이었다. 미팅을 가지는 순간 그에게 유럽 좌파를 매혹한 제3세계 전사인 카를로스의 모습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내게 카를로스는 뭐라고 말해도 냉혈한 살인자였다. 그는 어젠다가 다른 고용주를 갈아타며 용병처럼 폭력을 썼다. 복역 중인 카를로스를 면담하지 않은 것도 만나고 나면 의욕이 더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내게 있어 커다란 이슈는 과연 내가 인생의 2년 정도를 이 인물과 보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에드가르처럼 적역의 배우는 그런 무게를 감독인 내 어깨에서 덜어줄 수 있었다.

ⓒ BasCzerwinski

클립 <5월 이후>에서 젊은이들이 잔디밭에서 노래하며 대화하는 장면

-68혁명 이후 매우 정치적인 시대의 젊은이들을 담은 영화다. <차가운 물> <카를로스>와 동일한 연대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차가운 물>이 자기파괴적 충동, <카를로스>가 폭력적인 냉소주의자를 통해 70년대를 돌아봤다면 <5월 이후>는 내가 사적으로 경험한 70년대에 가장 가까운 영화다. <카를로스>를 만든 다음 나는 그 시대에 전혀 시니컬하지 않은 관대하고 시적인 아름다움도 존재했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와 물질세계가 밀고당기며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 오늘 영화제에서 상영된 <퍼스널 쇼퍼>와의 연관도 보인다.

=<5월 이후>는 나 자신의 청춘과 재접속하고 새로운 젊은 배우와 만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퍼스널 쇼퍼>는 고독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1970년대보다 지금의 우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힘을 합치기 더욱 어려워졌다. 세계는 보다 경쟁적이고 생계와 직업이 최우선이며 현대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접근권도 모두 돈을 포함한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가장 좋은 부분은 물질 바깥에서 다른 인간과 커넥션을 맺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에 있음을 <퍼스널 쇼퍼>의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경험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5월 이후>의 청년들과 달리 연대하기 어렵다고 보나.

=그렇지 않길 바란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 우리는 많은 정치운동을 간절히 필요로 하니까. 나는 60년대 말 청년들의 급진적 에너지가 혁명이 포기된 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문화 속에 머물렀다고 본다. 1970년대 이후 정치적 신념들은 당연히 바뀌었다. 그때는 모퉁이만 돌면 혁명이 있을 거란 의식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건강한 기류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객석으로부터) 1970년대 이상주의 다음에 레이건 시대가 도래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한다면? 트럼프와 브렉시트 이후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나.

=지금이 1980년대보다 더 나쁘고 공포스럽다. 영화 만들기는 시대에 대한 질문이지 대답이나 조언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내가 적어도 확신하는 바는 우리 모두 최대한의 정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비롯해 무책임한 행태의 수준이 정상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시위하는 것뿐 아니라 개인이 현대사회 정치에 대해 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구조화된 사고력을 다져야 한다. 꼭 마르크시스트나 네오마르크시스트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향후 몇년간은 개인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내겐 개인의 힘에 대한 신뢰가 있다. 영화 만들기도 원칙적으로 현대사회에 대해 질문하고 꿰뚫어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독립영화의 생존은 무척 중요하며 어떤 면에서는 시네마의 정치적 의무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로테르담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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