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영진의 영화비평] <문라이트>가 잡아낸 분위기, 그 영화적 접근의 힘
2017-03-09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리 젠킨스의 <문라이트>는 주인공 샤이론이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모습을 세 단락으로 나눠 담고 있지만 별다른 사건이 없다. 1, 2부에서 샤이론은 동성애자라고 주변의 핍박을 받는다. 왕따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단 린치를 당한다. 3부에서 샤이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몸이 두배로 늘어난 건장한 체격을 지닌 성인 남자이자 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소두목이 되어 있다. 샤이론의 주변 삶의 관계도 단출하다. 세 단락에 계속 나오는 인물은 마약 중독자인 샤이론의 엄마와 어릴 적부터 샤이론의 친구인 케빈뿐이다. 첫 번째 단락에서 샤이론을 보살펴주는 쿠바 출신 남자 후안이 나오지만 마약상인 그는 2부에서 죽고 없다. 후안의 여자친구인 테레사는 1부에 이어 2부에도 나오지만 거의 엄마처럼 샤이론을 보살펴주는 천사 같은 캐릭터인데도 그것 말고 별다른 역할이 없다.

잉여적 시선이 만든 자체적 리듬

이것은 요약한 스토리가 아니라 이 영화 내용의 거의 전부이다. 이 스토리로부터 가지를 쳐나가는 사건의 전개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110분이며 별로 길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자잘한 사건과 사건의 연결 사이에 영화의 주된 시간을 채우는 것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후안은 자기가 관리하는 지역에 차를 운전하고 와서 내린다. 후안의 동선을 카메라가 좇아가면 후안 밑에서 일하는 젊은이가 약을 팔 것을 애원하는 한 중독자를 뿌리치는 상황을 두 차례 360도 회전하며 보여주고 그다음엔 후안이 젊은이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는 모습을 또다시 360도로 회전하며 보여준다. 숏으로 나누지 않아 과시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장면 테이크는 한산한 거리의 병든 모습을, 나른한 외형적 공기를, 적절한 격동을 실어 담는다. 장면 자체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숏을 나눠 찍은 것보다는 당연히 긴 호흡이다.

이 영화는 이런 식의 잉여로 자체적 리듬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음미해볼 만한 성취를 거두었다. 카메라 자체가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의 숏을 곧잘 연출하는데도 그게 과잉으로 다가오지 않고 독자적인 스타일로 보인다. 1부에서 소년 샤이론이 다른 아이들과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기 직전에 카메라는 작전 지시라도 듣고 있는 양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이들을 패닝으로 죽 훑는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카메라를 본 것뿐이다. 1부의 또 다른 장면에서 아이들이 화장실에 모여 서로의 성기 크기를 확인하고 있을 때 멋도 모르고 들어온 샤이론은 그 자리에 끼게 되는데 이때도 카메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축구 장면에서처럼 패닝으로 훑는다. 샤이론이 다른 아이들과 친구가 된 것일까, 라고 잠시 추측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감독은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느끼게 하는데 효과는 정지 화면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물 흐르듯 시간도 흐른다.

이것이 과시적 허영으로 추락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그냥 맥락 없이 보면 천진한 소년들의 모습처럼 보일 화면이 앞뒤로 배치된 화면들 속에서 샤이론의 소외를 묘사하고 있어 일종의 대비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샤이론이 처음 화면에 소개될 때 샤이론은 자신을 호모라고 놀리며 쫓아오는 아이들을 피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집에서도 샤이론은 환영받지 못한다. 1부 끝에서 약에 취한 샤이론의 엄마가 샤이론에게 쳐다보지 말라고 표독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약에 취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또한 자기 삶의 짐이 되는 샤이론이 거추장스러워서 한 말이지만 샤이론에게는 이게 트라우마다. 3부에서 어른이 된 샤이론은 꿈에서 어린 시절의 이 장면을 보며 악몽에서 깨어난다. 사건의 전개와는 별개로 이렇듯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들은 첫 장면의 한산한 거리 풍경처럼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표면들의 공허를 지적한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이 영화에서 담고 있는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 폭력의 잔혹함에 대해 많은 것을 함축하기도 한다. 사건을 복잡하게 전개시키는 대신 감독은 이런 장치들을 과하지 않게 반복하고 그로부터 어떤 간단하지 않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반복을 포함해 감독은 때로 평범한 장면에서 꽤 미묘한 뉘앙스를 끌어내는데 그렇다고 그걸 나중에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2부에서 청소년이 된 샤이론은 약을 사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엄마로부터 그날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듣고 방황하다가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의 집에 간다. 테레사는 샤이론을 반갑게 맞이하며 ‘여긴 사랑과 자부심밖에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 샤이론이 잠자리에 들려 하자 테레사는 방으로 들어와 침구 정리하는 걸 능숙하게 도와준다. 테레사는 후안이 처음 샤이론을 데려왔을 때부터 별명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고 자식처럼 샤이론을 대해주던 여자였다. 이 장면에서 샤이론은 엄마 폴라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테레사에게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자식의 잠자리를 챙겨주는 엄마의 모습 같은 것, 동시에 이미 육체적으로는 성인이 다 된 샤이론에게 사랑과 자부심을 강조하는 테레사가 잠자리를 챙겨주는 건 다 늦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장면은 놀라운 후속 장면으로 이어진다. 누워서 자고 있는 샤이론의 몸을 카메라가 관능적으로 훑으며 부감으로 지나치는 장면 다음엔, 그 이동의 에너지를 이어서 샤이론이 테레사의 집 내부를 돌아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샤이론이 바깥으로 나오면 샤이론의 친구 케빈이 여자친구와 성교를 하는 뒷모습이 보인다. 꿈에서 깨어난 샤이론이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이 장면은 끝나는데 잠재적인 성적 에너지를 꿈속에서 폭발시키는 것은 근친상간의 긴장을 친구의 성교로 끌어내는 방식을 통해서다. 이게 놀라운 것은 친구 케빈이 나중에서야 양성애자라는 게 밝혀지고 샤이론이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케빈을 연모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부에서 동일한 장치로, 성인이 된 샤이론의 몸을 카메라가 부감으로 훑을 때 샤이론의 몸은 어렸을 적의 샤이론의 몸이 아니라 유사 아버지였던 후안과 비슷한 체격을 갖추고 있다. 이 장면 다음에 샤이론이 전화를 받으면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케빈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린다. 2부에서의 카메라 움직임의 반복이다. 2부에서 잠재적 욕망이 해변에서의 짧은 사정으로 종결되는 남자들끼리의 동성애로 연결되었다면 3부에서는 또 다른 귀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케빈의 전화를 받은 다음날 샤이론은 몽정을 한다).

뒷모습이 보여주는 것

<문라이트>의 성취를 잘 보여주는 것은 이렇듯 별다른 극적 문맥이 없는 장면들에서 세밀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끄집어내어 그걸 적당한 리듬으로 반복하면서 시간을 능란하게 연장시키는 장면들에 있다. 2부에서 첫 경험을 치른 샤이론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약기운이 떨어진 샤이론의 엄마 폴라가 샤이론을 반갑게 맞이하는데, 늦게라도 들어오지 그랬느냐고 샤이론을 채근하면서 폴라가 샤이론을 집으로 데려갈 때, 카메라는 그들의 모습을 뒤에서 핸드헬드로 좇는다. 화면에는 야외의 소음이 크게 들린다. 인물의 걷는 모습을 앞이나 옆이 아닌 뒤에서 잡아내는 것은 이 영화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패턴이다. 일단, 인물이 걷는 걸 보여주는 건 외형적 에너지가 있다. 그걸 뒤에서 보여준다면 인물의 표정 대신에 인물의 동작으로 모든 걸 전하겠다는 뜻이다. 인물의 걷는 뒷모습은 표정에 인물의 감정을 가두지 않는다. 이 영화에선 이 장치가 매우 효과적으로 쓰인다. 학교에서 집단 린치를 당한 다음날 샤이론이 학교에 등교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중대한 결심을 드러내는 듯 보이는 그의 걸음걸이가 화면에 자연스레 강조되게 따라잡는다. 관객은 샤이론이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지만 그의 걸음걸이로 미루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다. 이 장면의 끝에서 샤이론은 자신을 린치하도록 지휘한 같은 반 급우를 책상으로 내려치는데 그의 걷는 모습을 좇은 선행 숏들의 긴장감으로 인해 이 숏은 상당한 폭발력을 갖는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대화 장면을 담을 때조차 뒷모습을 택한다. 샤이론이 친구 케빈과 동성애 첫 경험을 하는 2부의 해변가 장면에서 카메라는 부감 앵글을 취하다가 샤이론의 등 뒤로 케빈의 말하는 얼굴을 보여준다. 두 소년은 다소 문학적이면서 감상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평소의 거친 언행과는 별개로 소년들의 감성을 수줍게 드러내면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순간을 바람에 빗대 얘기하는 이 장면은 아름답다. 제목이 함축하는 질감을 화면으로 구현하면서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주변으로부터 거부받을까봐 두려워하는 욕망이 감상적인 대화의 실타래를 통해 스르륵 느닷없이 터져나오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감독은 전형적인 숏/역숏의 패턴 대신 대각선으로 축을 가르고 두 소년을 보여주는 방식을 썼다. 이것은 청소년기의 거친 언행에 숨겨진 마음을 살그머니 들춰보기 위해 다가가는 듯 신중하게 느껴지는 접근이다. 상스런 말로 시작된 두 소년의 대화가 ‘바람 느낌 너무 좋다…. 모든 사람이 그걸 느끼고 싶어 해. 모든 게 그냥 고요해지지. 들리는 건 그냥 심장박동뿐이겠지…. 너 울고 있어?’로 이어지는 가운데 화면은 같은 사이즈와 앵글로 붙이지 않은 그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조응하는 순간을 잡아낸다.

이 영화에서의 인물들의 뒷모습을 잡은 장면들은 사회로부터 타자화된 이들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 강조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예의와 같은 것으로 본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관객도 이 영화가 뒷모습을 잡는 패턴에 익숙해 있고 이런 장면들에 이어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보고 싶은 인물의 표정을 보여줄 것이란 안도감이 든다. 특히 3부의 식당 장면에서는 감독의 신중하지만 정확한 화면 크기를 결정하는 감각이 돋보인다. 케빈이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에 샤이론이 들어와서 앉아 있다가 자신을 알아본 케빈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순간, 감독은 이 두 사람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번갈아 보여준다. 케빈이 샤이론을 위해 특별식을 만들고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의 시작이 지연되는 상황들 속에서, 케빈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고 샤이론이 그걸 기다리는 일상적이지만 극적인 설정 속에서, 샤이론의 얼굴 클로즈업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데도 시시각각 많은 변화를 담는다. 샤이론의 유사 아버지였던 후안과 마찬가지로 케빈도 쿠바인이었다는 게 상기되는 말이 오간 후(이제 후안 대신 샤이론은 케빈을 인생의 파트너로 맞이할 것인가), 케빈은 사만사라는 여인과 결혼해 아이가 있다는 말을 하고 샤이론은 후안처럼 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범죄자 두목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교환한다. 두 사람은 각자 처지에 따른 이유로 상대방에게 실망한다. 케빈이 잠시 주방으로 간 사이에 화면은 식당의 출입문을 보여주고 카메라는 그 문을 향해 다가간다. 이어지는 샤이론의 클로즈업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려준다. 샤이론은 케빈을 찾아온 걸 후회하고 있다.

샤이론이 전화한 이유가 뭐냐고 묻자 케빈은 일어나서 주크박스로 간다. 샤이론의 클로즈업에서 카메라가 패닝하면 주크박스가 보이고 더 이동하면 케빈이 노래를 튼다. 컷하지 않고 움직임으로 처리한 영화의 리듬 패턴이 이 장면에서 극적으로 상승한다.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온 이 영화만의 절묘한 잉여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케빈의 연가와도 같다. (안녕하세요, 낯선 분. 당신이 돌아오니 너무 좋네요….) 그전까지 관객인 우리는 케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케빈이 샤이론에게 전화했던 앞선 장면에서 관객은 케빈이 전화를 끊은 후 식당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며 깊은 상념에 빠진 모습을 본다. 케빈은 심지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마치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묻는 듯이 말이다. 케빈은 영화에서 게이의 성징을 드러낸 적이 없다. 해변에서 느닷없이 나눈 샤이론과의 사랑이 충동이었는지 그의 본성이었는지 알 수 없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던 케빈의 정체에 대한 이런 괄호 치기 전략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앞의 숏으로 인해 증폭되지만 활시위를 크게 당겼다가 놓은 것처럼 대단원의 섬세한 클로즈업 배치를 통해 미적거렸던 의문들은 상쇄된다.

<문라이트>는 영화가 사건을 묘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잡아내는 것, 때로는 표정을 잡는 것이 아니라 동작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더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는 영화적 접근의 힘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20세기의 모던 시네마에서 과하게 추구되었으나 이제는 속도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지고 있던 호흡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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