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의 선택을 보면 어떤 도덕적 기준에 억눌려 있지 않아요. 영화 보면서 제가 도덕률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그 여성의 처지에 대해서 깊은, 아주 깊은 공감을 하는 거예요. 그 자체로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할까. 첫 번째 남편을 배반했으니 부도덕한 사랑이고, 주둔군을 사랑했으니 공동체에 대한 배반이고. 도덕적 규범과 충돌하는 한 인간의 감성이랄까, 그런 것이 어쩐지 강하게 남아 있는 거죠.” 2002년 11월 중순, 당시 대선을 앞두고 <씨네21>과 인터뷰를 가졌던(378호, 연속기획 ‘대통령 후보 릴레이 인터뷰’) 노무현 후보가 얘기했던 ‘내 인생의 영화’가 바로 데이비드 린의 <라이언의 딸>(1970)이었다. 그가 군 제대 후 고시공부를 할 때 짬을 내어 봤다는 이 영화의 당시 개봉 제목은 <라이언의 처녀>였다.
191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벌이던 격동의 아일랜드에서 로지(세라 마일스)는 초등학교 선생 찰스(로버트 미첨)와 결혼한다. 하지만 이내 결혼 생활에 지루함을 느낀 그녀는 마을에 새로 부임해온 영국군 장교 도리안(크리스토퍼 존스)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들의 밀회 장면이 들키고 소문이 퍼지면서,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매국노 취급한다. 심지어 아일랜드 독립군의 정보를 영국에 밀고했다는 누명까지 쓰고는 발가벗겨진 채 머리가 박박 밀리는 수모까지 겪는다. 그처럼 자신 때문에 로지와 그 가족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도리안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다시 얘기를 꺼내는 것이 고통스럽긴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라이언의 딸>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던 이유도, 영화 속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도 멋지고 그야말로 로맨티스트였던 도리안 소령과 그의 선택이 떠올라서였던 것 같다.
브리 라슨이나 데인 드한을 좋아하는 후보가 보고 싶어, 혹은 로빈 우드나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든가,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나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를 내 인생의 영화로 꼽을 후보는 없을까? 이번 대선 후보 인터뷰 때도 6명 모두에게 ‘내 인생의 영화’를 물어봤지만, 기자들끼리는 간혹 농담처럼 그런 얘기들을 주고받곤 한다. <씨네21>로서는 15년 만에 대선 후보 인터뷰를 진행한 것인데,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순수하게 미학적 가치보다는 자신의 장점이나 비전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서 영화를 고르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의 <라이언의 딸>은 신선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묻는 질문에도 “로지가 밤에 외간 남자를 만나러 미친 듯이 뛰어나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선하다”며 “역시 인간은 도덕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죠”라고도 덧붙였다. 대선 후보 인터뷰에 임하며 전략적으로 내 인생의 영화를 골라야 할 텐데 ‘정의’보다 ‘욕망’에 충실한 영화를 골랐으니,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하루 앞두고 이 글을 쓰는 지금, 그에 대한 기억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아무튼 2주에 걸쳐 인터뷰에 응해준 여섯 후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안희정 후보는 2월20일 JTBC <뉴스룸>에서 ‘선의’ 해명으로 곤욕을 치른 다음날 인터뷰였기에 혹시나 스케줄을 취소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나와주었고, 심상정 후보도 2월27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박영수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 요청을 승인하지 않으면서 긴급 규탄 기자회견을 가지며 촌각을 다투던 날 인터뷰였기에 같은 걱정을 했으나 역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우리의 걱정과 별개로 두 사람 모두 “약속은 지켜야죠”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15년 전 노무현 후보도 여의도에서 농민 시위가 벌어져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는 불상사가 벌어진 날 인터뷰였음에도, 역시 “약속은 지켜야죠”라며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무척 편안한 얼굴로 대화에 임했다고 한다. 이번 인터뷰에서 후보들 모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약속이 변함없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