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여성감독 마렌 아데가 연출한 <토니 에드만>의 주인공은 괴짜 아빠와 워커홀릭 딸이다. 독립한 딸의 집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부녀지간의 이야기는 농담과 장난이 몸에 밴 아버지의 예측 불허 행동으로 점점 우스꽝스러워진다. <토니 에드만>의 특별한 농담과 극단적 장난이 왜 이토록 웃픈지 생각해보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유력한 수상 후보였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으로 강력히 점쳐졌던 독일영화 <토니 에드만>은 결국 양쪽 모두에서 수상에 실패했다. 칸국제영화제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에 황금종려상을 안겼고 오스카는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세일즈맨>(2016)에 영광을 안겼다. 물론 <토니 에드만>은 그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넘치도록 상을 받았지만 왠지 저 두번의 수상 실패가 영화 자체와는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무엇 하나 뻔하지 않은 이 영화가 끝까지 특별하게 남은 느낌이랄까. <토니 에드만>은 모두가 같은 타이밍에 박수치고 웃음을 터뜨리며 신나게 관람할 수 있는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인생의 무수한 실패들을 모아놓았는데 결국엔 희극이 되고 마는 우리의 삶을 이네스와 빈프리트 부녀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 영화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떠올리게도 한다.
가장 미지의 존재, 가족
가족의 굴레, 가족 안의 역할놀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꿋꿋이 수행할 때 가족 내 분란은 줄어든다. 하지만 자식이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고 나면 부모와 자식의 삶에는 점차 공통의 분모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에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존재가 어쩌면 가장 미지의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 <토니 에드만>의 이야기는 거기서 출발한다. 농담과 장난이 일상인 은퇴한 피아노 교사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기업 컨설턴트로 일하는 성공한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를 만나러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간다. 이 즉흥적 방문으로 빈프리트가 확인하려 했던 것은 그저 딸의 안부였을지도 모른다. 반면 계획에도 없이 아버지를 맞이한 이네스는 역할놀이에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업무와 관계된 자리에 동석한 아버지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장난을 칠 땐 난감하기까지 하다. 빈프리트 입장에선 직업인으로서의 딸의 모습이 오히려 당황스럽다. 중요한 사업 관계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언제든 상대가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네스의 모습은 자신이 상상하던 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내심이 바닥난 두 사람은 결국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인생에 방귀 쿠션 장난 말고 다른 계획은 있어요?”라는 말들을 날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뿔난 말들을 뱉고 난 뒤 찾아온 죄책감은 다시 부녀지간을 (일시적으로) 봉합한다. 결국 빈프리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이네스는 아버지를 배웅하며 베란다에서 눈물을 훔친다.
그때부터 어색한 가면놀이가 아닌 진짜 가면놀이가 시작된다. 성공한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고 싶고 착한 딸 노릇에도 충실하고 싶은 이네스는 그러한 관계의 봉합에 만족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빈프리트는 딸과의 진짜 소통을 위한 충동적 계획을 실행한다. 그것은 토니 에드만으로의 변신이다. 빈프리트는 토니 에드만이 되어 이네스 앞에 나타난다. 뻐드렁니 모양의 틀니를 끼고 덥수룩한 가발을 얹어 완성한 토니 에드만의 외형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럽다. 테니스 선수 티리악의 매니저라느니 독일 대사라느니 하는 신분 위장도 허술하긴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속을 헤아리기 힘든 이네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토니 에드만을 상대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겐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음지의 삶들을 꺼내 보인다. 아버지와 딸이 아닌 이네스와 토니 에드만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빈프리트의 변신은 영화 내내 특정한 웃음 효과를 자아낸다. 토니 에드만으로서의 역할놀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빈프리트는 이미 수시로 틀니를 꺼내 끼며 혼자만의 가면놀이를 즐겼다. 앞니가 드러나 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조금은 멍청해 보이는 뻐드렁니의 위장 효과는 상당하다. 빈프리트가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도 가상의 인물 토니를 소환하는 빈프리트의 장난인데, 빈프리트는 택배 기사로부터 물건을 받는 일조차 평범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가상의 존재인) 동생 토니가 물건을 주문한 것 같다며 문 앞에서 사라진 빈프리트는 분장을 마치고 돌아와 토니인 척하고 물건을 건네받는다. 택배 기사는 나이 지긋한 고객의 장난에 어떻게 맞장구쳐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다가 화면에서 퇴장한다.
대개 빈프리트의 농담과 장난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 불발되기 일쑤다. 때와 장소는 물론이고 상대의 의중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장난이 대부분이라서 그렇다. 빈프리트가 회사 로비에서 이네스를 기다리다 그녀가 등장하자 슬쩍 틀니를 꺼내 끼고 무리의 일원인 것처럼 합류해 걸어가는 것도 불발된 장난이었고, 파티에서 마약을 한 딸에게 다음날 수갑을 채운 것도 상대를 곤란하게 만든 장난이었다. 결정적으로 장갑을 끼지 않은 시추공에게 장난을 쳤다가 일자리를 잃게 만드는 장면은 빈프리트가 사는 농담의 세계와 딸 이네스가 사는 현실 세계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머를 잃지 마세요”라는 빈프리트의 말은 진심이 담긴 위로이기도 하지만 이네스에겐 가혹한 말처럼 들린다. 이처럼 모든게 의도와는 무관하게 빗나가는 농담과 장난은 연쇄 부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소통의 실패는 불통이 아니라 단절이다. 그러므로 빈프리트의 농담과 장난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도된다는 점에서 더없이 낙천적인 소통의 과정이기도 하다.
소중했던 순간들은 붙잡을 수 없다
빈프리트가 토니 에드만을 창조한 것은 마렌 아데 감독의 말처럼 “절박함” 때문이었다. “유머는 종종 현실을 감당하는 도구가 되는데 그 말은 곧 유머가 언제나 고통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빈프리트는 그 방법 외에는 딸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다. 유머는 빈프리트의 유일한 무기이고 그걸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유머가 유일한 무기인 아버지는 또한 쉽게 패배감에 젖지 않는다. 극단적 선택을 한 마당에 물러날 곳도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딸의 불편한 동행이 지칠 만큼 반복되던 때, 남의 가족 잔치에 찾아간 빈프리트는 환대에 대한 답례로 노래 선물을 하겠다며 피아노 앞에 앉아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을 연주한다. 물론 그 노래를 불러야 할 사람은 휘트니 쉬눅으로 소개된 이네스다. “난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란 것을 믿어요.…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하는 게 어려운게 아니에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게 가장 위대한 사랑이에요.” 어쩌면 아버지가 딸에게 해주고픈 말이 담긴 노래, (가사를 모두 외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어쩌면 이네스가 어릴 적 아버지와 자주 불렀을 그 노래는 빈프리트가 꺼낸 비장의 카드였다. 이네스는 열창하는 것으로 그 자리에서 예의를 다하지만 “요란한 방식으로 손을 내미는” 아버지의 손을 끝내 맞잡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네스에게 토니 에드만의 존재는 무용했을까. 마렌 아데 감독은 안일하게 관계의 회복과 소통의 가능성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냉소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이 이별과 실패의 순간들로 채워진다 하더라도 그 인생이 희극이길 바라며 꿋꿋이 유머를 이어갈 뿐이다. 영화에는 여러 이별의 순간이 등장한다. 빈프리트는 함께 살던 늙은 개 빌리와 노모의 죽음을 맞고, 먼 도시에 사는 딸과도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뜨거운 작별 인사도 없이 사랑하는 존재들을 떠나보내는 빈프리트는 그래서 유머의 힘에 인생을 맡긴다.
<Greatest Love of All>의 열창을 시작으로 영화의 마지막 30여분은 거대한 농담들로 채워지는데, 빈프리트가 절박함에 토니 에드만을 창조했듯 이네스의 절박함은 즉흥 나체 생일파티를 여는 것으로 발현된다. 불가리아의 전통 탈 쿠케리를 뒤집어쓰고 거대한 털북숭이가 되어 나타난 빈프리트는 마치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듯 알몸을 하고 있는 이네스와 마주한다. 전에 본 적 없는 딸의 모습이고 아버지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네스는 진작 모든 것을 내려놓은 아버지가 얼마나 절박하게 소통하려 했는지 알게 된다. 그제야 이네스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부쿠레슈티에서 벌어진 아버지와 딸의 극단적 가면놀이는 그렇게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꼴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끝나고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장면 중 하나는 자신의 집 마당에서 잠들었다 깬 빈프리트가 마당 한구석에 죽어 있는 빌리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아침마다 혼자 눈을 뜨고 밤이면 혼자 눈을 감는다. 언젠가 다시는 아침에 눈뜨지 못할 날이 올 테고, 그러기 전까지는 아등바등 살아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빈프리트는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뭐냐는 딸의 질문에 미뤘던 대답을 한다. 대답은 평범하다. 이것저것 하다보면 인생이 훌쩍 흘러가고 소중했던 순간들은 붙잡아둘 수 없다는 얘기들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농담으로 포장하지 않은 진담을 담담히 전한다. 하찮은 농담과 불발된 장난들로 쌓아올린 이야기는 결국 거창하지 않은 진담과 평범한 진심에 가닿는다. <토니 에드만>의 위로는 그렇게 영리하고 따뜻하다.
독일영화의 현재
마렌 아데 감독을 주목하라
독일의 여성감독 마렌 아데는 매 작품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과 빛나는 코미디 감각을 보여주었다. 1976년 독일에서 태어나 뮌헨 텔레비전필름스쿨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2003년에 첫 장편 <나만의 숲>(2003)을 완성한다. 도시의 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멜라니가 새로 사귄 친구 티나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나만의 숲>은 2005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두 번째 장편 <에브리원 엘스>(2009)는 휴양지의 커플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사랑에 빠진 주인공 커플은 자신들보다 더 행복하고 완벽해 보이는 커플을 만나면서 혼란스런 감정에 휩싸인다. 영화는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그 감정의 본질을 정곡을 찌르듯 묘사한다. <에브리원 엘스>는 2009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과 여우주연상(버짓 미니크마이어)을 수상하는데, 이 수상으로 마렌 아데 감독은 독일 영화의 새로운 기대주로 부상한다. 7년 만에 선보인 <토니 에드만>은 2016년 칸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는 등 전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그로써 마렌 아데 감독은 명실공히 독일영화의 현재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