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흑인영화, 퀴어영화, 성장영화 등 다양한 분류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시놉시스만 읽으면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영화를 목격하고 난 뒤 이 영화를 장르의 틀에 넣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가히 올해 아카데미의 발견이라 해도 좋을 <문라이트>는 여러 가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두 번째 장편영화를 통해 일약 주목받는 감독의 반열에 오른 배리 젠킨스는 형식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흥미로운 접근들을 과감히 시도한다. <문라이트>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써내려간 한편의 시라고 해도 좋겠다. 인생의 길목마다 살아 숨쉬는 시적인 장면과 리듬들이 영화적 마법의 순간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인가. 배리 젠킨스의 향후 행보가 더 궁금해지는 영화 <문라이트>가 남긴 한장의 이미지,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것은 성장담이 아니다. 차라리 타인의 강요가 개인의 갈망을 어떻게 억누르는지에 대한 기록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소년은 흑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마약중독자다. 게다가 뭐가 문제인지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주변으로부터 ‘호모’라고 괴롭힘을 당한다. 여기까지만 듣고도 소년이 앞으로 어떤 시련을 겪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은 차별받기 위해 세상에 던져진 것처럼 홀로 외롭게 서 있다. 성소수자, 게다가 불우한 가정의 흑인 소년의 앞날에는 숱한 이야기가, 이미 반복해왔던 비극과 불행이 깔려 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이것은 성장이 아니다. 타고난 색을 부정 당하고 덧칠되는 과정, 왜곡과 뒤틀림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억압의 시선과 숨 막히는 공기 앞에 버티고 선 소년의 쓸쓸한 걸음걸이는 어디로 이어질 것인가.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 불리는 소년
배리 젠킨스 감독은 자신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타렐 알빈 매크래니의 연극 각본을 골랐다. ‘달빛 아래에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는 원작의 제목은 그 자체로 내용을 오롯이 함축하고 있다. 시와 같은 한줄의 문구를 2시간의 영상으로 풀어놓은 것이 영화 <문라이트>다. 우선 샤이론이란 소년의 삶을 3장으로 구분한 구성이 이채롭다. 1장 리틀, 2장 샤이론, 3장 블랙이란 소제목은 한 소년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살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나눠 담는다. 그러니까 이건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상황과 반응의 조각들이다. 리틀과 블랙은 샤이론의 별명에 불과하지만 이름이란 때론 존재를 지배하기도 한다. 리틀은 리틀에 어울리는 삶, 블랙은 블랙으로서의 삶을 각각 강요당하는 것이다. 1장은 한 흑인 소년이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해 도망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작고 왜소한 체격 때문에 리틀(알렉스 히버트)이라고 불리는 소년 샤이론은 마약을 파는 거리의 빈집으로 도망치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마약 거래상 후안(마허샬라 알리)은 비밀창고로 쓰던 집의 창문을 뜯어내며 햇살과 함께 등장한다. 그 순간부터 후안은 소년의 안식처이자 숨구멍이 되어준다. 여기엔 딜레마가 있다. 리틀의 어머니가 아이조차 돌보지 않고 마약중독자가 되어가는 건 후안 같은 마약상 때문이다. 하지만 후안은 리틀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소년은 지금 상황도,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혼란스럽다.
2장에서는 청소년기를 그리는데 상황은 한층 악화되어 있다. 어머니의 마약중독은 심해졌고 샤이론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도 철저히 배척당한다. 유사 아버지 역할을 했던 후안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유일한 위안은 친구인 케빈과 후안의 여자친구인 테레사(자넬 모네)뿐이다. 테레사는 첫 만남부터 샤이론(애슈턴 샌더스)을 “리틀 대신 샤이론이라고 부를게”라고 말을 건네준 사람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두 사람 덕분에 근근이 일상을 버텨내지만, 곧 샤이론이 마이애미를 떠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렇게 10년 후 샤이론은 3장에서 블랙(트래반트 로즈)이 되어 돌아온다. 소년원을 들락날락하는 사이 어느새 후안처럼 마약상이 된 블랙은 우리가 알던 샤이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누구도 자신을 괴롭힐 수 없을 만큼 강인한 육체를 얻었지만 매일 밤 악몽을 꾸는 블랙에게 연락을 끊고 살았던 케빈의 전화가 걸려온다.
3막 구도만 보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가 떠오를 수도 있다. 주제를 보면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과 겹쳐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라이트>는 성장담도 아니고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각각의 상황들이 그려내는 교집합은 집단에서 배척받는 소수자라는 지점이다.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 흑인,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소년을 집단의 주변부로 밀쳐낸다. 여느 영화라면 이때 소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집중할 것이다. 환경의 압박에 저항하는 투사가 될 수도 있고, 주변의 압력에 일그러진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배리 젠킨스 감독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두 가지 명제를 병치시키며 이 소년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얼마나 부당하고 불온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하나는 후안의 옛이야기와 함께 들려주는 “달빛 아래에서는 모두 푸르게 빛난다”는 진실, 다른 하나는 “어느 순간 너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온다. 그 결정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말라”는 후안의 조언이다. 1장에서 후안이 샤이론에게 건네는 두 가지 명제는 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호소이며 영화가 끝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문라이트>는 샤이론이란 소년의 심리변화를 그리 섬세하게 그리지도, 중요하게 묘사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흑인 소년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편견과 압박의 환경이다. 도리어 샤이론의 심리는 도리어 이를 드러내기 위한 리트머스지 또는 배경인 셈이다. 전작 <멜랑콜리의 묘약>에서 흑인 남녀의 발걸음을 빌려 샌프란시스코를 촘촘하게 훑었던 배리 젠킨스 감독은 이번엔 수천개의 세상들이 충돌하는 마이애미의 공기를 빌려 다양성, 차별, 차이 등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말의 온도들을 더듬는다. 샤이론이 적극적인 저항 없이 1차원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에 머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샤이론은 개별인격인 동시에 억압된 소수자로 상징되는 표상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살고 있던 작은 소년이라 해도 좋겠다. 때문에 이 영화를 성장담이나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단정짓는 건 영화의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행위다. <문라이트>는 소수자들의 사연을 통해 보편적인 감성 안쪽까지 건드리는 영화다. ‘달빛 아래에서 모두 푸르게 빛나는’ 이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한편의 시라고 표현하는 쪽이 좀더 적절할까. 푸른빛 아래에선 모두가 평등하게 평화롭고 그래서 더 슬프다. 그 짧디짧은 매직아워에 도달하기까지, 샤이론 아니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잔혹한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압력을 목격하고 소년과 함께 버텨내야 한다.
배리 젠킨스는 왜 카메라를 흔드는가
<문라이트>가 북미 평단의 호평 속에 아카데미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주제보다는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이 상투적이고 익숙한 비극, 다양성에 대한 화두를 풀어나가는 배리 젠킨스의 연출은 온전히 ‘배리 젠킨스적’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서사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인데 형식적인 운율도 그렇고 내재적인 구성도 그렇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구축된 장면들은 구체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대한 반응 내지 감흥에 가깝게 그려진다. 누군가는 이를 ‘영화적’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눈을 사로잡는 건 기계적일 만큼 상징화된 색채들이다. 해방과 자유, 평등의 색깔인 푸른색은 주로 편안하고 위로를 받는 공간에서 사용된다. 반면 억압의 색깔인 붉은색은 어머니에 대한 악몽, 자신을 공격하는 친구의 의상 등 적대적인 상황에 부여된다. 한편 이 영화는 화이트에서 블랙으로 찌들어가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1장에서 마약한다고 TV까지 내다판 어머니에게 상처받고 흰 욕조에서 하얀색 거품목욕을 하며 마음을 달래던 샤이론은 “다른 아이들이 너를 괴롭히도록 놔두지 말라”던 친구 케빈의 조언에 따라 3장에선 마약상 블랙으로 변한다. 블랙은 본인이 타고난 색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주변에서 덧씌운 색이다. 이러한 도식적인 색채의 배치는 설명이 부족한 영화의 상황들을 직관적인 이미지 형태로 투사한다.
적재적소의 음악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카에타누 벨로주의 <쿠쿠후쿠쿠 팔로마>를 비롯해 영화 속 사운드로 등장하는 배경음악들은 그 어떤 대사보다 인물의 감정과 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령 마약중독치료소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에 <쿠쿠후쿠쿠 팔로마>가 흘러나오고 영화는 달빛 아래 뛰어노는 소년들의 모습을 오버랩한다. 이때 영화는 처음으로 달의 형체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 시리도록 슬프고 평등하며 맑은 빛이 모든 상처를 쓰다듬는다. 이건 서사적인 맥락이라기보다는 인물의 심상을 투영시킨 연결이다. <문라이트>는 전반의 서사보다 강렬한 어떤 순간, 이미지, 인상 등으로 뇌리에 각인되는 영화다. 어쩌면 소수자에 대한 견고한 편견 속에 자유로운 해방의 순간들은 이러한 시청각적 언어를 통할 때라야 허락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문라이트>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바로 배리 젠킨스의 카메라다.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제임스 랙스턴 촬영감독은 공간을 그려나가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데, <문라이트>에서는 핸드헬드 기법을 통해 인물이 마이애미 한구석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것 같은 감각, 즉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집요하게 인물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 덕분에 종종 정면에서 잡은 배우의 표정보다 뒤통수에서 훨씬 풍성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몇 가지 다른 기법이 섞여 들어가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배리 젠킨스는 몇 가지 제한된 형식을 고수하지 않고 다양한 문화와 원색이 공존하는 마이애미처럼 여러 가지 기법들을 뒤섞는다. 때로는 정물화처럼 배경과 인물의 색감을 잡아내기도 하고, 어쩔 땐 미친 듯이 카메라를 회전시키며 인물의 주변을 뱅뱅 돌기도 한다. 심지어 포커스가 나가는 것 따윈 상관없다는 듯 클로즈업과 핸드헬드를 결합시킬 땐 어지럽기까지 하다. 동적인 다큐멘터리에서 정적인 정물화까지 극단에 있는 기법들을 마구 끌어들여 하나의 프레임 안에 녹여낸 카메라는 일견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것이 배리 젠킨스라는 이름으로 정리되기 시작할 때 영화는 놀라운 리듬감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일련의 복합적인 움직임을 단 몇 마디로 정의내리긴 어려울 것 같다. 영화 전반의 압축적 묘사들에 대해선 좀더 섬세하고 긴 장면분석이 필요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영화의 카메라 움직임은 ‘배리 젠킨스의 핸드헬드’라고 불러도 무방할 통일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덴의 핸드헬드가 정보를 차단하고 인물과 시선을 일치시켜 답답함을 전염시켰다면, 배리 젠킨스의 핸드헬드는 인물의 감정을 카메라 움직임에 투사해 일렁인다. 극도의 분노 상태에선 주변이 느려지기도 하고 혼란스러울 땐 어지럽게 휘청거리기도 한다. 다큐의 리얼리티보다 클로즈업의 감정이 훨씬 진하게 묻어나는 기묘한 결합은 때때로 지나치게 솔직해 귀엽고 재미있을 정도다.
이 영화를 ‘시적’이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종종 과잉처럼 보이기도 하고, 카메라가 앞서 나가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감독의 개성이 카메라를 통해 발현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좀더 주목해야 한다. 배리 젠킨스 감독의 미래를 몇몇 호사가들의 표현처럼 섣불리 ‘천재’ 라는 칭호로 가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럼에도 배리 젠킨스가 작가적 씨앗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씨앗이 어떻게 피어날지 당분간 지켜보고 싶어졌다는 것만으로 일단은 만족스럽다. <문라이트>는 강렬한 이미지의 영화다. 일련의 압축적인 이미지들에 대해 긴 해석과 첨언을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직관적으로 망막에 각인된 푸른빛, 달빛 아래 슬프고 아름다운 해방의 순간에 좀더 오래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어쩌면 이 땅의 모든 비정상들에게 필요한 건 투쟁에 동참을 호소하는 강인한 목소리가 아니라 숨통을 틔워줄 짧은 위로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진실의 이미지인지 혹은 또 다른 기교에 불과한지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에게 이 영화를 기꺼이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