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은 왕가위보다 2살 많은 형이다. 감독 왕가위(1958년생)를 가운데 두고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두 배우 장국영(1956년생)과 양조위(1962년생)의 다른 점이 (어쩌면 아주 중요하게도) 바로 그것이다. 고리타분한 장유유서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라, <아비정전>을 반복해 보면서 느낀 점이 바로 왕가위가 형 장국영에게 완전히 매혹당한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홍콩으로 <아비정전> 현장 취재를 갔던(!) 한국 영화잡지 <로드쇼>나 <스크린> 기사 사진들을 보면, 자신의 두번째 영화를 통해 드디어 선배 장국영과 함께하게 된 왕가위의 들뜬 표정이 엿보이기도 한다. 물론 촬영이 길어지면서 장국영과 왕가위의 날카로운 신경전 또한 보도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사실 그때만 해도 경력상 양조위는 장국영에 비할 바가 못됐다. <아비정전>은 ‘아비’ 장국영이 중심인 1부와 양조위가 중심인 2부가 맞물리는 구조로 시작한 영화였는데, 아비의 에피소드만으로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뒤 장면의 정서나 서사의 흐름과 무관한 장국영의 맘보춤 장면 같은 것들이 그렇게나 길게 들어갔으니, 당연히 예견된 일이었을 테다. 하지만 계약관계 때문에 양조위 장면이 있어야 해서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 잠깐 등장한다.
장국영은 왕가위와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세 작품을 함께했다. 세편의 공통점이라면 왕가위가 언제나 장국영을 홍콩이 아닌 곳에 버려두고 떠났다는 것이다. <아비정전>에서는 필리핀에, <동사서독>에서는 저 멀리 사막에, <해피 투게더>에서는 그보다 먼 아르헨티나에 버렸다.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일대종사>에서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는 양조위와 정반대다. 그리하여 왕가위는 <동사서독 리덕스>로 새롭게 재편집하여 내놓으며 마지막 장면을 장국영의 정지 화면으로 끝냈다. 떠난 그를 향한 뒤늦은 선물이었다. 그처럼 왕가위 영화 안에서 언제나 예민하고, 정해진 틀로부터 벗어나려 하며, 그리하여 심심찮게 감독과 마찰을 빚기도 했던 장국영이라는 존재는, 그만큼이나 정해진 것 없이 자유분방하게 영화를 만들던 왕가위가 전혀 뜻밖의 예술적 목적지에 다다르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국영이 출연하지 않는 왕가위 영화의 어떤 심심함(?)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올해 4월 1일 장국영의 14주기를 맞아 다시 한번 그를 떠올려보았다.
한편, 이번호 특집을 위해 <씨네21>의 장돌뱅이 정지혜 기자와 손홍주 사진기자가 전국의 독립·예술영화 전용관들을 찾았다. 전남 광주의 광주극장, 경북 대구의 동성아트홀과 오오극장, 강원도 강릉의 강릉 신영극장의 멋진 사진과 인터뷰를 보면서 뭔가 ‘정화’되는 것 같았던 기분을 독자 여러분들도 느껴보시길 바란다. 정지혜 기자가 밝혔다시피 대전 아트시네마와 부산의 국도예술관도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찾아볼 생각이며, 개인적으로는 제주도 최초의 극장이었다고 하는 (구)서귀포관광극장도 지역을 대표하는 멋진 영화관으로 부활하면 진정 멋지리라는 생각도 든다. 서귀포 이중섭 거리에 있는, 천장이 뻥 뚫린 그 극장의 이미지를 접했을 때 타이완 타이베이 시먼딩 거리에 있는 8각형 모양 홍루극장이 떠올랐을 정도다. 지역 기반의 이런 공동체적 영화관들이 더 깊고 단단하게 뿌리내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