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듀나의 영화비평]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이 실패한 리메이크작인 이유
2017-04-06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루퍼트 샌더스의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은 스칼렛 요한슨이 주인공인 ‘소좌’로 캐스팅된 뒤부터 화이트워싱 이슈로 논란이 되었다. 이 소동은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처럼 보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동아시아 원작이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었지만 이런 반응은 없었다. 할리우드판 <링>이 미국 배경에 나오미 와츠 주연으로 나왔다고 해서, 원작의 사다코를 사마라란 이름의 백인 여자아이로 바꾸었다고 해서 여기에 대해 트집을 잡는 사람들은 없다. 그렇게 예민하다면 처음부터 리메이크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할리우드 리메이크의 의미는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아이디어를 익숙한 할리우드 시공간에 이식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게으른 관객을 얻는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공각기동대>는 그게 좀 어렵다. 이는 근미래 배경 사이버펑크 만화의 성격과 관련된다. 큰 아이디어, 그러니까 사이보그 여성인 주인공만 취해 SF 액션물을 만드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 만화와 오시이 마모루가 각색한 애니메이션영화가 가진 매력은 몇몇 문장들로 정의되는 아이디어를 넘어선다. 이 매력은 사이버펑크 유행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20세기 말에 상상한 가상의 21세기 초 동아시아 세계 자체에서 나온다. 이를 지금의 할리우드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를 지금의 관점에서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이상하며 무의미하다. 루퍼트 샌더스의 영화는 충실한 각색과 할리우드식 재해석에서 갈등하다 나온 작품이며 어느 쪽으로 봐도 조금씩 덜 익었다.

왜 화이트워싱일 수밖에 없는가

일단 배경을 보자. 원작 만화의 배경은 구체적이고 정확하다. 2029년과 2030년 사이의 일본이며, 정보화가 엄청나게 진행되긴 했지만 아직 국가와 민족의 의미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가끔 수상쩍은 허구의 나라들이 등장하고 세상을 엄청나게 바꾼 허구의 기술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세계는 현실 세계, 그러니까 1990년대 초의 일본과 역사적으로, 공간적으로, 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현재와의 연결성이 사이버펑크 장르의 매력이다.

하지만 샌더스의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은 두 원작의 세계에서 오로지 이미지만을 취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관객은 이 영화의 배경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중간에 수상의 언급이 나오는 걸로 보아 미국이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아시아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일본어, 중국어, 심지어 한국어도 곳곳에 나오지만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쓰고 동양인의 인구 비율은 기괴할 정도로 낮다. 샌더스가 만들어낸 우주는 뿌리 없는 사이버펑크 유원지이다. 그리고 장르 관점에서 이는 별 의미가 없다. 사이버펑크물의 다국적 분위기에대해 착각하지 말자. 사이버펑크 고전에서 그런 다국적 분위기는 근본 없이 여러 요소들이 멋대로 섞여 있는 게 아니다. 그건 20세기 말 SF 작가들이 상상했던 미래로 전환되는 과정의 구체적인 묘사이다. 지금은 그 미래와 과정 자체가 옛 SF 세계의 ‘빈티지 미래’에 편입되어버렸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은가.

영화의 스토리도 두점 또는 세점 사이를 방황한다. 영화의 예고편을 보면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에서 가져온 게 분명한 장면들로 그득하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시로 마사무네와 오시이 마모루가 택했던 극단적인 결말을 택할 생각이 없다. 인형사는 등장하지 않으며 “네트는 광대하니까” 같은 대사로 영화를 맺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원작의 유명한 장면들을 포기하지 못하니 영화가 덜컹거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명장면’들은 상당수가 스토리 속에 녹아드는 대신 의무감 때문에 삽입되었다. 당연히 요한슨이 연기한 소좌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분명 동아시아 어딘가처럼 보이는 나라에서 동양인들을 싹 밀어버리고 백인 주인공이 앞으로 나온다면 화이트워싱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영화의 각색팀이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식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심지어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까지 만들고 있다.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 만화보다는 이후에 나온 <공각기동대: S.A.C.> TV시리즈에 더 가까운 이 스토리는 왜 원작에서는 쿠사나기 모토코란 이름으로 불리던 일본 여성의 모습을 한 사이보그가 영화에서는 미라 킬리안이란 이름의 백인 여성 모습을 한 사이보그인지를 설명한다. 그렇게 엄청난 아이디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설정과 맞고 스토리와도 맞는다. 하지만 이 과정은 너무나도 적나라한 화이트워싱이며 모든 진상이 밝혀진 클라이맥스에서는 배우, 배경, 대사, 스토리가 어색함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보일 정도다. 이렇게까지 무리한 노력을 해야 했다면 차라리 그냥 동양인 배우를 알아보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고유의 힘을 상실한 삼탕 영화의 한계

오시이 마모루 영화의 팬들은 두 작품을 비교하며 샌더스 영화의 빈약함을 비난할 것이다.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과 비교했을 때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성취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 좋은 아이디어와 장면 구성은 원작에서 나왔고 영화의 ‘철학적 묵상’은 너무 원론적이라 지금 보기엔 한없이 나이브하다. 원작 만화에서는 이 문제점이 없는데, 그건 만화가 사이버펑크의 전위에 서서 전진하느라 바빠 남들이 다들 몇 십년 전에 고민을 끝난 과거의 질문에 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시이 마모루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 이 영화도 폼 잡고 묵상하느라 도대체 앞으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샌더스의 영화는 오시이 마모루 영화의 일본식 느끼함과 나이브함을 지워버리고 현대적인 할리우드 액션영화로 재탄생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개선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영화에는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짜증날 정도로 반복되었던 여성 신체의 선정적인 묘사가 상대적으로 줄었다. 오시이 마모루 영화에 비하면 페이스도 빠른 편이고 액션도 늘었다. 무엇보다 스칼렛 요한슨과 줄리엣 비노쉬가 같은 장면에 나와 연기를 섞는 희귀한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이 일본식으로 느끼하고 나이브하다면 이번 할리우드 버전은 할리우드식으로 느끼하고 나이브하다. 기억상실증 환자의 정체성 고민, 자본주의 사회 비판과 같은 것들은 대부분 특별하지 않는 클리셰이며 영화는 이 진부함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삼탕 영화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1980, 90년대 사이버펑크물들은 이미 유행이 지난 지금 보아도 당시에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던 실험의 힘이 느껴진다. 그건 유행이 지났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매트릭스> 시대를 거치면서 이 모든 장르 어휘들이 재탕, 삼탕을 거쳐 클리셰화된 지금은 그런 고유의 힘을 가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지금과 같은 시절에 <공각기동대>와 같은 영화를 만드는 이상적인 길은 시대물 창작과 비슷해졌는데, 대자본 할리우드영화에 그 길을 따르라고 하는 건 무리다. 영화는 끝없는 타협으로 이루어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비슷한 무언가에서 멈춘다. 차라리 괴물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괴상함이라도 갖추고 있다면 좋겠지만, 샌더스가 만든 괴물은 오래전부터 반복된 클리셰의 무난한 결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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