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자의 신분을 조작해 대출을 성사시키는 일명 ‘작업 대출’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 돈이 필요한 대학생 민재(임시완)가 석구(진구)의 대출 사무소를 찾는다. 석구는 대출금 입금 직후 거액의 수수료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민재의 서류를 조작해준다. 그러나 민재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친구 해선(왕지원) 등과 짜고 3천만원 전부를 빼돌린다. 그 돈으로 고가의 짝퉁 시계를 매입하려던 민재는 해선의 배신으로 대출금 전부를 잃는다. 민재는 결국 석구 일당에 덜미를 잡히는데, 이때 석구는 민재를 폭행하는 대신 조작단의 멤버가 되도록 구슬린다. 민재는 천문학적 액수를 벌어들이며 그 바닥에서 입지를 다진다. 그사이 검경 연합이 불법대출계를 소탕하려고 기지개를 켠다.
갑을 관계가 분명한 대출의 사슬에서 감독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고 오직 나쁜 놈과 더 나쁜 놈만 있는 세계를 그린다. 적당히 나쁜 주인공 덕에 관객은 사연의 덫에 빠지는 대신 돈이 돌아다니는 행각을 유쾌하게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 그러나 사유의 출입구가 완전히 봉쇄된 것은 아니다. 분화된 캐릭터와 속고 속이는 인물 관계 등 기존 케이퍼 무비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는 듯 보이지만, 휘몰아치는 순간을 위해 내달리는 대신 때로는 느슨하다 싶을 정도로 이완된 흐름을 보이는 것이 두드러진 차별점이다. 이는 장르의 쾌감만을 위해 달리지는 않겠다는 항변처럼 느껴진다. 폭력을 쓰는 대신 평화롭게 돈을 갈취할 수 있게 된 세태를 풍자하는 동시에 거짓 위선이 진짜 선의가 될 수는 없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깔아둔다. 다양한 공간 활용을 통해 대출을 시각화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독립한 민재의 사무실로 쓰인 DVD방은 향수를 불러오는 동시에 대출의 본질이 결국은 비디오나 DVD, 책을 빌리는 것처럼 단순한 행위에서 출발했음을 인식하게 한다. 사무실이 하루아침에 텅 비어버린다든가 있어야 할 곳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사람과 사물의 신출귀몰한 움직임은 마치 한편의 마술쇼처럼 보이는데, 그런 면에서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과 의적 홍길동 스토리를 버무려 현대 한국으로 끌어온 결과물로도 보인다. <떨>(2006)부터 최근 <일출>(2015)에 이르기까지 장르적 실험을 지속해온 양경모 감독의 장편 상업영화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