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을 만한 시상식인 건 분명했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작품상 발표를 번복하는 사상 초유의 사고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발표자로 나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의 배우 페이 더너웨이와 워런 비티는 <라라랜드>를 작품상으로 호명했지만 <라라랜드> 제작진이 무대 위로 올라와 수상 소감을 말하는 와중에 발표가 잘못되었다며 수상작을 <문라이트>로 정정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아카데미쪽은 이번 사고가 수상 결과가 적힌 봉투를 잘못 전달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아카데미는 그 밖에도 지난해 10월 타계한 호주의 의상 디자이너 재닛 패터슨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생존 인물인 프로듀서 얀 채프먼의 사진을 잘못 올려 질타를 받는 등 크고 작은 실수와 사고로 체면을 구겼다.
올해 아카데미는 반트럼프 행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트럼프의 차별 정책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 진행자 지미 키멀 역시 “올해 오스카의 인종차별은 트럼프 덕분에 사라졌다”며 트럼프를 조롱했다. 하지만 평소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적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그의 풍자는 도리어 우스꽝스럽다는 지적을 받았다. 게다가 시청률마저도 소폭 떨어져 최근 10년간 가장 낮은 수치인 22.4%를 기록했다. 이에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오스카가 너무 정치에 집중해 실수를 저질렀다”며 또 한번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아카데미가 선보인 의미 있는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흑인 성소수자의 성장을 다룬 <문라이트>의 작품상을 시작으로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 감독은 각색상까지 받았으며, 마허샬라 알리와 비올라 데이비스 두 흑인 배우가 각각 남녀 조연상을 수상했다. ‘백인들만의 잔치’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최소한의 발판은 마련한 셈이다. 이민자 지원활동 중인 미국시민자유연합(ACLU)에 대한 지지를 뜻하는 파란 리본과 함께 <문라이트>의 푸른빛으로 평등해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