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경사기도권]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누군가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관한 역설 <분노>
2017-04-10
글 : 허지웅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김지은 (일러스트레이션)

누군가를 믿어본 게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너는 아무도 믿지 않느냐, 라고 묻는다면 딱히 그런 건 또 아니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두 가지 선택지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까, 아니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닌 그냥 그런 상태로 사람을 대한다, 라는 정도가 가장 걸맞은 대답이 될 것 같다. 반드시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그 사람과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물론 완전무결한 믿음을 딛고 섰을 때 비로소 보답처럼 가능해지는 인간관계들도 있다. 그래, 그런 관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전력을 다한 관계란 대개 사람을 속에서부터 갉아먹는 것이라 아무쪼록 젊고 건강할 때 해야 몸에 축이 나도 별다른 무리가 따르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무리다 무리.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닌 그냥 그런 삶이 좋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다. 뭔가를 믿고자 하는 건 일종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본능에 반하는 행동이 기쁘거나 좋을 리 없다. 나는 엄마에게 종종 성당에 나가라고 강권한다.

정작 나는 가지 않는다. 엄마에게 성당에 나가라고 하는 이유는 뭔가를 믿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엄마는 요즘 다시 성당에 나가고, 덕분에 나는 마음이 한결 놓인다.

이상일 감독의 <분노>는 믿음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는 이 모든 악행과 불신,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고 겨우 무언가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배신당하기 일쑤인 세상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군가를 믿어야하는 이유에 관해 역설한다.

<분노>는 흥미로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먼저 영화는 살인사건 현장을 보여준다. 잔인한 살인이 벌어졌고 범인은 현장에 ‘분노’라는 단어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후 곧바로 영화는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치바의 커플.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는 의심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신주쿠의 커플. 남자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는 어딘가 의심스럽다. 세 번째는 오키나와의 친구들. 여학생은 무인도에서 배낭여행 중인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왜 무인도에 숨어 있을까.

이들은 모두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사고 있다. 저 세명의 남자 가운데 한명이 범인이다. 그 말인즉, 나머지 두명은 공연한 의심을 받고 있을 뿐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이야기다. 범인을 찾는 영화인데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진짜 범인이 밝혀지고 나면 영화의 2/3를 차지하는 나머지 두개의 사연이 살인사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별개의 것이 된다. 과감한 구성이다.

물론 이와 같은 구성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진짜 목적이 범인을 찾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범인으로 밝혀진 하나의 에피소드 이외에 다른 두개의 에피소드가 단지 맥거핀으로 소모되거나 무의미해지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분노>는 의심이 파고와 같이 불어나 현실을 왜곡해버리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나아가 그런 의심과 불신이 얼마나 큰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결백이 증명되는 나머지 두 사연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주력하는 대목인 것이다.

추리를 요하는 구조인 동시에 사유를 동반하는 이런 식의 이야기는 좋은 평가를 얻기가 쉽지 않다. 실제 일본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추리소설 원작의 영화들이 대부분 이런 식인데 그 가운데 <분노>만 한 성취도를 보여주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등장인물이 많지만 와타나베 겐부터 쓰마부키 사토시, 미야자키 아오이까지 배우들이 각 지역의 에피소드별로 정돈된 연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난삽하지 않다. 그 가운데 마쓰야마 겐이치를 반드시 따로 언급하고 싶다. 이 배우는 볼 때마다 더 나은 배우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좋은 배우들이 모여 집중력이 돋보이는 연기를 해낸 것도 주요했지만, 무엇보다 원작의 장황한 이야기를 영화라는 틀 안에 조율해낸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물론 마음 같아선 142분의 시간이 좀 부담스럽고 결말의 감정들이 다소 중복되어 있다는 생각이지만 지금의 상태를 선택한 감독의 생각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영화를 보다가 무척 인상 깊은 대사를 발견했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는 힌트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누가 한 이야기인지, 무슨 맥락인지는 따로 밝히지 않겠다. 대사는 다음과 같다.

“오키나와의 편이라든가 하는 그런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하지만, 너의 편이라면 언제든지 되어줄게.”

언뜻 들으면 꽤 달콤한 말이다. 이와 같은 패턴의 대사들을 수많은 청춘영화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저 말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컨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저런 말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한 용도일 뿐이다. ‘너의 편이 되어준다’는 말의 무게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편이라든가 그런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하지만’이라는 말이 드러내고 있듯이 말이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는 일은 오키나와의 편이 되는 것만큼이나 크고 무거운 일이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일인지 알지 못하거나 애초 고민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만이 저런 약속을 쉽게 내뱉는다. 영화 속에서 이 대사를 내뱉은 사람은 아니나 다를까, 이후 저 말이 얼마나 가볍고 의미 없는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단지 순간적으로 상대의 호감을 얻거나 그냥 그 순간에 멋진 말을 내뱉기 위해 너를 믿는다느니, 편이 되어준다느니 약속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약속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지킬 수 없는 약속과 위로를 늘어놓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 것들에 일일이 기대를 걸거나 의미를 두느니,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닌 그냥 그런 상태로 살아가겠다는 내쪽이 정신건강에 확실히 유리해 보인다. 물론 앞서도 말했다시피 이 영화는 이 모든 불신과 악행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지옥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더 깊은 지옥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와 같은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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