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박광현의 <E.T> 비약적 쾌감을 알게 해준 영화
2017-03-15
글 : 박광현 (영화감독)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출연 헨리 토머스, 로버트 맥노튼, 드루 배리모어, 피터 코요테 / 제작연도 1982년

페이드인되듯이 서서히 세상을 인지하고 보니 날 키우고 있던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였다는 걸 알게 됐다. 객지에 나가 장사를 해야 했던 부모님이 어린 나를 할머니에게 맡겼고 덕분에 나는 지리산 두메산골이 애초에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할머니는 첫 손자를 애지중지 키우셨고 아이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놀았다. 7살 때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점등식을 하던 날, 집집마다 호롱불로 겨우 어둠을 밝히던 마을이 한순간에 대낮처럼 밝아지는 경이로운 체험을 했다. 그때까지 그런 빛을 본 적이 없었다. 10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청주에 어렵사리 장만한 집으로 나를 데려왔다. 소심한 성격 탓에 새로운 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공부도 변변치 않은 데다 촌놈이라 놀리는 반 아이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할머니가 있는 시골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방황하다 슈퍼맨과 로보트 태권V가 그려진 동시상영관의 영화 간판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뭔가에 홀린 듯 영화를 봤다. 산골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보게 된 영화가 하늘을 나는 슈퍼히어로와 로봇이라니…. 이 엄청난 간극에서 오는 몽환적인 기분은 뭐지? 그때 이후로 난 영화라는 미지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언제부턴가 영화 얘기를 듣겠다고 내 앞으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이상 나를 촌놈이라고 놀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영화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시작됐고 몇해가 지나 운명처럼 영화 한편이 내게 나타났다. <E.T.>였다.

지구에 홀로 남겨진 겁먹은 외계인과 그룹에서 소외된 소년이 서로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특별하고도 신비로운 유대가 형성되면서 영혼이 연결된다. 외계생명체와 조우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면 응당 최고 권위의 과학자나 군 장성이 등장하고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야 하겠지만 이 영화는 그런 상투적인 설정과는 정반대로 달려간다. 마술적 상징과 시각언어로 가득 찬 이야기 전개방식은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자신들을 뒤쫓는 어른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미친 듯 자전거를 모는 소년들을 E.T.가 모두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비약적 쾌감의 진수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영화에서도 그 당시 흥분을 비슷하게라도 느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내 인생에 있어서 <E.T.>가 의미 있는 건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인간인지를 알게 해준 영화라는 점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E.T.> 같은 초현실적 존재가 바로 영화였다. 산골 소년이 낯선 세계에서 헤매고 있었을 때 마법처럼 만났고 한순간에 날 빨아들였다. 그리고 더이상 외로워하지 않게 됐다. 아마도 나는 <E.T.>를 본 후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 것 같다. 이 자그마한 외계인이 지구라는 미지의 세계에 홀로 남겨져 방황할 때 엘리엇이 손을 내밀어 친구가 돼준 것처럼 나도 외로워하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래서 <E.T.>를 볼 때의 나처럼 관객에게 비약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줘야 한다는 부채의식 같은 게 생긴 게 아닐까.

박광현 영화감독.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광고회사를 다니다 옴니버스영화 <묻지마 패밀리>(2002) 속 단편 <내 나이키>를 연출했다. 장편 데뷔작 <웰컴 투 동막골>(2005) 이후 두 번째 영화 <조작된 도시>(2017)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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