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허우샤오시엔 / 출연 진송룡, 양조위, 신수분, 잭 카오 / 제작연도 1989년
<위켄즈> 편집을 하다 말고 부산으로 향했다. 2015년 가을, 여름 내 손에 들고 있었던 <위켄즈> 편집은 마감을 넘긴 지 오래였다. 편집이 진행될수록 ‘나는 왜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가’라는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쉽사리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거대한 밀림 속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 다큐 편집은 그 밀림 속을 헤쳐나가는 것과 비슷했다. 어디든 길이 될 수 있지만 길은 언제라도 막힐 수 있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산개한 햇살 같은 실마리가 절실했다. 그러던 차에 허우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2015) 표를 구했다. 예매 오픈 하자마자 매진된 영화의 표를 가까스로 구했는데, 포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던져두고 부산행 기차를 탔다. 부산국제영화제로 가는 길 내내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묵직한 따뜻함이 오랜만에 내 몸을 찾아왔다. 사실 <자객 섭은낭>보다 <비정성시>(1989)를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설렘이 더 컸다.
1989년 12월 8일 낭트,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를 보던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지만 나는 언제 처음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중학생 때였나, 작은 브라운관 TV로 보았던 것이 첫 기억의 전부다. 형의 영화잡지 <로드쇼>를 훔쳐보며 영화라는 친구를 막 알기 시작할 즈음이었을 것이다. 친구들만큼 키가 자라지 않아 속상해하고, 어른이 되면 서울로 올라가 좋은 영화를 마음껏 보겠다고 철없는 인생의 목표를 결심하곤했던 즈음, <비정성시>를 처음 보았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대만 현대사 위에다 한 가족의 몰락을 ‘물끄러미’ 그려넣었다. 대만의 역사를 모르니 2·28사건이나 외성인/내성인의 구분도 몰랐다. 시대의 모순과 개인의 갈등의 층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맘이 아프고 슬펐다. 차마 울 수 없게 만드는 먹먹함이 가슴속을 가득 메웠다가 큰 구멍을 내며 사라졌다. 그런 영화는 처음이었다. 녹화한 VHS테이프를 수시로 돌려보았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와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도, 시험이 끝난 늦은 오후에도. 한번에 다 보지 못해도 좋았고 어디서 시작해도 좋았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대학에 오고 나서야 그것이 위로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정서가, 답답함에 밤새우던 세상과 나 사이의 모호한 감정들이 거기에 다 있었다. 두려움과 슬픔, 근심으로 직조한 시대의 공기와 그 속의 작지만 큰 사람들이, 드넓은 산과 바다 사이 어딘가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그 모든 서글픈 풍광이 나한테는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괜찮다며 그들에게, 또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알다시피 <비정성시>는 청춘을 위로하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으니까. 어리석게도 좀더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다. <비정성시>의 이야기와 이미지가 수렴하는 곳은 결국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였다는 것을. 그가 ‘영화는 결국 세상에 대한 예의’라고 말했다는 글을 읽으며, <비정성시>라는 영화가 최선을 다해 쌓아올렸던 체온의 정체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 나는 처음 마주한 영화의 체온을 반복해서 돌려보며 따뜻한 위로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영화가 사람은 아니지만 속 깊은 오랜 친구처럼 문득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있다. 부산에서 다시 <비정성시>를 보았을 때도 그러했다. 난생처음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영혼이 바짝바짝 말라버린 나에게. 잃어버린 영화의 체온에 대해서.
이동하 영화감독. 국내 최초의 게이 코러스 ‘지보이스’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위켄즈>(2016)를 만들었다.