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안시환의 영화비평] 수정주의 웨스턴과 <로건>
2017-03-21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슈퍼히어로든 사람이든 언젠가는 죽는다. 죽음은 죽는 자의 운명이 결정할 몫이지만 그들에게 어떤 묘지와 장례식을 선물할지는 산 자들의 몫이다. <로건>은 울버린/로건의 장례식을 위한 레퀴엠이다. <로건>에 깔려 있는 수정주의 웨스턴의 그림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수정주의 웨스턴은 서부의 신화를 비판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전부가 아니었다. 존 포드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서 톰 도니폰(존 웨인)의 장례식을 위한 여정을 극의 구조로 삼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 묘지와 함께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우리는 이 묘지와 장례의 절차 속에 ‘웨스턴’ 장르에 대한 수정주의 웨스턴의 진짜 태도가 숨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로건>이 수정주의 웨스턴을 경유할 때, 그것은 로건/울버린이라는 신화적 인물이나 그로 대표되는 시리즈의 신화를 해체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에게 어울리는 무덤과 장례식, 그리고 레퀴엠을 완성하는 것, 그럼으로써 쓸쓸히 소멸하며 사라지는 것을 ‘애도’하는 것, 그것이 <로건>이 수정주의 웨스턴을 차용하는 이유다.

무덤에서 무덤까지

영화는 시작과 함께 이야기한다. 당신이 영화에서 만날 로건/울버린은 ‘슈퍼히어로 울버린’이 아니라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 로건’일 뿐이라고. 그것이 노쇠한 몸으로 만취한 채 비틀거리며 동네 깡패들에게 얻어터지는 로건/울버린의 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이유다. 이러한 로건/울버린의 모습은 돼지우리에서 진흙탕을 한껏 뒤집어쓴 채 등장했던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리엄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몇배 더 당혹스럽다. 그러고 보면, 수정주의 웨스턴의 주인공은 늘 시대착오적인 인물들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이제는 잉여의 인간이 된 자들. 자신이 개척하거나 지켜냈던 세상에서 오히려 쓸모없어진 자들.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자들.

불사의 능력을 잃어가는 로건/울버린 역시 마찬가지이다. 울버린이 100년이 넘도록 죽음을 유예하며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힐링팩터’의 능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힐링팩터 능력이 소진되고, 그는 진통제로 고통을 견디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게 로건/울버린은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진 총알로 불멸의 삶을 겨누며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어쩌면 힐링팩터의 소멸은 단지 신체적 능력의 상실이 아니라 로건/울버린이 힐링팩터로도 감당할 수 없는, 아니 힐링팩터로도 치유될 수 없는 상실감과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그가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버린 자신의 처지를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이유일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울버린은 이렇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이름 없는 무덤 속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어간다. 그런 로건 앞에 멕시코계 여인인 가브리엘라(엘리자베스 로드리게즈)가 갑자기 나타나 ‘울버린’이라는 이름을 크게 외친다. 그 장소가 다름 아닌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고 있던 ‘공원 묘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로건을 향한 가브리엘라의 외침 은 죽어가는 울버린을 되살리라는 명령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죽음의 무덤은 부활의 장소가 된다.

영화의 엔딩이 로건/울버린의 묘지 앞이라는 사실은, <로건>이 이름 없는 무덤에서 죽어 있던 울버린을 이장하는 영화, 그에게 어울리는 묘지와 장례를 헌사하는 ‘애도’의 영화임을 확인해준다. 슈퍼히어로로 살았던 울버린은 아버지로서 죽는다. 로라(다프네 킨)는 울버린 무덤의 십자가를 뒤집어 X자로 바꾼다. 이를 통해 <로건>은 <엑스맨>(2000) 이후 함께했던 모든 엑스맨들을 애도의 대상으로 끌어들이고, (영화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자신이 지키려 했던 세상에서 제대로 된 무덤 하나 없이 사라져버린 그들을 기억의 대상으로 소환한다. 이는 슈퍼히어로에 대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이 악물고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을 위한 헌사다. 이때 <로건>은 또 다른 수정주의 웨스턴인 코언 형제의 <더 브레이브>(2010)의 세계관 곁에 다가선다. 아버지/어머니가 된다는 것.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 그리고 영웅이 된다는 것. 어쩌면 돌연변이 소년, 소녀들에게 에덴은 이러한 ‘어른/영웅’이 버티고 선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 남자의 얼굴을 보라

앞서 언급했듯, 수정주의 웨스턴의 주인공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자들이다. 수정주의 웨스턴에는 곧잘 ‘애상감’이 흐르는데, 그것은 주로 세상(시대)과 어울리지 못한 채 이내 사라져야 하는 서부 사나이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기인하곤 한다. <셰인>(1953)의 엔딩에서 멀어져가는 셰인의 뒷모습에 새겨진 쓸쓸함처럼 말이다. 제임스 맨골드가 수정주의 웨스턴 특유의 인물 유형을 로건/울버린에게 이식함으로써, <로건>은 슈퍼히어로영화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애상의 정서’로 가득한 영화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정서를 더 부각시키기 위한 영화적 표현 방식이다. <로건>은 지금까지 발표된 <엑스맨> 시리즈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잔혹한 액션으로 가득하다. 오죽하면 ‘19금’이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슈퍼히어로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액션의 쾌감을 위한 것도 아니다. 제임스 맨골드는 스펙터클한 액션을 인물의 정서를 표현하거나 고양하는 수단으로 적절히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스펙터클이 관객의 눈이 아닌 관객의 정서를 파고들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울버린의 액션에서는 슈퍼히어로영화에서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처절함이 느껴진다. <로건> 이전에 울버린은 그렇게 처절하고 간절하게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는 싸워 이길 능력으로 충만했으니까. 하지만 늙고 지친 로건/울버린은 싸우는 것이 버겁다. 어쩌면 그가 상대하는 적은 모든 것을 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시간의 무게인지도 모를 일이다. 로건/울버린은 압도적인 능력을 잃은 대신 처절함의 표정을 얻었다. 제임스 맨골드는 울버린의 액션만큼이나 액션 이후 그의 지친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한다. 그의 표정은 버거운 만큼 처절하고, 처절한 만큼 간절하고, 간절한 만큼 처연하다. 클로즈업에 담긴 그의 표정은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의 무게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로건>은 서부극의 상징적 장소였던 서부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의 신화가 시작된 곳에서 시작하는 <로건>은 (소년, 소녀들이 이끌어갈) 새로운 신화를 예고하며 끝맺는다. 돌연변이 소년, 소녀들은 (로건/울버린의 말을 따른다면) 한낱 지어낸 거짓(신화)에 불과한 ‘<엑스맨> 코믹북’에 속아서 에덴까지 왔을 것이다. <로건>에서 보여주는 로건/울버린의 싸움은 코믹북이 그려내는 엑스맨의 활약상이 거짓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늙고 지치게 만드는 시간이 지배하는 현실은 코믹북보다 훨씬 더 처절하다. 슈퍼히어로는 시간이 없는 코믹북에서나 가능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로건/울버린은 자신의 신화를 몸소 해체함으로써 진정한 신화를 완성한다. 마치 웨스턴(장르)이라는 신화를 해체하고 죽임으로써 또 하나의 신화가 된 수정주의 웨스턴처럼 말이다. <로건>이 <엑스맨> 시리즈에 대한 헌사라면, 이 장례 장면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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