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취업준비생의 도(道)
2017-04-03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내 깡패 같은 애인> <10분> <인턴> 등으로 본 취업준비생의 도(道)
01 <인턴>

IMF가 휩쓸고 지나간 한국, 그 황량한 대지에 한 줄기 단비, 아니 한장의 성적표가 내렸다. 2학기 성적이 나왔다는 비보를 듣고 학교로 나간 나는 과방에 모여 있던 동기들에게 당황해서 말했다. “나, 성적이 잘못 나왔나 봐, 3.98이야.”(만점은 4.3) 내가 수업은 한달에 한두번 들어갔고, 시험은… 보기는 했겠지? 하도 오래간만에 학교에 갔더니 경비 아저씨가 어머님이 뭐하시니 묻고 싶은 표정으로 지난달에 강의실 바뀌었다고 알려주던 사람이 나다.

하지만 동기들은 태연했다. “우리는 전부 4점 넘었어.” 아아, 스승님, 눈물이 앞을 가렸다. 사정은 이랬다. 20세기라고는 해도 신랑감 선호도 조사에서 인문대 대학원생이 농부 다음을 차지하던 시절, 우리 과 교수들은 인문대에서도 유독 쓸모없는 지식을 연마하고는(영어사전이 아니라 옥편을 공구하는 과다) IMF 폭격을 맞은 폐허로 나설 제자들을 염려해 A학점 폭격을 하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기도 하지,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용사는 성적표 한장을 무기 삼아 삼무(三無, 토익 점수 없음, 자격증 없음, 심지어 운전면허도 없음)의 맨몸으로 취업 전선에 나섰다는 무모한 이야기다.

세월이 흘러 그 용사는 여전한 삼무(직장 없음, 남편 없음, 잔고 없음)의 삶을 본의 아니게 고집하며 스터디 카페를 찾았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데서 프레젠테이션이라는 걸 한다더라고, 물론 내가 한 건 아니지만. 그런데 옆방 젊은이들이 너무 떠들어서 항의하려는 찰나, ppt를 써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15년 만에 내 존경을 획득한 선배가 황급히 말렸다. “야, 가만있어. 면접 연습하는 애들이야.” 면접이 아니라 웅변인 거 같은데. “자신감도 중요하거든. 그리고… 어디 가서 웅변 얘기 하지 마, 옛날 사람인 거 티 나.”

그러고 보니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면접 보는 애들이 영어로 대답하던데 그거 전부 연습한 거였어? “세상에 연습 없이 되는 일이 어디 있니, 연습 같은 거 안 하고 되는 대로 살면… 너처럼 되는 거야.” 안 돼, 그럼 큰일 나. 처음으로 면접 보러 갔는데 느닷없이 영어로 질문을 해서 아이 캔 낫 스피크 잉글리시, 해볼까 고뇌하고 있노라니 면접관이 한심해 하면서 말했지. “김정원씨, 백팩 몰라요? 배낭여행 가봤냐고 묻는 건데?” 노, 네버. 내 나이 스물넷, 백팩을 알았다. 그전엔 뭘 메고 다녔냐고? 이스트팩 ‘쌕’. 그래, 나 옛날 사람이다.

취업 준비의 치열한 현장을 목격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착잡했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4년째 취준생, 20대에 취업 준비 안 한 벌을 지금 받고 있다. 여전히 준비는 안 하고 감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며 감 떨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문제는 그 감나무가 멸종 위기라는 사실이다.

물론 나이가 많다고 해서 취업이 안 되는 건 아니다. IMF도 눈을 가린 취업 전쟁을 등에 업고 한국에 상륙해 훈훈한 흥행을 달성한 영화 <인턴>의 벤(로버트 드니로)은 나이가 많아서 취업이 된다. 시니어 인턴, 그래봐야 인턴이지만, 무슨 미국 IT회사가 이렇게 경로 정신이 투철한 거지, 오뉴월에 한을 품는 <오피스> 인턴하고는 너무 다르잖아.

하지만 시니어 인턴으로 취업하려면 일단 시니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그리고 시니어가 되려면 도중에 굶어 죽지 않고 그 나이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이 딜레마지. 거기다 벤은 운전면허도 있다고.

그렇다면 나에게 나이 말고 무엇이 있는가. 다년간의 직장 생활로 단련된 비굴함과 눈치가 있다. 그런데 눈치는 있어도 눈치를 보지는 않아, 그건 전혀 별개의 문제, 어쩌면 타고난 천성 혹은 신의 조그만 축복. 게다가 요즘 20대는 내가 십 몇년을 수련한 것보다도 쉽게 자신을 던질 수 있다.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세진(정유미)은 취업하겠다는 일념으로 손담비의 <토요일밤에>를 안무와 더불어 열창한다. 오, 평소에 연습 좀 했겠는데? 역시 연습이 중요하… 지만 그래도 면접 탈락.

02 <10분>

대학을 졸업하고도 2년을 언론 고시로 허비하다 간신히 삼류 회사에 (그러니까 내가 다니던 회사에) 들어온 애가 그랬다. 면접에 인형 탈 쓰고 온 사람도 있었다고. 그 사람이 붙었는지는 슬퍼서 물어보지 않았다.

이처럼 20대들이 취업을 위해 탈바가지를 뒤집어쓰는 시대, 나는 과연 무엇을 감수했는가. 면접 들어갔는데 사장이 빨간 바지에 깔깔이를 입고 있기에 한 시간 반 동안 웃지 않으려고 무지 애썼다. 아, 자기 옛날에 좋은 직장 다녔다며 자랑하는 것도 무념무상으로 참고 들었는데, 나중에 입사하고 알았다, 너, 아빠 백으로 들어갔다며.

다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 <300>의 스파르타 수준으로 헐벗고 취업 전선에 나선 용사는 어찌 되었을까. 이력서에 ○○대학 ○○과 졸업 예정이라고 한줄 적어넣은 무지가 용기로 인정을 받았고(나중에 알고 보니 운전면허도 없다면 ○○고등학교 졸업이라도 써야 한다고), 이 불의의 세상에 20대로 살아가는 고뇌와 고독을 담은 중2병 자기소개서가 남들과 다른 독창성으로 오해를 받아… 취직했다, 만세, 역시 인생은 운발.

03 <내 깡패 같은 애인>

토익 점수가 상위 3%라는 세진이도 <토요일 밤에> 공연을 불사하는 시대에 그런 운발이 얼마나 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대를 불문하고 통하는 운발은 있다. ‘6개월 뒤면 지방으로 이전하는 공공기관’이라는 배경이 참으로 낯익은(심지어 거기 나오는 부장 머리 모양이 누군가와 매우 비슷함) 영화 <10분>에는 복사와 커피 심부름과 야근 등을 감수한 6개월 인턴 인생을 순식간에 무위로 돌리는 낙하산이 나온다. 취업 전쟁의 이 황량한 대지에 무언가 단비처럼 내려주실 거라면, 성적표보다는 낙하산이겠지.

닥치면 되는구나

맨몸으로 취업 전쟁에 내몰린 용사들이 장착하면 좋을 두세 가지 아이템

<10분>

커피잔 나르기

경로효친의 정신이 판을 치는 미국 IT회사지만, 시니어도 인턴은 인턴, 커피 심부름은 벤의 몫이다. 커피가 8잔이면 4잔들이 커피 트레이 2개, 그걸 들고 어떻게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서 사무실로 안착하는 거지? 직장살이 1X년, 지난해에야 그 답을 얻었다. <10분>의 ‘6개월 뒤면 지방으로 이전하는 공공기관’과 매우 비슷한 기관으로 회의를 하러 갔는데, 거기 팀장이 나더러 커피를 사오라는 거였다. 크로스백을 앞으로 돌려 메고 엉덩이와 무릎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아스팔트 정글을 헤쳐나갔어. 닥치면 되는구나.

<인턴십>

발상의 전환

처음 취업을 하고 나니 상사가 말했다. “나는 네 이력서를 읽고 장난으로 썼거나 우리를 우습게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이력서를 뻔뻔하게 내밀 리가 없다, 뭔가 의도가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다시 읽었더니 무한한 가능성이 보이더구나.”(문어체를 육성으로 구사하는 사람이었음.) 다시 말해 4년제 대학 졸업 예정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가 지나친 무식이 나를 구원했다. <인턴십>의 빌리(빈스 본) 또한 그런 발상의 전환으로 일자리를 얻는다. 구글 검색으로 일자리를 찾을 게 아니라 그냥 구글에서 일을 하는 거야. 그리고 구글도 비슷한 착각을 한다, 뭔가 있겠지.

<방가? 방가!>

약점의 승화

<방가? 방가!>의 방태환(김인권)은 동남아 사람처럼 생긴 외모를 이용해 외국인 노동자 행세를 하며 일자리를 얻는다. 외모때문에 놀림받던 숱한 설움의 세월, 그걸 외국인 노동자의 설움으로 승화… 가 아닌가. 어쨌든 월급은 나오니까, 안 나올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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