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웅은 자신만의 화법을 분명히 가진 배우다. 그 화법은 일상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자, 이런 얘긴 어때요. 자, 이런 얘기도 있어요. 마치 무수한 예시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듯 운을 뗀 다음엔 과거의 상황을 그대로 복사하듯 묘사하기 시작한다. 가능하다면 상황 속 인물의 성대모사까지 서슴지 않는다. 청자를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일 줄 아는 타고난 배우의 느낌이랄까. 여러 작품에서 조진웅은 배역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관객이 한눈팔지 않도록 장면을 장악해왔다. <해빙>에서도 조진웅은 혼자서 많은 장면을 이끌어간다. 전락한 중산층의 얼굴을 대변하는 승훈 캐릭터는 이제껏 조진웅이 연기해온 캐릭터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뽐냈던 공격적 캐릭터들과 달리 승훈은 스스로 불안함에 잠식되는 인물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조진웅의 표정이 영화에 길게 여운을 드리운다. 다작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조진웅과 <해빙>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해빙>의 시나리오를 읽고 흥미로웠던 지점은 뭐였나.
=책 좀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책방에 가서 하나 꺼내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쭉 읽게 되는 책이 있지 않나. <해빙>은 딱 그런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다. 감정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야 했던 작업이었다. 내면의 충돌, 거기서 삐걱삐걱 나오는 감정들을 느끼며 연기해야 했는데 그게 또 신명나게 재밌었다. 이번 작업 과정은 전체적으로 특이했다. 말하자면 콘티에는 ‘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는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못 들어가고 신발장 앞에 앉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때의 감정이 그랬다. 몸이 그렇게 반응했다. 그러면 카메라도 거기 멈춘다. 그 감정을 따라서.
-콘티에 충실한 연기를 할 수 없었다는 건데.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든 아니든 그 상황에서 승훈이 느끼는 불안한 감정이 전달되는 게 중요했으니까. 분명 콘티를 짤 때는 동선이나 그에 따른 타이밍 등 여러 가지 고려 사항들을 반영했겠지만, 현장에선 심리묘사가 물리적 상황을 커버하는 때도 있었다. 가만있어봐. 그런데 지금 내가 연기 잘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웃음)
-승훈은 강남에서 개업했다 실패하고 아내와도 이혼하고 변두리로 밀려난 의사다. 이 인물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핵심 키워드는 뭐였나.
=간단했다. ‘남 일 같지 않구나!’ 남 일 같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단순한 논리로 접근했다. 이건, 잘나가던 배우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서 한순간 전락해 지방 극단에서 연극을 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분명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우리 와이프는 집에 찾아와 김치는 넣어줄 것 같긴 하다. (웃음)
-의사 캐릭터를 연기하는 과정에서 사전에 숙지하고 익힐 것들이 있었을 것 같다. 영화에선 내시경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이 인물의 직업적 전문성이 캐릭터의 심리를 뒷받침해주는 무언가로 작용하진 않는다. 그래서 별로 준비하지 않았다. 그게 경제적으로 연기하는 거다. 내시경을 하는 장면이 있긴 하나 자료를 찾아보는 정도였지 직접 의사를 인터뷰해서 내시경할 때 손 꺾음이 어떻게 되는지까지 연구하는 건 좀…. (웃음) 그런데 내가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것 같았는지 연출부 막내가 직접 내시경을 받아서 그걸 동영상으로 찍어서 가지고 왔다. 환자는 어떻게 누워 있는지, 의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이거라도 좀 보세요, 하는 투로 동영상을 던져주고 가더라. (웃음) 그들의 희생으로 구한 귀한 자료가 큰 도움이 됐다. 연출부 스탭들한테 술을 많이 사줬는데, 그런 모습들이 얼마나 예쁜가.
-지금까지 공격적인 캐릭터, 공격적인 연기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해빙>의 승훈은 기본적으로 피로한 인물인 데다 욕망이나 에너지를 분출하는 장면도 거의 없다. 명쾌한 연기보다 중의적 의미를 담은 모호한 연기가 필요한 지점이 있었는데, 기존에 연기한 캐릭터들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있었나.
=접근법은 비슷했던 것 같다. 대사나 액션으로 에너지를 겉으로 뿜어내지 않는다뿐이지 그 속에는 훨씬 진폭이 큰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다. 말없이 아이의 사진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든지, 무언가 얘길하는데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린다든지, 그런 표현을 하게 되는 건 감정의 진폭 상태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배가 있었는데 말을 무척 잘 듣던 학생이 느닷없이 반항을 한 거다. 그때 선배가 실어증을 겪었다. 말을 할 때도 통합체적 사고를 못했다. 나중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는데 그때 자신이 말을 안 했는지 몰랐다고 하더라. 극한의 상황을 겪었을 때 그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승훈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상당히 경제적이고 논리적인 배우다. 그게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성적으로 작품에 접근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힘들어질 수도 있다. 이번 작업 역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었다.
-의심과 불안에 휩싸인 인물을 연기하다보면 촬영 기간 동안 캐릭터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다.
=그걸 스트레스로 느낄 것이냐 아니면 연기를 통해 통쾌함을 느낄 것이냐, 그건 백지 한장 차이지만 배우에겐 중요한 지점이다. 연기를 통해 통쾌한 지점을 맞닥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 못한다. 예전에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을 할 때 우는 신이 많아서 3개월 동안 매일 울었다. 그러니까 상이 변하더라. 난 너무 즐거운데 “어디 안 좋으세요”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때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픽션이고 극놀음인데, 그 안에 들어가서 사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그건 아주 간단한 논리로 가능하다. 국어 시간엔 국어만 하고 수학 시간엔 수학만 하면 된다. 연기할 땐 연기만 하고 다른 거 할 땐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수학 시간에 국어 가지고 와서 전 시간에 국어 다 못 끝냈다고 국어 공부하기 시작하면 엉망이 된다. 다작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다.
-혼자서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들이 많아서 작업하는 동안 1인극을 찍는다는 느낌도 들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
=실제로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도 결국 승훈에겐 필요한 거였다. 그 외로움을 견디는 과정에서 스탭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촬영장에 배우가 많지 않아서, 가끔 배우들이 오면 손님 모시듯 했다. 오셨어요? 잘 왔어. 벌써 끝났어? 잘 가. (웃음) 이정숙 분장실장과 김하경 의상실장이 나랑 한잔하느라 고생 많았다. 이수연 감독님, 엄혜정 촬영감독님은 회의하고 작업 준비하느라 바쁘고, 함께 술 마실 배우들은 없고. 두 실장님께 참 고맙다. (웃음)
-김대명 배우와의 대화 신들이 좋았다. 평범한 대화 신임에도 두 배우의 호흡만으로 영화의 공기가 바뀌는 느낌이었다.
=이런 얘기까지 하면 그렇지만 대명씨와 “대충 하자” 그랬다. (웃음) 일상적인 대화인데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의미를 두면 둘수록 숨도 못 쉬는 상황이 돼버리니까. 그리고 이렇게 배려를 많이 하는 친구는 처음 봤다. 배려가 많다는 건 상대배우가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준다는 거다. 그런 것들이 시너지라 생각한다. 물론 서로가 이 장면의 최종 목표가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감히 대충 하자는 얘기도 할 수 있는 거다. 대명씨는 기본적으로 착한 걸 넘어 선한 사람이다. 살면서 했던 가장 큰 일탈이 뭐였냐고 물었더니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거라더라.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이런 크리스털 같은 친구를 깨뜨리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집에 일찍 보냈다. (웃음) 어쩜 그렇게 착할 수 있는지.
-현재 <공작>을 촬영 중이다. 윤종빈 감독과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2011), <군도: 민란의 시대>(2014)에 이어 연이어 함께 작업하고 있다.
=<공작>에선 대북공작전을 기획하는 총책 역을 맡았다. 정치적 신념이 굳건한 인물이다. 이번에 황정민, 주지훈 배우와 처음 작업하게 됐는데, 굉장히 에너지 넘치고 열정적이더라. 우리 이 장면 만들러 왔잖아, 작살내고 가자! 그런 코드가 서로 딱 맞았다. 이성민 선배는 전작 <보안관>(감독 김형주)도 함께했고, 서로 ‘듣보잡’일 때부터 드라마를 같이했으니 관계가 오래됐다. 그리고 윤종빈 감독과의 작업에선 나한테 캐스팅 권한이 없다. (윤종빈 감독이) “형님, <보안관> 하시고 <보안관> 끝나면 <공작> 하시면 돼요.”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거다(<보안관>도 윤종빈 감독의 제작사 영화사 월광의 작품이다). 이런 상황들이 너무 코미디 같지 않나?
-<보안관>과 <대장 김창수>(감독 이원태)의 촬영도 마쳤다. 어느덧 열일하는 배우의 대명사가 됐다.
=연기하려고 배우하는 거니까. 직장인들도 매일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지 않나. 똑같은 거다. 작업이 재미없으면 안 할 텐데 너무 재밌다.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다. 시나리오 받으면 생각한다. 이거 내가 해도 되나? 그 형이 하면 어떨까? 그래도 나를 원한다는데 왜 원하지? <대장 김창수> 같은 경우도 3년을 고사했다. 김구 선생을 연기한다는 게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왜냐하면 <명량>(2014) 할 때 힘들어하시는 최민식 선배를 옆에서 봤거든. 으아아악 괴로움의 고성을 지르면서 최민식 선배가 했던 말이 아직도 또렷하다. “내 꿈이 뭔지 아니. 단 1초 만이라도 타임머신 타고 가서 이순신 장군을 옆에서 직접 보는 거다.” 결국 <대장 김창수> 크랭크인 첫날 후회했다. 내가 이걸 왜 한다 했을까. (웃음)
-<공작> 이후의 작품도 정해졌나.
=이해영 감독의 <독전>이 될 것 같다. 원작, 실화, 리메이크 이런 건 굉장히 부담스런 작업들이라 웬만하면 손 안 대려 하는데, <독전>도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2013)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거 어떡하지? 그러고 있는데 벌써 계약했대. 사는 게 늘 이렇게 코미디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